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릴링이 되는 순간, 아주 디테일하게 상상해보고 싶어요” <엠. 버터플라이> 장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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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공개된 <프라이드> 캐스팅 명단에서 이 배우의 이름을 보고 의문을 품었던 관객들이 있었을 것이다. 앞서 몇 편의 연극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그때까지 ‘장율’이라는 이름은 다소 낯선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신예는 명료한 발성과 안정된 연기로 빠르게 관객들의 신뢰를 얻었고, 이제 또 다른 인기작의 무대를 앞두고 있다. 2012년 국내 초연부터 뜨거운 호평을 받으며 2015년까지 세 차례 공연된 연극 <엠. 버터플라이>다.
 
실화에 기반한 <엠. 버터플라이>는 1960~8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프랑스 대사관 직원 갈리마르와 중국 경극 배우 송 릴링이 20년간 맺어온 기묘한 관계를 그린다. 장율은 이 작품에서 우아하고 비밀스런 여인 송 릴링을 맡았다. 지난 25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종종 "잘 모르겠어요"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차분히 적절한 표현을 고르며 이어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자의 머릿속에서는 송 릴링이라는 인물이 차차 생생한 구체성을 띄고 그려졌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더 풍성한 감각들을 몸에 새겨두고 싶다는 이 배우, 섬세함과 신중함, 천진함과 명랑함을 함께 지닌 그가 연기할 ‘송 릴링’이 무척 궁금해졌다.
 
Q <엠. 버터플라이>의 대본을 처음 읽고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파격적이고, 혼란스러웠어요. 일단 송 릴링이 어떤 사람인지, 굳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작품의 구조 자체도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고요. 극이 갈리마르의 시점에서 송의 시점으로 바뀌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여러가지가 혼재돼 있는 텍스트구나 싶었죠.
 
Q 지금은 어떤가요.
여전히 혼란스러워요(웃음). 그런데 이 혼란스러움, 여러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느낌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이 작품이 가진 감각이기도 하고, (극 중) 시대를 아우르고 있는 감각이거든요. 베트남전쟁을 비롯한 국제정세, 여러 이념과 이념이 충돌하고 여러가지를 보고 듣는 가운데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 시대 자체를 감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Q 여장도 하셔야 되는데, 외적인 표현에 있어서도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송 릴링이라는 인물은 천재적인 예술가라고 봐요. 배우로서도, 작가로서도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사람인 거죠. 그렇게 접근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은 여성을 완벽하게 연기해내야 돼요. 제가 그런 리듬을 관객 분들께 드려야 하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외형이 바뀌는 데서부터 출발했어요. 그런데 연습하다 보니 결국엔 제 마음이 여성이 돼야 하더라고요. (여자의) 제스처나 행동들, 기분이 나빠지는 포인트나 템포 같은 것들이 남자와는 다르잖아요. 그런 것들을 몸으로, 또 심적으로 접근하고 대사 안에서도 찾고 있어요.
 
Q 주위 여성분들에게 물어보시기도 하나요?
많이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송 릴링이 연기하는 ‘완벽한 여자’는 남자들이 생각하기에 완벽한 여자잖아요. 그래서 여성 분들에게 물어보기 보다는 오히려 남자들의 시각에서 많이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남자들이 정숙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모습. 물론 그게 편견일 수도 있지만요.
 
Q <프라이드> 때 동성애와 차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고 하셨어요. 이번 작품에서도 개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된 화두가 있나요?  
평상시에도 하는 생각인데, 이념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우리 나라도 엄청난 비극의 역사를 가진 분단국가잖아요. 우리는 2017년을 살고 있지만 어떤 면에선 과거에 머무르고 있고, 그런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이 있잖아요. 그리고 저는 어쨌든 남한에서, 자본주의라는 이념 안에서 자라나 배우를 꿈꾸고 이렇게 공연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시 주도면밀하게 살피게 돼요. 왜냐면 송 릴링은 그러지 못했거든요. (사회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살다 보니 자신의 꿈을 위해 풀어갈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 격변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감각으로 살았을지, 지금 제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있어요.
 
