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대신해 드림 “맘껏 쏟아내 드리겠습니다!”
작성일2013.09.17
조회수12,491
집값은 떨어지나 전세값은 치솟고, 연애는 종말을 고한지 오래 되었으나 도무지 새 인연이 나타날 기미도 없으며, 새삼스럽게 삼촌에 사촌에 팔촌의 안위까지 LTE급으로 오고 가는 오지랖 주간 추석이 3단 콤보로 몰려오는 9월. 신의 선물과도 같은 이러한 갸륵한 계절을 오로지 추남, 추녀의 이름만으로 채우고 있는 이 시대 소시민들 중 사회적 지위와 체면, 오늘의 안위와 내일의 밥 값 때문에 할 말 못하고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얼굴이 누렇게 뜨고 실어증 증세를 보이며 시름시름 앓아가던 이발사도 대나무 숲에 가서 남 몰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후에야 새 생명 얻어 생기 돋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듯, 표하지 못한 울분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면 범 세계적인 용어로는 스트레스요, 한국에만 있다는 화병(Hwa-byung)을 얻으며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라는 ‘루틴’한 수식어에 내 삶을 넣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못한다’는 것.
그렇다고 이대로 곯아가기엔 배꼽 안으로 움츠러든 최후의 ‘한성격’이 아직 꿈틀거린다. 직접 담배를 피는 것 보다 간접 흡연이 더욱 건강에 안 좋다는 어느 연구 결과를 들먹이며, 남이 하는 걸 보는 것이 내가 직접 나서는 것 못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파급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숨 쉴 구멍을 찾아 나서는 우리. 그리하여 타의적 소식 또는 간헐적 단식자들을 비롯, 독거인들은 ‘먹방’을 찾고, 365일 품어 오던 어퍼컷은 명동 사거리 스파링 아르바이트에게 날려 보며, 헛헛한 가슴은 프리 허그를 통해 박애주의로 승화시키는 이 와중, 참으로 반가운 소리가 내 귓가를 스친다. F와 S로 점철된 속 시원한 ‘욕 대신해 드림’.
썩전(Suck戰), 불꽃 튀는 루저 경연 ‘누가 누가 더 못났나?’
시원하다, 통쾌하다, 머리 끝이 쭈뼛 서면서도 대리만족도가 100%에 달한다. 저 초록이고 분홍인 귀여운 인형들의 입에서 정신 없이 흘러 넘치는 F들과 S의 향연이라니. 흔히 인형들 손의 구조가 엄지와 그 밖의 무리로 이등분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생생하게 가운데 손가락만은 우뚝 서 있는 이 초록 인형의 위풍당당함을 보라. 게다가 이들의 거침 없는 저주의 손가락은 스스로를 향하며 ‘내 인생이 더 비참하다’를 외치니, 보는 이의 희열이 점차 가득 차 오른다.

왜냐고?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 이 악랄한 인간 본성이 왕성히 발동하기 때문이다. 행, 불행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만큼, 이것은 서로가 오늘의 고단함을 참고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건 분명하다. 아픈 이를 보며 건강한 지금에 감사하고 승승장구하던 사업가의 몰락을 보며 월급쟁이가 제일 낫다는 자위를 해 온 사람이라면 <애비뉴 큐> 주민들의 삶은 숨막히는 일상 속 우리에게 던져진 선물 상자와도 같다. 미국에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목표 없는 20대 백수 청년, 아메리칸 드림을 그리며 대학 학위를 두 개나 딴 상담사지만 지금은 의뢰인 하나 없는데다가 백수 남자친구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이민자, 포르노 중독자는 어떠하며 홈리스로 길거리에 나 앉은 실업자는 또 어떠한가. 이들이 쏟아내는 신세 한탄이 흐르고 흘러 줄기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뤄 공연장 안을 넘실댄다. 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파”라고 울먹이는 모습엔 명치 끝이 짜르르 저려온다. 학생들아 아느뇨, 그대의 젊은 날들이 생각보다 얼마나 더욱 찬란한 것인지를. 꽃보다 할배 신구 선생님도 외치지 않았느냐, 아름답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 제일 부러운 건 청춘이라고.
