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멕베스] 떨고 있는 그녀를 보라
검고 비틀어져 한 쪽이 기울어진 무대. 온통 어둠뿐인 이 공간이 내뿜는 숨은, 상상하지 못할 공명의 힘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짓누른다.
6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 연극 [레이디 멕베스](연출 한태숙)는 여전했다. 서슬 퍼런 권력의 암투 위에 선 이 여인은 누구보다 강렬하게 목적을 향해 돌진했지만 이제 자신의 손에 남은 핏내에 괴로워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1998년 초연 당시 ‘칼을 든 자, 멕베스’가 아닌, ‘칼을 들게 한 자, 레이디 멕베스’에 초점을 맞춘 것과 함께 강렬한 소리, 오브제의 활용 등으로 큰 화제를 낳았던 이 작품이 2002년 공연 이후 ‘예술의 전당 20주년 기념 최고의 연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시 무대에 서고 있다.
초연의 충격과 6년 전의 감흥을 안고 다시 선 이번 무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연극이 창조해 낸 다양한 발화(發話) 기관이다. 상당량의 언어를 대신하는 빛과 소리, 그리고 오브제들의 향연은 날카롭고 감각적이다. 암흑의 무대 위에 시종이 거침없이 내리 긋고 휘돌아 펼치는 순백의 밀가루 길은 이 여인이 꿈꾸는 죄 짓기 전의 순결, 혹은 돌아가고 싶은 무결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길은 그녀가 앉은 자리 아래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빛이 없는 그림자만 가득한 현실과 대면한다.
흑백의 색체 대비를 뛰어 넘어 밀가루와 찰흙이 빚어내는 오브제의 향연이 압권이다. 공연 시작 후, 시종들이 맛있게 주고 받아 먹는 떡은 곧 사람의 분비물이며, 서로의 얼굴에 던져지며 으깨지는 이 진흙은 스스로를 겨누는 오물이다. 커다란 밀가루 반죽은 길어지고 또 길어져 뱀의 똬리처럼 레이디 멕베스의 온몸을 옥죄어 오기도 하고, 허공에 매달린 찰흙 정물은 죽음의 순간에 하얀 피의 파편들을 토해 내기도 한다.
하나의 제의(祭儀)와 같은 무대, 그리고 이 몸짓들에 실린 음악은 관객의 촉수를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천진 난만한 아이의 웃음, 혹은 울음 소리일지도 모르는 낭랑한 구음(口音)은 섬뜩하며 대사와 동작 사이에 엄습하는 타악의 울림은 소름끼친다.
깨끗하고 빈 무대에서 탄생하는 상징과 표현들은 그 무엇보다 꽉 찬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에너지 가득한 배우들의 움직임이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미묘한 심리를 말해준다. 하얀 피부가 돋보이며 성적 매력이 넘치는 건강한 여자 레이디 멕베스(서주희 분)와 최면과 몽유를 통해 그녀를 죄의식에 맞닿게 하는 전의(정동환 분)의 어울림은 격정적이면서 장엄하기까지 하다.
기존 객석의 반을 포기하고 무대 위로 올린 좌석 배치는 작지만 강하게 무대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전체적인 조도가 낮은 공간에서 바닥을 내리꽂는 스포트라이트는 어느새 객석의 양심을 건드리고 80분의 공연에서 우리는 ‘죄 있는 레이디 멕베스’ 일지라도 그녀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무거운 가책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욕망의 실현과 그 결과에 웃고 우는 것 모두가 나의 몫이다. 야망의 단맛 뒤에 온몸으로 찾아오는 혹독한 죄의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 행동의 이유를 타인에게 물을 까닭이 없기에 레이디 멕베스를 관객들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연극적 표현의 한계를 묻는 어리석은 질문 앞에 우리는 [레이디 멕베스]라는 현명한 답안을 내 놓을 수는 있다.
글: 황선아 기자(인터파크ENT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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