서양이 보는 동양과 동양이 보는 서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돼요. 요즘은 좀 달라졌겠지만 여전히 어떤 선입견이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나는 서양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 그 시대에는 더더욱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을지도 상상해보게 되고.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는 남성과 여성이에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접근했을 때는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거죠. 송 릴링이 바로 그런 인물이고요. 자신은 어떠한 성도 될 수 도 있고, 그런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질, 눈을 봐야 된다는 거에요. 그게 이 작품에서 중요한 지점 같아요.
 
Q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연구해야 할 지점들이 많네요.
그런데 사실 배우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해요. 물론 디테일하게 들어가다 보면 생각할 것들이 많지만, 결국 송 릴링이 왜 갈리마르에게 그런 행동을 했을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가 중요하거든요. 어제 밤에도 계속 송 릴링의 ‘이유’에 대해 생각했어요. 송 릴링은 정말 끝까지 간 인물이거든요. 20년 동안이요. 그러려면 자기 안에 그만큼 큰 이유와 동기가 필요한데 그게 무엇일까.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는데 이 사람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요. 굉장히 질기고 집요하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요.
 
그래서 저는 송 릴링이 굉장히 외로운 순간이 있을 것 같아요. 그 순간을 아주 디테일하게 상상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송 릴링은 그 외로움을 느끼려고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에요. 그 시대의 높은 정치인들, 국제 정세를 움직이는 외교관들, 그들이 파티에서 하는 행동들을 아주 시니컬하게 비웃을 수 있는 인물일 것 같아요. 관점이 남다르고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요. 비웃으려면 시대를 뒤에서 따라가는 게 아니라 앞서가야 하니까요.
 
Q 연습실 분위기는 어떤가요. 갈리마르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느낌은 많이 다른가요?
많이 달라요. (김)주헌 형은 굉장히 에너지가 커요. 사람을 정말 즐겁게 해주고, 같이 하는 배우에게 에너지를 많이 주세요. 그리고 형이 순간순간 하는 행동들에 굉장히 진실성이 있고 진중한데, 그렇기 때문에 웃기기도 해요. 되게 좋아요.
 
(김)도빈 형은 느낌이 좀 달라요. 굉장히 천진난만하고 아이 같지만 그 안에서 갑자기 날카롭고 센티멘탈한 표현들이 나와요. 그 두 가지가 대비되고 부딪히는 느낌이 있죠. 함께 하는 형들, 선배님들 다 너무 좋으셔서 아주 편하게 작업을 하고 있어요. 서로 의견도 너무 잘 소통하고 있고. 연습실 분위기는 정말 자유롭고 좋아요.
 
Q <엠.버터플라이>가 워낙 인기작인데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새로운 연출과 배우들이 참여해서 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궁금증이 큰 것 같아요. 이번 <엠.버터플라이>는 전체적으로 어떤 느낌의 공연이 될까요?
제 생각엔 되게 속도감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우리 작품이 1960~1980년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되게 빠르게 흘렀고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잘 들여다봐야 하는 순간을 제대로 못 보고 지나오면서 상처받고 피해 입은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사람들이 너무 빨리 움직인 거죠. 이 작품이 그런 속도감을 주는 것 같아요. 관객 분들도 그 속도감을 생생하게 느끼시면 좋겠어요.
 
Q 이 작품은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잖아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믿고 싶었던 환상. 그동안 살아오면서 무너졌던 환상, 혹은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환상이 있나요.
제가 연기자로서 쫓고 싶은 환상은 있죠. 제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방황하다가 예고로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연극을 접했어요. 그러다가 2학년 때 <우리 읍내(Our Town)>라는 작품을 했는데, 그 작품이 저를 완전히 변화시켰어요.
 