게다가 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컴퓨터 ‘내문서’ 내에 ‘서류모음’ 내에 ‘말똥가리’와 ‘메추라기’ 폴더 안에 숨죽여 존재하는 수 많은 영상물들이 ‘나만의 비밀도, 너만의 비밀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음을 속 시원하게 공표하는 이들의 모습에 겉으로는 멈출 수 없는 폭소를, 안으로는 동조의 미소를 짓는 건 그대 뿐만이 아니니 맘껏 즐겨도 된다. ‘너희들 보다 나은 인생’이 결국은 ‘너나 나나 사는 건 비슷하구나’로 귀결되는 행복한 정화의 길. 이 고단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안도의 길. 이 모든 적나라함을, 귀엽고 능글맞고 뻔뻔한 퍼펫(손으로 조종하는 인형)들이 느낌 충만한 노래들과 함께 펼쳐 보이니, 외설스럽거나 저급해 보이지 않고 사랑스럽고 통쾌하고 후련하게 대리만족 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어차피 질러버린 일, 좀 더 질주하고 싶다면 <아메리칸 이디엇>들이 모인 곳으로 간다. 고조선 이후 동방예의지국 및 (지금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지만) 대가족 중심의 사회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더해오고 있는 한국과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모습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만, <아메리칸 이디엇>들의 발산과 질주의 폭과 강도는 사뭇 더욱 크고 강렬하다.
낯선 환경 속에 스스로를 몰아 놓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네들은, 마약, 술, 여자에 휘청거리고 가득 찬 영웅심에 홀려 전쟁 속에 뛰어 들었으나 한쪽 다리를 잃기도 한다. 너무 극단적인 ‘샤덴프로이데’라 이입을 통한 동화 및 동급 비교대조가 힘들 수도 있겠지만, 온몸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날뛰는 이들의 격한 몸부림, 거침 없이 쏟아내는 모양새는 거칠지만 그 의미는 시적이기도 한 강렬한 비트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기대 그 이상’의 일탈을 느끼게 해 준다. 혼란에 빠진 청춘들의 성장통 뿐 아니라 개인, 사회를 비롯 국가를 향한 이들의 거침없는 조롱의 눈초리가 <아메리칸 이디엇> 안에서 멋과 맛의 무대라는 이름으로 활개를 치는 것을 보자니, 지금 <코리안 이디엇>이 만들어진다 한들 저런 시선과 대사가 작품이라는 말로 살아 숨쉴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그리게 되는, 참, 씁쓸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역시 관객들은 저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니 감상의 자유는 구속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말한다면, 두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엇이 해피엔딩일까.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게 되는 것이 행복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하다 스스로 위로하며 내일이면 깨질 수도 있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일까. 어쨌든 계급장 때고 실컷 소리쳐 보았으니 이 정도면 제법 근사하게 아드레날린 대 방출, 해피엔딩 아닌가.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얼굴이 누렇게 뜨고 실어증 증세를 보이며 시름시름 앓아가던 이발사도 대나무 숲에 가서 남 몰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친 후에야 새 생명 얻어 생기 돋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듯, 표하지 못한 울분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하면 범 세계적인 용어로는 스트레스요, 한국에만 있다는 화병(Hwa-byung)을 얻으며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라는 ‘루틴’한 수식어에 내 삶을 넣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못한다’는 것.
그렇다고 이대로 곯아가기엔 배꼽 안으로 움츠러든 최후의 ‘한성격’이 아직 꿈틀거린다. 직접 담배를 피는 것 보다 간접 흡연이 더욱 건강에 안 좋다는 어느 연구 결과를 들먹이며, 남이 하는 걸 보는 것이 내가 직접 나서는 것 못지 않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한 파급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숨 쉴 구멍을 찾아 나서는 우리. 그리하여 타의적 소식 또는 간헐적 단식자들을 비롯, 독거인들은 ‘먹방’을 찾고, 365일 품어 오던 어퍼컷은 명동 사거리 스파링 아르바이트에게 날려 보며, 헛헛한 가슴은 프리 허그를 통해 박애주의로 승화시키는 이 와중, 참으로 반가운 소리가 내 귓가를 스친다. F와 S로 점철된 속 시원한 ‘욕 대신해 드림’.
썩전(Suck戰), 불꽃 튀는 루저 경연 ‘누가 누가 더 못났나?’
시원하다, 통쾌하다, 머리 끝이 쭈뼛 서면서도 대리만족도가 100%에 달한다. 저 초록이고 분홍인 귀여운 인형들의 입에서 정신 없이 흘러 넘치는 F들과 S의 향연이라니. 흔히 인형들 손의 구조가 엄지와 그 밖의 무리로 이등분 되어 있는 것과 달리 생생하게 가운데 손가락만은 우뚝 서 있는 이 초록 인형의 위풍당당함을 보라. 게다가 이들의 거침 없는 저주의 손가락은 스스로를 향하며 ‘내 인생이 더 비참하다’를 외치니, 보는 이의 희열이 점차 가득 차 오른다.

