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정통연극에서 만난 위험한 가족

이른 아침 가족의 건강과 재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 건장한 두 아들이 합세한 가정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기만 하다. 서로를 불신하고 감시하고 의심하며 대화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에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수수께끼를 내는 듯한 대화가 느리게 흐른다. 정적이지만, 동적인 불안함으로 둘러싼 가족. 이 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작가 유진오닐의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밤으로의 긴 여로’가 짙은 안개를 깔고 명동예술극장에 올랐다.

‘왕년에 잘 나갔는데’를 읊조리며 과거에 빠져 사는 메어리(손숙)은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옛날에는 정말 예뻤는데, 누가 알겠어”, “내 머리가 이상하지? 눈이 정말 나빠졌어,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야”라고 말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에 빠져 산다. 불안한 눈빛과 떨리는 손동작이 마약을 통해 과거로 가는 열쇠를 진 그녀의 피폐함을 설명한다.

마약을 하는 엄마를 애써 외면하는 구두쇠 남편 타이런(김명수) 때문에 폐병에 걸린 작은 아들, 에드먼드(김석훈)의 병은 점점 위독해지고 큰 아들 제이미(최광일)는 아버지와 충돌 하며 모든 일을 술을 통해 잊고자 한다. 어머니 메어리가 다시 마약을 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던 그들은 “희망을 갖다니, 우린 모두 바보야”라는 대화를 나누고 홀로 남은 메어리는 “조용해졌네, 여긴 쓸쓸해”라는 독백으로 마약에 손을 댈 수 밖에 없는 외로운 자신의 모습을 변명한다. 가족에 대한 불만, 증오가 가득한 듯 보이지만 결국 애증이었고 연민이었다. 네 명의 구성원들은 결국 어두운 기운이 서린 가정의 울타리 속으로 점점 파고들 뿐이다.

안개는 알게 모르게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안개는 끊임없이 무대 중앙에 피어 오르고 메어리는 “안개처럼 사라지기를 원했는데”라고 이야기한다. 고적 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서로를 숨기고, 세상에 당당할 수 없는 이들은 안개를 자신들을 숨겨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기는 듯 하다.

아버지 타이런 역할의 김명수와 큰 아들 제이미 최광일는 극의 무게감을 잡아주면서 웃음을 던져준 빛나는 호연을 펼쳤다. 돈에 대해 상반된 가치관을 가진 두 부자가 집안의 전등을 켜는 문제에 대해 “그래, 불을 켜서 돈을 태우자”등의 대화를 나눴던 장면은 유진 오닐 작품 특유의 맛이 살아난 대목이었다. 손숙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일까? 메어리의 불안함에 잠식되기는 어려웠다.

안개 속을 거닐고 온 여운은 꽤 길었다. 몽롱한 기운, 몽환적인 기분을 남겨주는 <밤으로의 긴 여로>는 짧고도 긴 여행길 같다.

글: 강윤희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angjuck@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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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1

  • A** 2009.09.28

    손숙과 김명수가 부부라니... 이건 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