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걸즈> 예외를 꿈꾸는 여자들에게 경고함

하루도 아니고 한 달도 아니고 일년도 아니다. 헤어진 지 10여 년이 지나 겨우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다는 착각을 믿고 있을 때쯤 날아온 전화 속 그의 목소리. “우리…한번 보자.”

미워 죽겠지만 결코 미워지지 않는 ‘나쁜 남자’와 과거 여자들의 만남, 연극 <썸걸즈>(연출 황재헌)가 다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년 여름,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이 매력적인 남자의 행위가 여성들로부터 많은 공감의 파장(?)을 불러 일으킨 후 1년 만이다.

유명 영화감독이 된 과거의 남자 강진우는 결혼을 앞두고 헤어진 여자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한 번 만나길 원한다. ‘우리 관계를 좋게 마무리 짓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

이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순진한 첫사랑의 여인부터, 화끈한 밤의 파트너로 즐기기에 충분했던 정열의 여인, 권태로운 결혼 생활 속에 있던 선배의 아내, 그리고 가장 사랑했었다고 믿고 있는 예비 의사까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여자들이지만 어느 한 순간 훌쩍 사라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꼭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기꺼이 남자의 초대에 응한다.

추억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되는 것이 사실이나 언제나 미화되지는 않는 듯, 상쾌하고 유쾌한 만남에 설레어 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들은 여전히 울고, 웃고 아파한다. 현재와 연결된 과거의 꼬리를 잘라내지 못한 여자들의 자조 섞인 웃음과 통쾌한 복수, 그렇지만 여전히 씁쓸한 뒷모습은 some girls의 모습이 아닌 every girls의 그림자다.

호텔방은 단순히 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소에 더해 후반부 아찔한 반전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 되고 있다. 1년 사이 유부남이 되어 돌아온 두 남자 이석준과 최덕문은 더욱 능글맞게 호텔방 여기 저기를 누비며 여자 관객들의 입에서 기꺼이 ‘욕’이 나오게 하는 기막힌 연기를 선보인다.

암전은 무대 위 배우들 등퇴장에 맞추지 않는다. 떠나는 이의 발걸음을 더욱 확실하게, 그 다음 사람을 맞을 껄렁한 준비를 제대로 보여 준 후 잠시 무대의 빛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암전 역시 극을 만드는 또 하나의 효과적인 장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흐리게 들려오는 TV 소리와 도시의 소음, 여인의 눈물 뒤로 흐르는 남자의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과 유쾌한 팝송 비트는 가슴에만 담아 둔 말들을 대신 이야기 해 주며 <썸걸즈>의 분위기를 무대 위에 그대로 투영한다.

다시 모인 이들 중 제대로 ‘굿바이’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급하고 여전히 서투르며 일방적이나 이해도 된다. 알고도 속아주는 여자라지만 결과는 ‘속았다’이고, 너를 사랑해서 떠났다는 배려의 결과도 역시 ‘떠났다’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들이여, ‘적어도 나는’이라는 달콤한 순도 99%의 유혹에 넘어가는 묘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을 행복하게 살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것 아니겠는가.


글 : 황선아 기자(인터파크ENT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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