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속의 요정] 32명의 김성녀가 풀어내는 감동

“5년 만에 대학로 무대에 서 봅니다.”
목소리나 걸음걸이나 곱기 그지 없는 김성녀가 객석으로부터 걸어나오며 건네는 인사다. 불이 환한 객석에 준비 없이 앉아 있던 관객들은 그렇게 친근하게 배우를 만난다. 제 4의 벽은 이미 무너졌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가 풀어지고 김성녀가 무대로 향하면, 공연 시작이다.

다시 돌아온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의 앵콜 공연이 올해에도 이어진다. 2005년 초연 이후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김성녀의 1인 32역, 50년을 통하는 역사 속 우리 이야기, 맛깔나고 구성진 노래는 작년까지 대구, 의정부, 제주도 등지를 거쳐 대학로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했다.

도란도란, 이야기의 힘
스페인 내전 당시의 실화를 일본인 작가가 극화했고, 다시 한국으로 가져왔으나 어느 곳에서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이야기가 가진 큰 힘의 증거다. 일본의 동명 작품이 원작이라 하나 각색이라기보다 재창조가 더욱 어울린다. 작년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은 [열하일기만보]의 작가 배삼식은 치밀하고 탁월하지만 우리네 여유와 흥의 맛을 빼 놓지 않는 묘미를 부렸다.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머리맡의 어머니처럼, 마을의 전기수처럼, 재롱 가득한 어린 아이처럼 김성녀가 관객 주변을 맴돌며 풀어내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철없던 시절 결혼한 어린 신부와 꼬마신랑이 함께 50여 년의 세월을 쌓아가며 겪어내는 삶의 모습들엔 구비구비 산골 같은 인생의 고저가 그득 담겨있다. 함께 펼쳐지는 김서방과 박서방의 그림자극은 한편의 전례동화처럼 아름답고 여운이 길다.



32명, 50년 이야기
긴 의자 하나, 왼편과 오른편 작은 반닫이 두 개가 전부인 텅빈 무대와 하얀 뒷 배경에서는 32명의 인물과 장면이 찰나의 순간에 태어나고 또 사라진다. 천상 배우인 김성녀는 양갈래 머리를 얹기만 하면 소녀가 되어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스웨터 하나를 걸치면 살림을 짊어진 어미가 되어 주름살을 그려낸다.

한국 전쟁과 해방, 그리고 아스팔트 길이 깔린 현대에 이르기까지 벽속의 요정이 걷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하지만 현실이 앉고 있는 무거운 공기를 예상치 못한 때에 ‘퐁’하고 빠져나게 해 숨 쉴 구멍을 만드는 것이 있다. ‘살아 있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며 경쾌하고 유쾌하게, 구성지고 질펀하게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관객을 울다가 웃게 만들고 이내 작품에 홀리게 하여 멋쩍을 틈도 만들지 않는다.

춤과 노래, 그리고 이야기와 연기 등 공연이 갖춰야 할 모든 요소가 잘 맞물린 [벽속의 요정]을 내공있는 배우의 멋진 무대쯤으로 정리하기엔 아쉬움이 크다. 죽음 앞에서 신 보다 평생을 함께한 가족을 향해 죄를 고하는 모습에서 관객들은 이 작품 안에 인간을 향한 고귀한 정신이 무엇보다 묵직하고 뜨끈하게 담겨 있음을 알아차릴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글 : 황선아(인터파크ENT 공연기획팀 suna1@interpark.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