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굿으로 풀어낸 비극적 드라마

아비를 잃은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의 몸과 마음을 채웠던 슬픔의 기운이 망자의 넋을 기리던 무당 앞에서 갑자기 분노로 바뀐다. 잠시 무녀의 몸을 빌려 내려온 아버지의 혼이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아들에게 토로했기 때문이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한 인간의 몸부림. <햄릿>의 큰 줄기는 변함 없었으나 가지에는 서낭나무처럼 오색 창연한 샤먼의 조각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극단 여행자는 망루에 떠도는 유령과의 만남 사이에 굿판을 벌였다. 또 다른 상상으로 한국적인 색체를 무대 위에 도입해 온 극단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우연과 필연의 조우를 염원을 담은 간절한 기원으로 풀어낸 것이다.

때나 장소, 인물은 그대로다. 다만 독살당한 아비, 미쳐 떠돌아 죽은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피해가지 않은 죽음의 기운을 진오기굿, 수망굿, 산진오기굿으로 마땅히 받아들이며 달래고 있다.

여기가 덴마크냐, 영국이냐, 혹은 한국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말끔한 현대식 정장을 입은 클로디어스와 거투르드, 트레이닝 복을 입고 뒹구는 햄릿, 철저히 무녀의 복장을 한 여인들 등 ‘하나의 기준’과 ‘하나의 색체’로 무대를 정의하려 한다면, 쉽사리 기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굿이라는 커다란 반사경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보고자 한 것, 이것이 여행자 <햄릿>의 출발이며 매력적인 포인트가 될 것이다. 배경에 그려진 다양한 무속탱화나 무대 위에 깔린 쌀더미는 작품의 의도를 자아내는 데 제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 이외의 무언가가 없어 허탈하다. 3시간 동안 긴장과 이완의 끈은 느슨해 극은 평탄하기만 하다. 절규와 회한, 생사를 넘나드는 깊은 숨을 함께 실어주기에는 고개가 자꾸만 갸웃거려진다. 그러나 오랜 시간 굿과 햄릿을 생각해 왔다는 연출자에게는 분명 이번 무대가 어떠한 단계가 되었을 것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극단 여행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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