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




우리는 살면서 많은 걸 꾸미며 살아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계약·약속·규범을 만들고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죠. 그런데 이것을 벗을 때가 있어요. 일상에서 아침에 큰 일 볼 때, 천주교에서 신부님에게 고해할 때, 그리고 공연장에서. 내가 안톤체홉의 <벚꽃동산>을 보러 갔어요. 티켓 사서 들어간 순간, 2014년의 7월의 내가 아니라 나는 1900년 러시아 어느 농장으로 간단 말이에요.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 나를 해롭게 할 리가 없어요. 뒤통수를 때린다던가 총을 쏜다던가 칼부림을 할 리가 없잖아요.

연극은 그 마스크를 잠시 내려놓고, 마스크를 쓰기 전의 순수한 동심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에요. 2014년 서울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연극을 보면서 내 경험과 상상을 더하는 거에요. 거기서 건질 수 있는 걸 자기 주머니에 넣고 나오는 거죠.

무대에서 연출가가 하는 건 4할 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6할은 관객이 스스로 머리를 써서 하는 거에요. 연극은 관객에서 항상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영역을 남겨둬야 해요. 생략된 부분을 채우고, 비약을 이으며 머리를 굴리고 상상하는 것 그것이 진짜 연극을 재미있게 하는거에요. 관객에게 그 6할을 쓰도록 하게 해주는 것이 연출가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연출가가 밥상을 차린다면. 날 것. 두부도 쉬지 않은 것, 조기도 물 좋은 조기, 파·마늘 잘 씻어서 장독대 있는 3형제 된장·고추장·간장을 상에 올리는 일을 해주는 거에요. 그 다음에는 잡수는 분(관객)이 끓여먹든, 날 것으로 먹든, 구워 먹든 선택하는 거지요.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는데, 철학에는 뜻이 없고 소설에 심취해 지냈지요. 우연히 학교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연희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을 만났어요. 여기에 있으면 ‘라면하고 담배 걱정은 안 하겠구나’ 싶어 연희극회에 들어간 것이 연극의 입문이었죠.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땐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이었는데, 시민예술제라는 걸 개최했어요. 9개 극단을 뽑아서 제작비를 지원해주고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고등학교 동창에게 마감 하루 전 날 그 이야기를 들은거에요. 상금이 엄청나다는 말에 (웃음) 밤새 희곡을 써서 냈는데 덜컥 당선이 됐어요. 당선이 되니 공연을 올려야 하는데 뭘 알아야 올리죠. 그 길로 학교 도서관을 뒤졌더니, ‘플레이 프로덕션 아마추어’라는 연출 입문책이 하나 나와요. 그 길로 정독했죠. 그거 보면서 배우들은 무대에 어떻게 세우고 무대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등 연극에 대한 기초를 배울 수 있었어요. 그게 아주 큰 도움이 됐지요. 그리고 배우들을 구해야 되는데 하루 아침에 어디서 구해오겠어요. 고등학교 동창들이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와 많이 들어가서 그 친구들하고, 이화여대 성악과에 간 사촌이 있어서 같이 연극을 해보자고 불렀죠. 회로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그렇게 연극을 시작했어요. 무대에 등장하면 퇴장이 어렵듯이, 그렇게 연극에 발을 한번 들여 놓으니까 지금껏 빼기 어렵네요. (웃음)

회로무대에서 2년 동안 작품을 네 번 올렸어요. 학생이 극단을 계속 끌고 가려고 하니까 어렵지요. 그래서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 밖에서>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올리고 네 번 만에 해산했어요. 그렇게 무대에 작품을 올리면서 신춘문예에 당선도 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깐 대학연극제에 연출하러 많이 다녔지요. 연출료를 주니깐. 대학 졸업하고 한 4년은 그렇게 살았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학생들하고 함께 지낸 시간들이 참 행복했어요. 오염되지 않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 학생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니깐 힘은 들었지만 어떻게 할 때 그 사람의 재능을 끌어낼 수 있는지 경험할 수 있었어요.

이후에 유치진 선생이 계시던 동방레퍼토리컴퍼니(당시 극단 드라마센터)에서 작품을 올리며, 서울예술대학 전신인 한국연극아카데미에서 애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75년부터는 나도 나이를 먹고 이제는 내 작품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 남의 극단 이름을 빌려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그 짓을 십 년 동안 했는데 나이 마흔 몇 살이 되니, 남한테 가서 극단 이름을 빌리자고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자전거>라는 작품이 대상을 받고, 그 다음에 <아프리카>를 제출했는데 안됐거든요. 난 <아프리카>는 될 줄 알고, 우리 단원들이 할 꺼라는 걸 염두 해두고 쓴 작품이란 말이죠. 그래서 원님 덕에 나팔 분다고. 떨어졌으니, 우리도 이제는 우리 간판 걸고 하자고. 그때부터 목화라는 이름을 걸었죠. 그로부터 30년이에요. (웃음)




연극은 허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연극쟁이는 그 허구 속에 최대한 많은 시간 머물러 있어야 해요. 현실과 만나는 시간을 최대한 피해야 해요.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는 작품을 할 때 아파트 한 층을 빌려 배우들과 스텝들을 집어넣고 리무진 버스로 실어 날랐대요. 현실로 가지 못하게 차단한거죠. 그리스 희랍극을 하면서 쇼핑하고 샤워하고 하면 안 되는거지. 그리스인이 되어야지. 가능한 한 허구 속에 자기를 집약시켜야 돼요. 자기 에너지를 허구에서만 써야 돼요. 최소로 일상은 쓰고 가능한 한 비축이 된 그 힘을 가지고 관객을 만나야해요. 우리(극단 목화)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지만 준비 시간을 앞당겨서 일찍 만나고, 공연 끝나고도 배우들은 한 시간 정도 연출노트를 듣곤 헤어지죠.


