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다> 영웅의 아들도 사람이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제 4의 벽이 존재한다. 투명의 벽을 가운데에 두고, 저쪽의 무대는 현실에 기반하나 만들어진 가상의 것이며, 이쪽의 객석은 가상에 빠지려 작정(?)했지만 한쪽 발은 현실에 담가두고 있다. 결국 현실과 가상의 균형을 서로가 얼마나 의도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공연 관람의 묘미가 달리지는 법.

연극 <나는 너다>는 ‘작품은 작품일 뿐 오해하지 말자’를 고집하지 않는 무대이다. 오히려 역사가 쓴 기록의 재조명을 의도한 연출진은 관객들이 커튼콜 끝자락과 현실을 이어보길 원한다.

호부견자(虎父犬自). 아비는 훌륭한 호랑이였으나 아들은 그보다 못한 개라는 납덩이 보다 무거운 낙인.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굴레에 묶여 망연하게 구천을 떠도는 혼령 안준생이 있다. 안중근의 위대함을 조명하는 자리는 많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매국노, 친일파, 삶을 위해 대의를 저버렸다는 세간의 비난 속에 버려졌던 안준생. 안중근의 둘째 아들을 좀 더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데서 <나는 너다>가 출발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명지를 끊으며 단지동맹을 결성, 독립 투쟁의 각오를 다지는 모습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등 현대사 한 가운데에 서서 뜻을 굽히지 않고 살신하는 안중근의 모습 역시 지나칠 수 없다. 강직하고 곧은 기개의 그가 다짐을 외치면 공연장은 감개무량으로 가득 찬다. 박수와 탄식, 눈물이 순서를 다투지 않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하지만 이런 안중근의 의열은 그의 아들 안준생을 쉽지 않은 생으로 이끈다. 나라를 찾았으나 아비를 잃은 그에겐 영웅의 아들이기 이전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내야만 하는 이 삶이 절절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구천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은 안준생 만이 아니다. 하얼빈 의거 후 옥중에 갇힌 아들에게 ‘항소하지 말고 뜻을 세우라’한 어머니도, 가시는 길에 입을 옷 정성스레 지어 낸 후 두 눈 꼭 감고 뒤돌아 걷던 아내도 정처 없이 저승을 헤맨다. 여전히 그 둘은 가족들 품에서까지 내쳐진 안준생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내가 너무 모진 어미였는가’, 또 ‘못난 애는 못나서 나쁜 애는 나빠서 서러웁지 않느냐’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자신들처럼 이곳을 떠도는 또 하나의 영혼이, 혹시 가슴이 더욱 아린 아들 안준생을 찾는 안중근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첫 연극 무대에 서고 있는 송일국은 안중근과 안준생 역을 모두 맡았다. 외형의 이미지와 내면의 의지가 맞아 열연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어머니 역의 박정자는 존재 만으로 울림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뮤지컬이 아닌 연극 무대에서도 배해선은 완숙한 배우이다.

별다른 장치 없이 접이식 막으로 형상한 간결한 무대, 배경과 무대 바닥에 투영되는 영상은 군더더기 없이 대단히 깔끔하다. 무대의 날카로운 실루엣과 조명, 음향의 둥근 아우름은 관객들의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리게 한다. ‘사건’이 아닌 ‘인간’에 초점을 맞춰 기승전결을 밟아내는 전개가 있기에, 이 작품에서만큼은 ‘대한독립 만세’가 부담스럽지 않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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