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프> 숫자 밑에 어린 사람 이야기

인생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끊임없는 사투일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사회에게, 자신이 맞닿아 있는 이들에게 존재하는 ‘내’ 모습이, 그대로 나에게 투영되기 때문이다.

연극 <프루프>에서는 아버지와 딸, 연인이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투영해 나간다. 천재수학자이지만 중년에 정신분열로 힘든 삶을 보내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를 위해 대학을 포기하고 곁에 있는 딸. 한 겨울 정신이 나간 채 문밖에서 뜻 모를 이야기를 써나가는 아버지, 그를 감싸 안을 수 밖에 없는 딸의 심정이 마음을 두드리고 적신다.

가장 존경했던 수학자 아버지가 정신분열증으로 갑자기 낯선 사람이 될 때의 충격과 서글픔은 이 작품의 주인공 캐서린이 겪어야 고통의 중심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후 밀려오는 허무함과 자신도 미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녀를 예민하고 신경질 적으로 만들었다. 그녀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을 방어적으로 대하지만 오래된 집 안에서 단지 아버지와의 교감만으로 살아오던 그걸 대신할 그 무엇이 절실해 보인다.

김지호는 연극 <클로져> 이후 두 번째 서는 이번 무대를 한층 성숙한 연기력으로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으로 지치고 예민해진 캐서린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가 다시 상태가 안 좋아 진 걸 알고 절망하는 표정에서 그녀가 이제 연기파 배우 대열에 합류했음을 느낄 수 있다. 또 천재 수학자이지만 정신분열증을 앓는 로버트 역의 남명렬의 연기는 강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유머감각 많은 자상한 아버지에서 정신분열로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할 때면 놀람보다는 서글픔을 먼저 건넨다. 또한 정원조는 엉뚱하지만 순수한 로버트의 제자로 나와 그의 매력을 제대로 드러내며 특히 여성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특히 캐서린과 로버트가 갈구하는 건 애정과 신뢰다. 이들은 수학천재라는 다른 사람들이 갈구하면서도 그들을 외부인으로 몰아가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정신분열증, 혹은 정신분열증에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해결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수학문제를 붙잡고 있듯 끝이 보이지 않은 인내에서 아버지와 딸, 언니와 동생, 여자와 남자, 이들이 얻는 것 역시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다.

제목에서도 느끼듯, 이 작품에서 수학은 재미있는 양념이 된다. 허수, 소수 등이 등장하며 맛깔난 유머의 소스로 쓰이기도 하고, 등장 인물들의 자아를 찾아주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헐리웃 영화에서 많이 본 ‘천재 수학자’ 이야기가 또 다시 나와 식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진짜 이야기 하는 건 수 아래에 숨어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쉽게 쉽게 넘어가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묵직하게,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관객을 이끈다. 코믹 연극에 지쳤다면 한 수학자의 남다른 인생을 엿보는 건 어떨까.

글: 송지혜 기자(인터파크INT song@interpark.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