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엽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직접 써서 연출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내가 한 명의 관객으로서 봤을 때 그 내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미리 체험해보는 사람. 사실 극장에 올라가면 연출가의 자리는 없거든요. 궁극적으로 연출가는 공연에서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연출가도 관객의 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걸 미리 생각하면서 연습하는 동안 이 작품이 관객으로서 봤을 때 이렇게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는 편인데, 관객으로 공연장에 갈 때가 제일 즐거워요. 내가 진정한 의미에서 관객이 될 수 있느냐가 앞으로 연출을 계속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할 것 같아요. 결국은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이런 연극 작업을 하는 거니까. 너무 이상적이지도 않고 또 너무 현실에만 머물러 있지도 않은, 그런 스펙트럼을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연출을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거에요.



대학교에서 국문과를 다녔고 1학년 때 문학동아리를 했어요. 시도 써보고 사회과학 모임에서 데모도 참가해보고 글도 써보고 연극도 해보고, 다 해봐야 되겠더라고요. 근데 데모하는 걸 좀 따라다니다 보니까 학생운동의 모양새가 학생일 때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는 것 같았어요. 비전을 제시하거나 현실과 적극적인 교감을 하는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구습만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연세대학교에 되게 유명한 극예술연구회라는 곳에 구경을 가봤는데, 다들 연극을 정말 열심히 해요. 무대 위로 날아다니고 노천극장에서 발성연습하고(웃음). 그건 나랑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2학년 때 국문과 안에 극회를 아예 만들었어요.

그 극회에 신입생으로 들어온 친구들이 성기웅과 선명균, 변준섭 등이죠. 우리는 꼭 극장에서 안 해도 되니까, 잔디밭에 우리끼리 모여서 연습하기도 하고 강의실에서 공연하기도 했죠. 별로 열심히 할 생각이 없었던 거에요. 그 때는 직업으로 연극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직업은 따로 갖고, 재미있게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연극을 시작하다 보니까 좀 멋대로 했던 거죠. 그렇게 멋대로 했던 것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르고 산만하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조연출을 한 번도 안 해봤어요(웃음). 작가로 먼저 데뷔를 하고 연출을 했던 거죠. 학교 다닐 때는 배우도 하고 연출도 하고 돌아가면서 다 해야 했으니까. 그런 수공업적인 시스템에 있다 보니 매뉴얼 같은 것은 잘 모르고,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연극을 했던 것 같아요. 연극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 저 사람을 어떻게 들여다봐야겠구나 하는 것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작/연출을 할 때와 남의 작품을 연출을 할 때가 다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의 작품을 할 때는 <풍찬노숙><배수의 고도>처럼 좋긴 한데 좀 정리가 됐으면 좋겠다 싶은 작품이 가끔 저한테 들어와요. 제가 작가도 하다 보니까 작품을 좀 정리해서 매끈하게 보여주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차원에서만 그 작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얼른 대사를 고쳐버리는 게 편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안 바뀌어요. 우리는 계속 똑같은 사람인 거에요.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를, 우리가 처음 보고 느꼈던 것과는 다른 이면을 알 때까지는 함부로 서두르지 않으려고 해요. 굳이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어떤 작품들을 우리가 지금 보려고 하는 것은 그 작품이 우리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근데 그 새로움이 우리가 금방 수용할 수 있는 감동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머리로도 이해 안 되고 감성적으로도 와 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걸 어떤 태도로든지 견뎌낼 수 있는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연극을 보는 즐거움 중에 하나는 극중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보는 사람들 스스로 내가 옳다는 믿음을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가끔 인터넷에 보면 악에 받쳐서 쓴 리뷰가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아쉬운 게 자기 고백이 없거든요. 물고 뜯고 막 비판을 했지만 그 글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우울해질 거에요. 그런 글은 인문학적인 글이 아니거든요. 글쓰기가 자신을 해방시켜줘야 하는데, 그 사람은 절대자, 고독한 독재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인간 관계도 힘들어져요. 연극을 보는 것이든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이든 가장 먼저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이어야 돼요.