왜냐고?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 이 악랄한 인간 본성이 왕성히 발동하기 때문이다. 행, 불행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만큼, 이것은 서로가 오늘의 고단함을 참고 견뎌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건 분명하다. 아픈 이를 보며 건강한 지금에 감사하고 승승장구하던 사업가의 몰락을 보며 월급쟁이가 제일 낫다는 자위를 해 온 사람이라면 <애비뉴 큐> 주민들의 삶은 숨막히는 일상 속 우리에게 던져진 선물 상자와도 같다. 미국에서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목표 없는 20대 백수 청년, 아메리칸 드림을 그리며 대학 학위를 두 개나 딴 상담사지만 지금은 의뢰인 하나 없는데다가 백수 남자친구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이민자, 포르노 중독자는 어떠하며 홈리스로 길거리에 나 앉은 실업자는 또 어떠한가. 이들이 쏟아내는 신세 한탄이 흐르고 흘러 줄기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뤄 공연장 안을 넘실댄다. 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파”라고 울먹이는 모습엔 명치 끝이 짜르르 저려온다. 학생들아 아느뇨, 그대의 젊은 날들이 생각보다 얼마나 더욱 찬란한 것인지를. 꽃보다 할배 신구 선생님도 외치지 않았느냐, 아름답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 제일 부러운 건 청춘이라고.
게다가 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으나 컴퓨터 ‘내문서’ 내에 ‘서류모음’ 내에 ‘말똥가리’와 ‘메추라기’ 폴더 안에 숨죽여 존재하는 수 많은 영상물들이 ‘나만의 비밀도, 너만의 비밀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었음을 속 시원하게 공표하는 이들의 모습에 겉으로는 멈출 수 없는 폭소를, 안으로는 동조의 미소를 짓는 건 그대 뿐만이 아니니 맘껏 즐겨도 된다. ‘너희들 보다 나은 인생’이 결국은 ‘너나 나나 사는 건 비슷하구나’로 귀결되는 행복한 정화의 길. 이 고단함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안도의 길. 이 모든 적나라함을, 귀엽고 능글맞고 뻔뻔한 퍼펫(손으로 조종하는 인형)들이 느낌 충만한 노래들과 함께 펼쳐 보이니, 외설스럽거나 저급해 보이지 않고 사랑스럽고 통쾌하고 후련하게 대리만족 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어차피 질러버린 일, 좀 더 질주하고 싶다면 <아메리칸 이디엇>들이 모인 곳으로 간다. 고조선 이후 동방예의지국 및 (지금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지만) 대가족 중심의 사회에 바탕을 두고 역사를 더해오고 있는 한국과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모습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만, <아메리칸 이디엇>들의 발산과 질주의 폭과 강도는 사뭇 더욱 크고 강렬하다.
낯선 환경 속에 스스로를 몰아 놓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네들은, 마약, 술, 여자에 휘청거리고 가득 찬 영웅심에 홀려 전쟁 속에 뛰어 들었으나 한쪽 다리를 잃기도 한다. 너무 극단적인 ‘샤덴프로이데’라 이입을 통한 동화 및 동급 비교대조가 힘들 수도 있겠지만, 온몸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날뛰는 이들의 격한 몸부림, 거침 없이 쏟아내는 모양새는 거칠지만 그 의미는 시적이기도 한 강렬한 비트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기대 그 이상’의 일탈을 느끼게 해 준다. 혼란에 빠진 청춘들의 성장통 뿐 아니라 개인, 사회를 비롯 국가를 향한 이들의 거침없는 조롱의 눈초리가 <아메리칸 이디엇> 안에서 멋과 맛의 무대라는 이름으로 활개를 치는 것을 보자니, 지금 <코리안 이디엇>이 만들어진다 한들 저런 시선과 대사가 작품이라는 말로 살아 숨쉴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그리게 되는, 참, 씁쓸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는데, 역시 관객들은 저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니 감상의 자유는 구속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말한다면, 두 작품은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엇이 해피엔딩일까.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게 되는 것이 행복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하다 스스로 위로하며 내일이면 깨질 수도 있는 새로운 희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일까. 어쨌든 계급장 때고 실컷 소리쳐 보았으니 이 정도면 제법 근사하게 아드레날린 대 방출, 해피엔딩 아닌가.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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