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와의 만남은 운명” 부담감 덜어내고 대담해진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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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레베카>는 스릴러와 로맨스를 오가는 진폭이 더 커졌다. 막심과 ‘나’가 펼치는 로맨스가 더 달콤해진 만큼 광기 어린 댄버스 부인이 주는 긴장감도 강렬해졌다. 그 짜릿한 온도차의 배경에는 댄버스 부인을 연기하는 김선영이 있다. 그녀는 팬들이 지어준 별명 ‘여왕’에 걸맞게 쩌렁쩌렁 울리는 성량으로 고난도 넘버를 소화하다가도 레베카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섬세하게 연기해 냈다. 문득 그녀의 작품 준비 과정이 궁금해졌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난 김선영은 또렷했다. 캐릭터에 대한 논리정연한 분석을 적확한 언어로 풀어내는 그녀의 눈빛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 김선영의 삶을 꾸려가는 과정에서 배우로서, 엄마로서 어떤 지점을 바라봐야 하는지 이미 대강의 답을 찾은 듯 했다.

예전 인터뷰에서 “배우와 작품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한 적 있으시던데요. <레베카>와의 만남도 운명적이셨나요? 
네 맞아요. 사실 예전부터 댄버스 부인에 어울릴 것 같다는 의견을 여기저기서 듣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데뷔할 때부터 다소 강한 이미지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댄버스 부인처럼 너무 강렬한 캐릭터는 조금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 강한 캐릭터를 하는 게 재밌을지 의문도 들었고요. 그런데 배우는 여러 작품을 만나고 인생의 경험이 쌓이면서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 같은 게 바뀌잖아요. 이제는 대중들이 저를 그런 이미지로 바라봐 주신다면 좀 더 대담하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생각이 바뀌던 시점에 <레베카> 제의가 들어왔어요. 운명적인 거죠.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마음이 공존하는 상태로 <레베카>를 시작했어요. 이미 너무 잘돼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제가 들어가서 민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는 무거운 마음과 한편으로는 이미 너무 잘 갖춰진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그냥 기존의 바탕 위에서 편하게 놀면 되겠다는 안도감, 이 두 가지를 왔다갔다 하면서 연습했던 것 같아요.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 못지 않게 참 미스터리한 인물이에요. 댄버스 부인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무대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댄버스 부인의 삶 전체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먼저 잘 이해해야 관객들에게 전달될 테니까요. 댄버스 부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당시의 상황을 계속해서 상상했어요. 소설 원작에도 댄버스의 어린시절 얘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고요.
 
레베카가 일반적인 범주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분명 정상적이지 않은 인물인데 댄버스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레베카가 옳다고 믿으며 산 거죠. 사람들이 정해놓은 도덕, 윤리, 가치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레베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데에서 댄버스 부인의 광기가 싹트는 거예요.
 
그렇게 서로 믿고 의지하고 모든 걸 터놓고 얘기했던 레베카가 숨겨왔던 사실이 하나 둘씩 밝혀지니까 댄버스 부인은 “나는 대체 뭐였나”라고 배신감을 느꼈겠죠. 어렸을 때부터 자라오면서 분신처럼 지키고 모든 걸 양보하며 가꿔줬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달으면서 광기로 치닫는거죠.
 
선영 씨의 캐릭터 분석을 들어보니 이 내용을 토대로 <레베카2>를 만들면 재밌을 것 같네요.(웃음)
연습하면서 레베카가 너무 궁금해서 다른 배우들한테 레베카의 삶을 다룬 프리퀄 성격의 창작뮤지컬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사기극조차 고상하고 완벽하게 마무리 짓는 레베카라는 인물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더라고요. ‘나’나 막심은 조연이 되고 레베카를 중심으로 다뤄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댄버스 부인이 품는 ‘분노의 결’ 달라

광기에 휩싸여 있는데다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역인데도 불구하고 댄버스 부인이 관객들에게 늘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일단 댄버스 부인은 캐릭터 자체가 독특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아내요. 기본 구조가 너무 탄탄한 캐릭터인데다 “저 노랜 대체 뭐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난도 넘버들을 부르기 때문에 어떤 배우가 해도 빛이 날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마다 댄버스 부인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겠지만 다들 그 과정을 재밌게 느꼈을 것 같아요.
 
2막 1장에서 댄버스의 본심이 드러나는 대사는 배우마다 단어나 억양이 조금씩 차이나던데요. 선영씨는 “감히 드윈터 부인의 자리를”로 시작하는 대사를 위압적인 어조로 음절 하나 하나를 쏘아붙이던데요. 이런 대사 처리 방식에 나름의 의도가 있을까요?
로버트 연출은 작품의 기본골격은 정확히 지키되 배우의 디테일한 해석이나 표현법에 있어서 크게 터치하지는 않았어요. “이건 안돼, 이건 꼭 했음 좋겠어” 식의 디렉션이 많지 않아서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그 장면에서 화가 심하게 나지 않아요. 분노의 감정이긴 한데 결이 조금 달라요. 이미 댄버스 부인의 계획대로 무도회 사건은 벌어졌고 ‘나’는 충분히 수모를 겪었기 때문에 계획했던 대로 모두 이뤄졌거든요. ‘나’가 자신이 뭘 잘못했냐고 따져 물을 때 댄버스 부인이 품는 감정을 말로 풀어내면 ‘네가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네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정신차려”겠지요. ‘나’를 설득시키려는 분노랄까요.
 
