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제국> 당신이, 혹은 당신의 가족이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연작 '빛의 제국'을 좋아하는 이, 많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하다 할 수 있는 1954년 작을 보자. 은은한 가로등 빛이 호수를 비추고 집 문 앞을 밝히는 고즈넉한 밤의 기운을 느끼며 시선을 올리면, 너무나도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파란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밤과 낮, 한 때 동시에 공존할 수 없는 두 것의 조화가 이질적이기는커녕 눈부시게 아름답다. 단지 하늘과 땅, 그 전체를 감싸는 쓸쓸한 기운이 그림에서 시선을 거둔 이후에도 오랜 시간 머리와 가슴을 잡아 끌 뿐이다.

이와 제목이 같고 그림을 책의 표지로 한 김영하의 소설이 연극으로 태어났다.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 제작해 프랑스의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을 맡고 한국의 배우들이 출연한 <빛의 제국>이다.

대학 동창과 결혼해 영화수입업자로 살고 있는 평범한 중년 김기영에게 어느 날 '24시간 내로 돌아오라'는 전갈이 온다. 사실 그는 북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남파된 간첩이었으나 지난 10년 간 북의 관심 밖에서 그저 평범한 남한 남자로 살아오던 터다. 지난 생활을 단 하루 사이에 정리해야 하는 그. 그 정리에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내에게 밝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무대 왼편에 놓인 긴 테이블과 의자. 의자 수에 맞게 준비된 마이크들. 공연이 시작되면 이곳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던 배우들이 장면 전개에 따라 무대 오른편 '가상'의 공간으로 나와 극 속으로 흡수된다. 무대 왼쪽 테이블 공간에서는 극의 해설자, 혹은 극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객이 되었다가 오른쪽 가상의 공간에선 극중 인물로 분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처럼 작품은 가상과 현실, 극과 극 밖으로 자유롭게 오고 간다. 무대 오른쪽 '극의 공간'에 놓여진 긴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배우들이 저마다 개인으로서 느껴왔던 '분단'과 '북한'에 대한 단상을 펼쳐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품은 눈치채지 못하게, 하지만 쉼 없이 '분단'에 대한 오늘날 당신들의 생각이 어떤지 극에서 빠져 나와 묻고 또 묻는다.

프랑스 제작진들이 이 작품의 연출 및 각색을 맡았다는 것도 작품 의도에 힘을 싣는다.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지 않은 제3의 시선을 통해 분단은 현재 우리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일깨워 보는 것.


우리는 여기서 깜짝 놀랄만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분단은 이제 외국인이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도 '낯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6.25를 겪은 세대들의 수는 점점 줄고, 젊은이들은 책에서, TV에서 그저 '남의 나라'로 북한을 듣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 생활에 익숙해진 김기영도, 무심한 남편에게 지쳐 연하의 남자와 외도를 즐겼던 아내 장마리도 '간첩', '북으로의 복귀'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개인으로서의 외로움만 더욱 터트리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남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분단의 자장 안에 그 누구보다 자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수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지금도 북한과의 경계선을 지키고,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종북'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시선을 싣는 지금, 이곳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래서 무대 위에 자리한 커다란 두 개의 스크린에 비친 반공 애니메이션 '똘이 장군'이나 배우들이 거론하는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북한의 피바다 발언 등이 오히려 우리에겐 거리감이 느껴진다. 객관성을 위한 시선의 거리 두기는 대상과의 먼 거리로 '근시안적' 결과를 낳았고, 일부의 단상으로 전체를 설득력 있게 대변하는데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셈이다.

<빛의 제국>의 핵심이자 흡입력은 김기영과 장마리의 섬세한 감정변화에 있다. 스크린과 무대 위에 등장하는 김기영 역의 지현준과 기영의 부인 장마리 역의 문소리는 각 인물들의 고뇌와 방황을 절제미 안에서 극대화시킨다. 불안한 눈빛,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곧 북으로 떠날 것을 앞두고 들어간 길거리 점집에서 자신의 말년 운을 듣고 허탈하게 웃는 모습 등 흔들리는 이들은 고요하지만 처절하다. 때때로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영상, 이들의 발걸음을 불안하게 쫓는 앵글 등이 그 효과를 더한다. 이들의 모습을 살피는 데에 더욱 집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나진 않지만, 그 가능성이 어느 곳에서도 큰 이곳 한국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 닥친 사건. 왜 이들은 공존할 수 없는가. 그렇게 공존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자신의 길로 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이 작품의 존재 이유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영상과 극이 동시에 펼쳐내는 효과는 관극의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영상과 무대를 오가는 이질감도 크지 않아 쉼 없는 130분의 고요한 질주가 지루하지 않다. 한국 공연 후 5월 프랑스 무대에도 설 예정이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플레이디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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