[바그너, 엘가 그리고 피터 비스펠베이]

에드워드 엘가 (Elgar, Edward, 1857.6.2~1934.2.23) ‘사랑의 인사’로 친숙한 에드워드 엘가는 1857년 악기점을 운영하며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운 뒤, 15세 때 학교를 졸업하고 라이프치히로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가정 형편상 포기하고, 아버지를 도우며 악기점에 있는 악보와 이론서를 섭렵하여 독학으로 음악 공부를 하였다. 처음에 법률가에 뜻을 두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발견한 후 음악공부를 한 것이다. 그 후 우스터 글리 클럽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다. 1889년 32세 때 8년 연상의 캐롤라인.E.로버트와 결혼하였으며, 헌신적인 아내의 내조로 용기를 얻어 지방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작곡활동을 하였다. 1896년 칸나나 ‘올라프 왕’이 북 스테퍼드 음악제에서 초연되어 주목을 받았으며, 1899년에 영국에서 발표한 ‘수수께끼 변주곡’은 그에게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1900년 버밍검 음악제에서 초연된 오라토리오 ‘제론티우스의 꿈’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시트라우스에게 인정받고 유럽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25년간의 무명 시기를 마감하였다. 1901-14년의 시기는 작곡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였으며, 1908년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은 1년 사이에 빈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100회 이상 연주되어 호평을 받았다. 특히 ‘위풍당당 행진곡’의 5곡 중 제1번곡은 1902년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사용되어 가장 알려져 있다. 1904년 나이트에 추서되었고, 만년에는 준남작에 추서되기로 하였으나, 1920년 아내를 잃은 후 14년간 거의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엘가의 본래 영역은 합창을 이용한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이었으나 교향곡, 협주곡 등 관현악작품에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음악은 슈만, 브람스로부터 화성의 영향, 바그너로부터 반음계주의의 영향 등, 후기 낭만파의 영향을 받아 영국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전형식을 존중하면서 영국의 민속적인 요소를 첨가시켜 그의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서 현대 영국 음악의 선구자라 칭하고 있다. 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 (첼로 협주곡 E단조 작품 85) 엘가(Edward Elgar)의 '첼로 협주곡'은 늦가을의 황혼과 같은 적막함과 쓸쓸함을 보여준다. 아련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명상적인 이러한 작품은 대중적인 인기를 폭넓게 얻기가 어려운 작품이지만 비운의 여류 첼리스트 쟈클린느 뒤 프레로 인하여 유명해진 음악이기도 하다. 천재 소녀 장한나가 6살 때 쟈클린느 뒤 프레의 첼로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음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들었을 것이다. 유명한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의 곡이지만 저명한 첼리스트 펠릭스 샐몬스에 의한 1919년 초연에서는 실패한 곡이었다고 한다. 이 곡을 인상적인 재연에 성공시켜 많은 연주가의 레퍼토리로 장착시킨 사람이 빙아트리스 해리슨이라는 사람이고, 레코드로 세상에 널리 알리기는 바로 쟈클린느 뒤 프레의 곡이 으뜸으로 꼽히는데 두 사람 모두 여류 첼리스트이다. 이 협주곡은 4악장으로 이루어진 대작이긴 하지만 간결하여 매우 실내악적이라 할 수 있다. 엘가는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연상인 그의 아내는 그에게 자신의 정신과 음악을 붙들어 주는 에너지였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후, 다음 해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야 했다. Elgar의 Cello Concerto in E minor, Op.85 중에서 3악장 Adagio ------------------------ 글 : 이준한 (인터파크 엔터테인먼트 공연사업부 allan@interpark.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