<우리 읍내>가 삶과 죽음에 대한 작품이잖아요. 당시 ‘조지’를 연기했는데, 공연 시작 전에 오열을 할 정도로 마음이 굉장히 요동쳤어요. 공연 전에 우리끼리 손을 모아 파이팅을 하는데 그게 너무 슬픈 거에요. 우리가 극장이라는 곳에 모여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그 전에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파이팅을 한다는 게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막 움직였어요. 그리고 제가 ‘에밀리’의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장면에서도, 저는 그때 18살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였는데도 그게 너무 슬픈 거에요. 그래서 막 울었어요. 관객들도 울고, 선생님도 울고.
 
그 작품에 화자의 역할을 하는 ‘무대 감독’이 있어요. 제가 막 울고 관객들도 울고 있는데 무대 감독이 관객들을 향해 “자 여러분, 이제 이 무대는 막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도 이제 극장을 나서서 집에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해요. 그러면 관객들도 조금 전의 그 시공간을 깨고 나오는 거죠. 그 엄청난 연극의 힘, 마법 같은 힘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그 작품을 끝내고 나서 내가 연극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면 정말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갖고 살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만의 환상, 제가 연극에 대해 품은 환상이겠죠.
 
Q 그 때 이후로 계속 연기를 전공하셨고 졸업 후2014년부터 연극을 하셨는데, 중간에 힘들었던 순간은 없었나요.
정말 많았죠. 제일 고민이 컸던 때가 대학을 졸업할 시점이었어요. 가장 고민됐던 지점은 어떻게 연기를 시작할 것인가 였어요. 나는 연기자로서 어떻게 길을 개척할 것인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갈 것인가요. 연기력도 중요하지만, 연기에 대해 어떤 사고를 갖고 움직이느냐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거든요.
 
결과적으로는 일단 일이 닿는 대로 시작했어요. 자연스럽게 연극으로 데뷔하게 되면서 극단 작업 위주로 연기를 하게 됐죠. 방송이나 영화에도 꿈이 있으니 틈틈이 오디션에도 지원했고요. 그렇게 방향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구체적인 방향성은 연극을 놓지 않는 거에요.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극장에 오는 삶을 살고 싶어요.
 
Q 한창 고민을 할 때 현실적인 생계 문제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너무 두려웠죠. 그런 고민을 했던 순간이 길고 힘들었지만, 아직 제가 젊은 것 같아요. 두려움보다는 부딪혀 보자는 생각이 커요. ‘조금 해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빨리 그만하고 다른 일을 찾으라’는 어른도 계셨지만, 제가 그런 이야기에 흔들리는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아직 그런 시기도 아닌 것 같아요. 전 아직 젊고, 더 부딪히고 깨져야 할 부분이 많아요.
 
오히려 더 많이 고민했던 부분은 연극에 대한 거였어요. 젊은 날의 연극에 대한 고민, 어디에서 연극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요.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지금 제가 젊은데, 연극 열전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연극에 시간을 쏟는 젊은이가 되겠죠. 그거에요. 전 지금 젊고 힘이 넘쳐납니다(웃음).
 
Q 연기 외에 취미 등 다른 관심사가 있나요? 마지막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도.  
물에 있는 걸 되게 좋아해요. 앞으로 시간이 있다면 물로 할 수 있는 스포츠들에 많이 도전해보고 싶어요. 여행도 많이 다니고 싶고요. 저라는 사람이 좀 더 많은 감각들을 가지면 좋겠어요. 태평양에서 돌고래랑 같이 수영도 해보고 싶고(웃음), 여러가지 감각들을 많이 느껴보고 싶어요. 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사람, 자연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아직 그런 사람이 못 되거든요.
 
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을 잘 다져서 관객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 지금은 30대에 들어서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로 관객들과 만나고 싶고, 점점 세월이 흐르면 또 거기에 맞춰서 제가 갖고 있는 감성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만나고 싶고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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