 

배우들에게 관객을 향해 정직하게 이야기하듯이 말하라고 해요. 필요 없는 손짓과 발짓하지 말고 치장하지 말라고. 가능한 한 말이 가지고 있는 그 뜻과 소리만으로 듣는 사람이 그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하려고 해요. 우리 배우들은 관객을 바라보며 연기하는데 연인과의 대화도, 부자 사이의 대화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아요. 관객을 바라보면 도망갈 데가 없어요. 배우들끼리 하면 숨을 데가 있지만, 관객들의 눈 앞에서 뭘 숨겨요. 무대는 해부실처럼 모든 것이 드러나요. 감출 수도 없고 솔직해져요.

그래서 난 배우들에게 관객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해요. 그럼 관객에게 다 맡길 수 있어요. 관객이 연극에 참여하면 더 풍부하고 재미있어질 수 있어요. 배우는 그저 관객이 그걸 해줄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단초일 뿐이에요.




별 것 아닌 일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일이 생기는 것이 비약이라는 건데, 우리는 그 비약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엄청난 장면들을 만나게 돼요.

가령 춘향전의 가장 재미있는 대목이 어사출두 장면이에요. 그 대목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사위는 백년지계 손님이라고 하니까 장모는 사대부 여인네들이 하듯 거지가 되어 온 사위에에게 상다리가 부러지게 상을 차려줘요. 장모가 사대부 여자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바람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거죠.

이런 비약을 통해 관객들은 자기만의 경험과 상상력으로 연극을 더 발전시킨다고봐요. 라스베가스 쇼나 할리우드 어떤 영화보다 더 화려한 무대를 연극을 통해 관객은 가져갈 수 있어요. 나는 관객들로 하여금 생략과 비약을 할 수 있게, 관객의 머리를 쓰게 만들려고 해요. 그게 내가 잘 하는거지.




나는 우리말의 아름다운 결과 무늬, 그리고 울림을 들려주고, 우리 몸짓, 소리, 색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선택하죠. 그래서 그것을 보면 한국의 전통과 생각, 몸짓과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작품이 좋아요. 그런 것이 내 작품 중에 있다면 <춘풍의 처>라고 생각해요. 그 작품이 우리 것을 많이 보듬고 있지요.


<춘풍의 처>




<자전거>라는 작품을 하는데, 노인 배역이 있었어요. 나이 먹은 배우가 하나 있으면 학예회 같아 보이지는 않고 좋은데, 배우들은 한창 팔팔한 20대 밖에 없어서 내가 그 역할을 했어요. 대사도 몇 마디도 없어서 내가 해도 되겠다 싶었죠. 원래 대사가 뭐니 아니까 연습할 땐 항상 그 대목은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실제 무대에 선 날 대사가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에요. 무대에서 그저 벙어리처럼 어버버하고 내려왔어요. 배우들은 원래 대사가 뭔지를 아니깐 웃겨서 뒤집어지고, 관객은 원래 저런 설정인 줄 알고 웃고. (웃음)




관객에게 여쭙고 의논 드린다는 심정을 갖는 것이야 말로 볼거리를 만드는 이의 자세라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관객이 할 수 있는 걸 하게끔 되돌려주는 연극, 그런 연극을 앞으로도 계속 하고 싶어요. 내가 영국 에든버러에 가는 것도, 뉴욕 라마마 극장 템페스트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도 이런 어법이 전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가는 거에요. 

또 하나 소원이 있다면 나도 셰익스피어 못지 않게 보편화된 작품을 써야지. (웃음)




누구나 다 열심히 살아요. 하지만 열심히 틀려야 해요. 자꾸 엉뚱한 짓을 해야 돼요. 해도 문제가 없어, 지워버리면 되니깐. 그러다 보면 나름대로 자기의 언어와 진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거에요. 하지만 시행착오 없이는 자기를 발견할 수 없어요. 비바람에, 땡볕에 자기를 내 보내고 진흙에 스스로 뒹굴다보면, 자신이 어느 것에 강한지를 알 수 있어요. 인생은 시행착오야. 그런데 주저주저하면 남 따라가는 것 밖에 없어요. 남들이 낸 길 그냥 따라가는 것 밖에 안되지. 시행착오를 거듭함으로 자기 길을 내야지. 그거 하나 당부하고 싶어요.




관객 머리 속에 수십 만 개의 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연극이란 그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좋은 연극을 보러 와서 마음을 울리는 작은 떨림과 내 안의 또 다른 DNA를 발견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저 아이처럼 보고 당신의 방으로 가져가세요.



정리: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