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상 16개 부문 후보 <해밀턴>, 뮤지컬의 새 역사를 쓰다
- 201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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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브로드웨이에서 쇼는 두 가지로 나뉜다 - <해밀턴>과 ‘<해밀턴>이 아닌 쇼’.
우리나라에는 뮤지컬 <인 더 하이츠>로 알려진 36세의 히스패닉계 작곡가 린-마누엘 미란다가 음악, 대본, 가사를 썼고 직접 주연까지 연기한다. 비욘세, 오프라 윈프리, 톰 행크스, 빌 클린턴, 마돈나가 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두 번이나 관람한 후 “빛나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뉴욕에서 가장 존경받는 뮤지컬 평론가 밴 브랜틀리도 “정말 최고로 좋다”고 호평했다. 흥행에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데다, 얼마 전 사상 처음 토니상 16개 부문 후보에까지 오르자 사람들은 오직 <해밀턴>만 보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소하기만 한 <해밀턴>, 대체 어떤 작품이고, 그동안 이 쇼가 써온 '첫 번째'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역사 속에 묻혔던 해밀턴의 존재감을 널리 알려준 첫 번째 뮤지컬
불과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10달러 지폐 속 인물은 영 인기가 없었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이었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알렉산더 해밀턴. 대부분 대통령 출신인 다른 지폐 모델에 비해 '급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얼마 전 새 달러 도안 계획 때 10달러 지폐에서마저 퇴출될 뻔했던 인물이다. 그랬던 해밀턴이, 이 작품의 인기로 사후 210년 만에 완전히 부활했다. 10여 년 전 출간됐던 그의 전기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10달러 지폐 속 해밀턴
린-마누엘 미란다(이하 미란다)가 해밀턴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쓰기로 결심한 건 <인 더 하이츠>의 성공 후 멕시코로 휴가를 갔을 때였다. 우연히 집어든 론 처노의 해밀턴 전기 <알렉산더 해밀턴>을 읽으며, 이민자인 자기 아버지,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해밀턴의 어린 시절, 그리고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사로잡힌다.
어떻게 창녀와 스코틀랜드인의 아들로, 사생아로 태어나 고아가 된
카리브 해의 어느 가난하고 더러운 잊혀진 땅에 태어난 자가
영웅이자 학자로 자랄 수 있을까? (오프닝 넘버 ‘알렉산더 해밀턴’ 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거치고 뉴욕에 온 해밀턴은 혁명에 가담하면서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로 미국 초대 재무장관에까지 오르지만, 정적들의 견제 속에 미국 최초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게 된다. 급기야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게 해밀턴 때문이라고 생각한 3대 부통령 아론 버가 신청한 권총 결투에 응했다가 4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이런 해밀턴의 일생과 그가 살았던 미국 건국 초기 역사가 바로 뮤지컬 <해밀턴>의 줄거리다.
대통령을 흑인과 히스패닉계 배우로 파격 캐스팅한 첫 번째 뮤지컬
막이 오르면 관객은 <해밀턴>의 파격적인 캐스팅에 가장 먼저 놀란다. 우리의 머릿속에 백인으로 박혀있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같은 미합중국 건국 영웅들을 거의 모두 흑인과 히스패닉계 배우로 캐스팅한 것은 관객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첫 흑인대통령으로 선출된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미란다는 캐스팅의 의도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배역은 지금 현재 미국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international) 것이구요.”
유색인종에게는 인색하고 가혹한 브로드웨이에 ‘이제는 케케묵은 인종차별 같은 건 좀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과감히 현실을 직시시키며 도전장을 내던졌고 결과는 대성공이다. 다양한 피부색의 배우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이, 그리고 창작자들이 <해밀턴>을 뮤지컬계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작품이라고 칭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출연 중인 <해밀턴>
랩을 뮤지컬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성공시킨 첫 번째 뮤지컬
<해밀턴>이 이룬 또 하나의 첫 번째는 랩을 차용한 뮤지컬 스토리텔링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천재 작가들이 브로드웨이 랩 뮤지컬을 성공시켜 뮤지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보겠다고 도전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관객이 주로 노년층인 미국 공연 시장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젊은 관객에 목마른 브로드웨이가 풀어야할 숙제이기도 했다. 그 어려운 숙제를 <해밀턴>이 드디어 해낸 것이다.
자신의 결혼식 날, 한 달 간 준비한 뮤지컬 <지붕위의 바이올린> 넘버 '라카임' 퍼포먼스를 아내에게 선보인 미란다. 얼마나 삶에 음악, 뮤지컬이 녹아들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뮤지컬을 좋아하는 가족의 영향으로 늘 라틴음악과 뮤지컬 앨범을 듣고 자란 미란다는 우연히 힙합에 관한 영화 <비트 스트리트>를 본 후 힙합과 랩에도 심취하기 시작했다. 가사를 외우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는 노래와 랩을 하며 뮤지컬과 힙합의 운율을 몸에 익혔다. 그런 그에게 달변가였던 해밀턴은 래퍼처럼 보였다. 미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하는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반연방주의자들과 논쟁하는 장면은 마치 누가 최고의 래퍼인지를 가리기 위한 랩배틀처럼 들렸다고 한다.
