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인생의 절정은, 사랑이 찾아왔을 때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제곡이기도 한 ‘세월이 가도’(as time goes by)를 노래하는 흑인 피아니스트 샘이 이야기 한다. ‘세월이 가도 여자는 남자를 원하게 되고, 남자는 반드시 그의 짝을 찾기 마련이다(Woman needs man, and man must have his mate)’라고.
이 두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인 요양원 원장 로디온(최민건)과 일상 생활에서 늘 튀고야 마는 요양인 리디야(윤석화)는 거친 세상의 풍파를 맞으며 세월을 더해 온 중년들이다. 고지식하고 반듯한 삶을 살던 로디온과 화려한 조명 아래 살아오며 언제나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발랄한 여인 리디아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사사건건 부딪히지만, 주고 받는 대화 사이 새로운 감정이 싹트게 된다.

짜릿함, 새로움, 모험과 도전 보다는 익숙함, 체념, 안정이 더 어울릴 법한 두 사람이지만, 일상을 뒤 흔드는 가장 큰 변화의 씨앗은, 눈치 챘겠지만, 바로 사랑이다. 남는 것 없이 판다는 장사꾼의 말과 함께 손꼽히는 공공연한 거짓말로 어르신들의 “어서 죽어야지”라는 말도 있다지만, “죽어도 좋아”라고 말했던 한 영화 속 노 연인들의 말이 진정으로 느껴졌던 건 이들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 이처럼 사랑은 죽을 만큼, 또 기어코 살아가고프게 만드는 희안하고 기묘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공통점 없던 이들은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맞춰가며 또 다른 감정에 미래를 꿈꾸게 된다. 아픈 과거를 만들어 준 혁명과 전쟁은 더 이상 지금의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함께 레스토랑과 박물관에서 데이트를 하고, 서로가 있는 곳을 찾아가며 준비한 꽃과 도시락을 나누는 등 평범하고 지극히 소박하나 사랑을 이뤄가는 위대한 작은 것들에 여념이 없다.


러시아의 작가 알렉세이 아르부조프가 쓴 원작 ‘오래된 코미디’를 바탕으로 하는 연극 <시간이 흐를수록>에서 가장 큰 낭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은 무대이다. 작품 속 배경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숲 속, 달빛이 머무는 바닷가, 성당, 비오는 거리로 변하며 운치를 자아낸다. 무대 뒤 편으로 쏟아지는 빗소리, 높은 천정 끝에 떠오르는 둥근 달 등은 조심스레 시작되는 중년의 사랑에 용기를 주는 듯 하다.

아쉬움은 있다. 고집이 센 리디아는 처음 만난 로디온에게 불변의 명제를 제시하듯, 강연자의 투로 로디온에게 훈계하기에 바쁘다. 배우의 개성이라 말하기엔 배역과 겉도는 느낌이다. 올 초 <신의 아그네스>에서 맡은 닥터 리빙스턴 등 주로 강한 느낌의 역할에 섰던 배우의 과거 느낌이 풍겨난다. 상처에 힘겨워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원하는 작은 종달새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달까. 반대로 최민건은 실제 나이와 15년 이상 차이가 나는 로디온의 옷 안에 30대의 에너지를 감추려 애쓰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어색함은 공연을 이루는 아홉 개의 씬 중 두, 세 번째 장면에 이르러서 조금씩 잊혀지는 듯 하다. 중년이기 전에, 순수하고 우직한 남자와 관심을 원하는 여자로 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이 작품은 ‘사랑’을 담았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연인들을 기쁘게 맞이하리, 세월이 가도’(The world will always welcome lovers, as time goes by). 그러고 보면, 피아니스트 샘 아저씨는 참 똑똑한 것 같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