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숨막히는 여운과 친밀함 사이

강한 바람이 불어왔을 때 꺾이지 않는 것은 유연한 것들이다. 자연스럽게 몸을 굽혀 바람을 맞이하고 뿌리의 힘을 받아 다시 서는 모습이 단명하지 않는 힘이며 비결이다.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이 지금까지 쉼 없이 고전의 정수로 꼽히며 무대에 서는 까닭은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 주옥 같은 명대사들, 강렬한 캐릭터들이 탄탄한 뿌리로 지탱하는 동시에 많은 부분들이 시대와 무대에 맞게 변주되며 현재의 생명력이 더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햄릿>은 변주의 운명을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1600년 전후로 추정되는 불분명한 저작연도를 비롯, 다수의 판본, 희곡상 뚜렷한 판단으로 그려내기 모호한 부분들이 많다는 점은 매번 무대를 만드려는 이들의 이해와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또 다른 줄기를 찾아내게 만든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오경택 연출의 <햄릿>도 마찬가지다. 무대, 의상 등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그 시대의 고증 대신 오늘날의 감각을 따르고 있으며, 인물에 새로운 결을 그려내는 노력도 확실히 드러난다. 특히 어두움이 가득한 빈 무대, 뒷면에 매달린 수많은 사각 철제 합판 조각이 작품의 이미지를 지배하는 것이 돋보인다. 쉼 없이 '너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듯 극중 인물들을 비춰내는 수 많은 거울이 되기도 하는 철제 조각은 인물들의 등퇴장 통로로도 활용되며, 이때 판을 거두고 내리는 과정에서 나는 판이 휘어지는 소리, 날카로운 바람이 매섭게 날아와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는 극의 긴장과 빠른 전개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음향 효과로도 작용한다.


햄릿 주변 인물들의 결을 더욱 풍성히 새긴 것도 신선하다. 독배를 든 거투르드(서주희 분)의 의연함과 햄릿을 향한 당부의 말은 여인으로서의 욕망이 모성에 패배했음을 보여주는 '어머니'에 가까웠고, 조심스럽지만 사랑의 웃음을 숨기지 않는 오필리어(전경수 분)는 과거 여러 모습과 달리 더욱 발랄한 모습이다. 특히 왕과 결탁하여 햄릿을 해하려는 악인으로 전락하는 모습에서 벗어난 폴로니어스(김학철 분)는 그의 희극성이 더욱 부각되어 극 전체에 쉼표와 웃음의 공간을 마련하고도 있다. 이는 <햄릿>이 관객들과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만나게 되는 길이 되어 주고 있고 관객들 역시 십분 무대를 즐기며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햄릿(정보석 분) 또한 그간 흔히 만나왔던 지독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 아닌, 상황에 즉각 분노하고 더욱 명민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빠른 전개와 극과 극의 인물이 대치되며 벌어지는 순간의 파열음이 강하다. 그의 고뇌는 자신 안에 갇히지 않고, 관객들의 머리와 가슴을 향하기도 한다. 관객들이 더욱 무대로 이끌리는 지점이나, 무대를 지배하는 아슬한 기운과 빈 공간을 밀도 높게 채우는 여운은 덜하다.

결국 매번 <햄릿>이 다양한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변주는 햄릿의 고뇌를 침범할 수 없으며, 그의 고뇌는 언제나 작품 전체를 압도하는 거대한 감흥의 중심이 된다. 많은 시도와 현대적인 조합 역시 '성격이 운명이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제 안에서 운신한다. 기본 캐릭터와 구조가 가진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 밖의 인물들에게 칠하는 새로운 색과 시선이 작품에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햄릿>이 가진 태생적인 특성 때문일 것이리라.

정보석, 남명렬, 서주희, 김학철, 박완규 등 배우들의 농밀한 연기는 관객들을 충분히 설득하고 있다. 의심할 필요가 없는 배우들이다. 그러나 캐릭터와 무대 등에 부여된 나름 탄탄한 의미들이 기본적으로 <햄릿>이 갖는 강렬한 이미지를 덜어낸 느낌이 크다. 오늘날 고전을 논하는 의의를 '동시대성의 발견'에 두고 있다는 연출가의 의도는 성공한 듯 하나 <햄릿>에서 기대하게 되는 치열한 번뇌의 모습과 오랜 잔상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재)명동예술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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