또한 젊음과 에너지, 그리고 반란의 언어인 힙합이야말로 미국독립혁명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음악형식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힙합에 대한 깊은 조예는 <해밀턴> 뮤지컬 넘버 곳곳에서 발견된다. 1997년 24세의 나이에 총격사건으로 사망한 전설의 힙합 래퍼 노토리어스 비아지의 노래 '마약 십계명(The Ten Crack Commandments)'을 차용해 권총 결투 장면을 표현한 '결투 십계명(Ten Duel Commandments)'이 그렇고, 스카일러 자매가 부르는 노래는 예전 비욘세가 속했던 R&B 걸 그룹 '데스티니 차일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해밀턴>은 절대 랩 뮤지컬이 아니다. 단지 랩을 뮤지컬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차용했을 뿐이라는 걸, 앨범을 들어보면 단박에 동의하게 된다. 미란다가 작곡한 지극히 극적이고 뮤지컬스러운 선율이 힙합과 조화를 이뤄, 랩배틀이 랩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들리기 때문이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남자 주인공 멜키어로 스타가 된 조나단 그로프가 영국왕 조지 3세로 연기하며 미국에게 경고하는 '넌 돌아오게 될 거야(You'll Be Back)'는 경쾌하고 달달한 비틀즈의 음악을 연상시킨다. 특히 미국 역사상 퍼즐로 남아있는 그날 밤의 일(제퍼슨, 해밀턴, 매디슨이 워싱턴을 수도로 정하던 저녁식사 사건)을 다룬 '그 사건이 벌어진 방(The Room Where It Happens)'은 뮤지컬 스토리텔링은 어떤 음악장르도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표곡이다.
탄생부터 대통령의 지지를 얻고 뮤지컬의 대통령이 된 첫 번째 뮤지컬
<해밀턴>은 시작부터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와 인연이 있었다. 이 작품이 첫 선을 보인 곳이 다름 아닌 백악관. 2009년, 이민자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준비한 행사에 초대된 미란다가 "힙합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인 알렉산더 해밀턴에 대한 랩을 준비했다"는 농담으로 시작해 관객의 기립박수와 함께 마감한 곡이 지금의 오프닝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2009년 5월 12일. 백악관에서 해밀턴에 대한 랩을 선보이는 미란다
이를 계기로 수년간 평전의 저자 론 처노와 함께 역사적 검증을 바탕으로 여러 번의 대본 리딩과 워크숍을 거친 끝에 2015년 2월 오프브로드웨이 퍼블릭 씨어터에 첫 선을 보였다. 평론가들의 호평과 입소문으로 공연 초반 전석 전회 매진은 물론, 2015년 4월 16일에는 '뮤지컬 <코러스 라인>의 퍼블릭 씨어터 초연 40주년'을 기념하는 깜짝 퍼포먼스로 뮤지컬 팬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해 8월 6일 브로드웨이로 직행한 <해밀턴>은 <북 오브 몰몬><위키드>의 인기를 능가하는 최고의 화제작으로 많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빌보드는 2015년 최고의 랩 앨범은 드레이크, 켄드릭 라마, 닥터 드레의 앨범도 아닌 <해밀턴> 사운드 트랙이라고 평했고, 미란다는 타임지 선정 2016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개척자로 뽑혔다. 또한 미국 맥아더 재단이 주는 천재장학금 ‘맥아더 펠로우상’의 수상자로 선정돼 무려 62만 5천 달러의 상금을 5년에 걸쳐 받게 됐다. 2016년 그래미어워즈 ‘베스트 뮤지컬 씨어터 앨범상’, 2016년 드라마 부문 퓰리처상 수상에, 지금은 올해 토니어워즈에서 이 작품이 과연 몇 개 부문을 석권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의 건국 이야기를 초월한 우리 모두의 지금 이야기
“이건 오늘의 미국이 들려주는 과거 미국의 이야기입니다.” 미란다가 <해밀턴>을 소개한 말이다. 백인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양한 인종이 함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이다. 그리고 해밀턴의 이야기는 다음의 가사로 막을 내린다.
Who lives, (누가 살고)
Who dies, (누가 죽고)
Who tells your story? (누가 당신의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뮤지컬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은 <해밀턴>을 언급하며 말했다. “언제나 새로운 형식을 처음으로 실험하는 혁신가가 있고, 그가 성공하는 순간 모두가 모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랩을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이용하자’고 말하겠지요.” <해밀턴>은 분명히 새로운 뮤지컬의 역사를 썼고, 여전히 써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한 나라의 건국 역사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 또한 누군가에게는 기억되고 회자될 각자의 건국 이야기를 매일매일 써나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깊은 여운으로 남긴다.
글: 강경애
뉴욕에서 뮤지컬극작 전공 후, 뮤지컬 <마이 스케어리 걸> <비 라이크 조> 등을 쓴 작가. 뉴욕에 살며 오늘도 뮤지컬 할인 티켓 구할 방법과 재미있는 작품 쓸 방법을 궁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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