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버드> 날카롭게 상처를 쪼기만 할 뿐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하고, 가수 최희준은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하며,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며 인생의 상대적인 길이를 표하기도 했다. 인생은 어차피 case by case 라고 친다면 여기 연극[블랙버드](연출 이영석)의 인생은 쓰레기통이다.
먹다 버린 빵, 찌그러져 있는 음료수 캔, 찢겨진 종이 더미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방, 쓰레기통이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무실 기기와 구별하기 어려운 이곳에 두 남녀 레이(최정우 분)와 우나(추상미 분)가 서 있다.
15년 만에 만난 이들은 조용하고 불편하며 날카롭다. 20대 후반의 여자와 50대 중반의 남자는 과거 성관계를 맺었던 사이. 오래 전 이별과 일방적 노력으로 이뤄진 재회는 이들의 관계가 개인들에게도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더러 두 사람에게 충분히 예상되는 사회적인 지탄과 처벌이 따랐음을 짐작케 한다.
우연히 잡지책에 실린 광고, 그 안에 작게 실린 레이의 얼굴을 한번에 알아차린 우나는 먼 길을 운전해 그를 찾아냈다. 이름도 바꾸고 새 삶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있다는 레이를 향해 우나는 어린 시절 옆집 아저씨로 그를 만났던 동네를 떠나지 않고 줄곧 살고 있다며 자신은 그곳에서 오롯이 모든 아픔과 고통을 받아왔다고 토로한다. ‘아버지가 당신을 찾으면 꼭 죽이겠다고 했다’고 울부짖는 우나를 보면 이 공연을 가해자 남자를 향한 피해자 여자의 복수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상이 내린 대중적인 진실, 그리고 나조차도 모르겠는 저마다의 마음은 이들의 관계가 ‘범행’처럼 단순한 정의로 명명할 수 없음을 비친다. 간결하지만 강하게 쏟아내는 명료한 말들, 두뇌게임을 하듯 치열한 긴장을 싣다가도 과거와 현재에 아파했을 상대에게 나도 모르게 내뱉는 측은지심은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아슬하게 버텨온 저마다에 대한 위로일 지도, 상대에게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고도의 알리바이일 지도 모를 일이다.
우나는 ‘자기 집이 아닌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새끼’를 쫓아가 그것을 다시 주으라고 했다고 말한다. 누구의 잘못을 꼬집어 물을 수 없는 비확정 구역에서의 무책임한 행위에 분개하는 그녀의 행동은 그렇게 레이에게서 버려졌다는 트라우마의 발현일 것이다.
그러나 곧 이들은 쓰레기를 치워도 여전히 더러운 방안에 오히려 쓰레기통을 부으며 회피하고 싶었지만 순간 이것이 자신들의 모습임을 인정한다. 그 안에서 뛰고 쓰레기를 발로 차며 희열과 일체감을 맛보는 그들. 그리하여 과거의 서로가 순간 진실했음에 합의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도 모를 일.
연극 [블랙버드]의 압권은 밀도 있는 전개에 더해 예상되는 결말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들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결정할 수 없으며 과거의 사건이든 현재 이들의 모습이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경 속 죄인의 눈을 쪼아먹는 새’인 블랙버드가 아물 기세가 없는 상처를 날카로운 부리로 콕콕 찍어내는 고통만 있을 뿐이다.
90분의 러닝타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균열이 없는 꽉 찬 흑백의 공간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날카롭게 빛난다. 그들이 방을 박차고 나간 후 복도 창문에 반사된 마주선 그들의 그림자. 15년을 기억하고 7시간 동안 운전하며 현실로 달려온 우나와 15년을 외면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레이가 앞으로 인생을 더 걸어가도 서로의 그림자는 떨어지지 않을 듯 하다.
글 : 황선아기자(인터파크ENT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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