연출가도 이 작품을 통해서 내 자신이 구원이 먼저 되어야지 다른 관객들을 구원해 줄 수가 있는데, 하기 전부터 내가 옳아, 그러니까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것들만 수용하겠어, 라는 자세를 가지면 우리는 아주 매끈하고 팬시한 작품을 하나 만들어서 잘 소비하고 맛있게 먹고 입을 닦고 헤어지는 거죠. 그렇다면 연극이 굳이 지금 이 시대에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다른 매체에 있으니까. 연극에서 오는 불편함을 통해 자기를 고백하고 성찰할 수 있을 때 연극이 의미가 있는 것이거든요. 자기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새롭고 낯선 것들이 왔을 때 받아들여야 해요.

<배수의 고도>



강점은, 일단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게 굉장한 약점이 되기도 하는데(웃음). 배우가 무슨 일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야지” 하거든요. 어깨에 너무 힘들어가지 말자, 오버하지 말자, 대단한 예술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는 게 제일 첫 번째로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한테는 대충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해요. 어떤 의미에서는 프로덕션 자체가 이완돼 있어요.

예전에는 배우들한테 “이게 맞아, 이게 완성된 거야”라고 지향점을 제시하려는 생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게 되게 공허하더라고요. 나도 지어낸 얘기잖아요. 내가 작/연출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답을 말해줘야 된다는 건 착각이 아닐까 싶고. 완성품에 대한 비전, 청사진은 잘 제시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프레스리허설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사소한 거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 이야기들로 일희일비하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을 계속 열어둬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공연 초반에는 공연을 열심히 보지만, 중간에는 잘 안 봐요. 왜냐면 “저건 저렇게 했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사실 동선을 이렇게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작품 전체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이걸 왜 했는지가 더 중요하죠. 그게 풀리면 나머지 것들은 자연스럽게 풀리거든요. 그래서 배우들과도 우리가 원래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를 한 번 짚어보자고 이야기하죠. 그걸 상기시켜 주는 것이 오늘의 관객, 그들이 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실은 작품을 직접 쓸 때가 훨씬 흥미로워요. 연출을 하게 되면 연출 작업 자체는 그렇게 재미있지 않은데,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재미있죠. 작/연출을 할 때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걸 써서 하는 것 같고, 다른 작품을 연출할 때는 <장석조네 사람들>은 워낙 좋아하는 소설이라 가져왔고, 나머지는 선택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웃음). 누가 선택한걸 가져와서 해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기준을 꼽는다면 너무 예술적이거나 미학적이거나 고전적인 것은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좀 동시대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편이에요. 특별히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알리바이 연대기>



<알리바이 연대기>. 연극을 하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행복감이 있었어요. 기왕 연극을 하고 있으니 진짜 내 삶을 가져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해보자, 어머니도 와서 보고 가시면 좋을 것 같고,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재미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형 이야기도 들어야 되니까 형이랑 인터뷰를 했는데, 형이 처음에는 “뭘 이런 걸 해” 하다가 한참을 이야기하고(웃음). 형이랑 형 역할을 했던 배우들이 같이 술 한잔 하면서 자기 가족들 이야기도 하고, 남명렬 선배님도 아버지와의 애증관계를 쫙 얘기해주시고. 연습이 뭐가 중요하냐, 각자 자기 가족의 알리바이를 이야기해보자, 하면서(웃음). 그런 경험을 통해서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한번 깨닫게 됐고, 제일 즐거웠던 것 같아요.



<누가 대한민국 20대를 구원할 것인가>라는 꽁트 형식의 작품을 한 적이 있는데, 공연 끝나고 나서 토론회 같은 것을 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그 공연이 우리 극단 작품 중에선 제일 잘 됐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우석훈 선생님 같은 패널도 초청을 했는데, 한 시간 반 정도 공연을 하고 토론을 2시간 넘게 했어요. 그 때 사람들은 자신이 투영된 이야기를 갈급해 하고 극장에서 자신을 던지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근데 우리는 사람들을 객석에만 앉혀놓고 자기를 투영할 수 있는 여지를 안 준다는 거죠.

재작년에 독일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공연이 끝나고 배우와 관객들이 로비에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자연스러운 문화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연극을 하는 거에요.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식으로서, 즐기려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인 거죠. 우리는 연극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관객들하고는 어색해하죠. 예전과는 달리 ‘관객과의 대화’ 같은 걸 해보면 관객들의 수준이 굉장히 높거든요. 그런데 우리 공연문화가 그 요구를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문화가 더 활성화되면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관객들은 극장에서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데 우리는 그냥 돌려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 경험이 기억에 남아요.




나이가 이제 40대, 마흔 둘인데 약간은 대학생의 느낌, 아마추어 같은 느낌으로 계속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꼰대가 되지 말아야 되겠다는 게 사실 인생의 제일 큰 목표라서, 자꾸 가르치려고 하거나 먹물인 것을 티 내지 않으려면 젊음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인생에 있어서도, 연출가로서도 잘 늙어가는 게 가장 큰 목표 같아요.

예전에는 사회 풍자적인 작품을 좋아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풍자하고 욕하는 건 이제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이제 난 20대나 대학생이 아니고, 그런 건 후배들이 더 잘 할 테니까.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진 데는 내가 일조한 것도 있거든요. 이제 내가 풍자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풍자를 당해야 할 대상인 거죠. 지금 세상이 잘못 됐다고 이쪽 저쪽 편을 가르고 남을 비판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같은 세대는 이제 젊은 척 하지 말고 가장 어려운 상대, 극우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거죠. 좌파들, 진보적인 사람들, 환경운동가들은 오히려 <배수의 고도> 같은 작품 안 봐도 되거든요. 오히려 환경에 관심 없는 사람들, 원자력공학과 전공한 사람들이 와서 공연을 봐야 하는 거죠. 아니면 우리가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곳으로 가서 공연을 하든지.

<알리바이 연대기>를 공연할 때 장인 어른이 친구분들과 공연을 보러 오셨는데, 정치적으로 극우인 친구분들이 공연을 보고 술자리에서 자기가 잘못 살아왔다는 걸 인정하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세대가 그런 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려면 진보적인 사람들도 남을 비판할 게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거든요.

MB정부, 박근혜 정부 들어서 50대 전후로 세대간의 골이 더 깊어졌잖아요. 예술하는 사람들은 그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모호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예술한다는 사람들이 라인을 끊임없이 만들어서 누구의 편을 든다는 거죠. 그런 분들에 대해 우리는 냉정해져야 할 것 같아요. 예술하는 사람들에게 동시대에 대한 책임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는 자연인으로서의 태도가 부족한 것 같아요. 나는 예술하는 사람이야, 라며 극장에서 예술혼을 불사지르면 되는 줄 알고 있고. 나는 절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예술은 없어요.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지 않으면서 정치는 잘 몰라, 사회 돌아가는 건 잘 모르겠어, 라고 하면 예술을 하지 말아야죠. 동시대를 살고 있지 않으면서 동시대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계속 젊을 수 있는 연출가가 되는 것이 바람이에요.



연극영화과에서 애들을 가르치다 보면 잘 하는 것이 목표인 친구들이 많아요. 태릉선수촌 같은 분위기가 있거든요. 체육하듯이 예술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잘 하려고 하는데 못하면 얼마나 불행할까 싶어요. 엄청나게 열심히 혼을 불태우다가 4학년 때쯤 은퇴하는 분위기에요(웃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잘 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배우를 하려는 친구들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직업이 돼야 하는데,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정의롭게 인간적으로 살고 있느냐가 연기에 더 도움이 되는데, 연습해서 때우려고 하거나 사교육 시장에서 뭔가를 해결하려고 하거든요. 빨리 엔터테인먼트로 진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보다는 내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아요.

연극 현장에 들어가겠다, 영화를 하겠다, 이런 결심보다 내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싶다,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있어야 돼요.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도 가능하거든요. 10만원씩 모아서 30만원짜리 연극을 해봐야지만 진짜 연극을 해본 것이거든요. 누구와 계약해서 돈을 받고, 누가 차로 데려다 줘서 하는 연극은 결국은 자기 것이 아니거든요.

연극을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이것 밖에 안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잘 하기 위해서 하는 사람들, 못하면 너무 좌절하는 사람들도 많고. 예술하는 삶이 행복하다는 깨달음이 먼저여야 하는데, 가끔 술자리에서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기 스스로는 자신을 별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한테는 별로 투자를 안 해요. 건강한 음식을 먹고 휴가도 즐기고 좋은 것도 보고 와야 하는데, 술 담배도 엄청 하고 자신을 학대해요.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른 사람을 통해 인정받고 싶어하는 거죠. 그런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어린 학생들한테는 그런 태도가 더 많을 거에요. 아직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니까. 그보다는 먼저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야지만 뭔가를 할 수 있는 거죠.

정리: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플레이디비DB, 두산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