댄버스 부인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또다른 넘버가 ‘영원한 생명’이에요. 레베카에 대한 그리움이 처연하게 묻어나잖아요.  
공연 초반과 지금을 비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부르는 질감, 밀도가 좀 달라졌어요. 굉장히 결연한 감정으로 바뀌었거든요. “새 안주인이 왔는데,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 지켜야 할 것은 뭐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다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죠.
 
“내면으로 파고드는 연기가 좋아”
 
댄버스가 레베카를 갈망하듯이 누군가를 동경해본 적 있으신가요? 혹은 반대로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본 적도 있으실 것 같아요.   
같이 공연하던 후배 중에 갈망까지는 아니지만 저를 너무 좋게 봐 준 친구가 있어요. 제가 복도를 지나가거나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으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친구였죠. 그 분을 떠올리면 “얘 때문에라도 내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다잡게 돼요.(웃음)
 
사실 전 살면서 무언가에 그리 집착해 본 경험도 없고 그런 성격도 아니에요. 하지만 배우 김선영의 인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고상하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끊임없이 하는 것 같아요. ‘고상’이라는 단어가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저는 되게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어떻게 하면 고상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무대 위에서 품위 있는 연기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들, 그런 것도 제 안에 있는 하나의 갈망으로 볼 수 있겠죠.
 
지금까지 해오셨던 작품 중에는 <위키드>의 엘파바처럼 감정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캐릭터도 있었고 <나인>의 루이사처럼 내면으로 파고드는 역할도 있었어요. 어떤 쪽을 더 선호하시나요?
저는 내면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역할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런 역할이 무대에서 그렇게 유리한 역할은 아니죠. 무대 위에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감정을 켜켜이 쌓는 연기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연기로 춤을 추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 게 너무 재밌어요. 너무 생각을 많이 해야 해서 피곤할 때도 있지만요(웃음)
 
올해로 데뷔 18주년이죠. ‘OO년차’같은 수식어가 언제부턴가 자주 따라붙었던 것 같아요. 내심 무게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요.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아요. 햇수로 치자면 올해가 벌써 19년차네요. 데뷔 20년차 21년차,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아요. “연차가 쌓인 만큼 내가 잘해야 돼”라는 부담감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고 있거든요. 하나씩 내려놓는 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하고자 하는 역할이나 할 수 있는 역할의 범위는 조금씩 좁아질 테니까 더 많이 내려놓고 열어놓아야 할 것 같아요. <레베카>에 참여하면서도 부담감을 좀 더 덜어내려 했고요.
 
배우 김선영과 엄마 김선영
“든든한 지원군이 있죠”


결혼과 육아. 최근 몇 년 동안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일단은 제가 없어졌어요.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죠. 누군가 그랬어요. 배우는 원체 이기적인 존재라고. 왜냐면 늘 누군가로부터 시선을 받고 ‘내가 맡은 걸 잘해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자기을 관리하는 데에 집중하며 살게 되거든요. 저도 그랬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둘이 나눠야 하는 삶이 되면서 저만을 생각할 수 없더라고요.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할 겨를이 없어졌어요. 제가 사라진 거죠.(웃음) 예전에는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제가 들어가고 싶을 때 집에 들어갔는데 이제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공연을 하면서도 제 상황의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부담감을 좀 덜어낸 지점에서 새로운 힘이 생긴 것도 같아요.
아기를 낳으면 배우로서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제가 몸소 겪어보니 확 와닿더라고요.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가 달라지면서 한 인간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육체적으로도 에너지가 계속 채워지는 것 같아요. 작년에 <잃어버린 얼굴 1895> 할 때도 원캐스트로 16회를 기복없이 소화했고 지금도 고난이도 넘버가 많은 댄버스 부인을 무사히 연기할 수 있는 걸 보면 출산 전보다 몸이 더 강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남편 우형씨는 동료, 후배 배우들 사이에서 자상한 분으로 알려져 있던데요, 가정에서는 어떤가요?
우형씨는 주변에서 “너 때문에 다른 아빠들이 욕먹게 되지 않냐”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굉장히 좋은 남편이자 아빠예요. 저 아기 낳고 우형씨도 일부러 한동안 작품활동을 쉬었어요. 양육은 엄마와 아빠가 같이 해야한다는 마음이었으니까요. 아기 목욕은 무조건 아빠 몫이었고요, 집안일이며 요리며 정말 많은 역할을 했죠. 신생아를 돌볼 때는 잘 때도 1시간 반 단위로 일어나서 케어해야 해서 영혼이 가출할 것 같았는데(웃음) 우형씨가 너무나 많은 일을 같이 했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함께 헤쳐나간다는 전우애 비슷한 감정도 생기던데요.

우형씨의 이런 성격은 (시)아버님과 비슷해서 집안 내력인가 싶어요.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묵묵히 챙겨줘서 너무 고마운 사람이에요.
 
왠지 시댁에서의 분위기도 훈훈할 것 같은데요?
(시)어머님이 공연을 많이 보셔서 안목이 굉장히 높으신데 항상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세요. 일 쉴 때는 “선영아, 너는 배우다”라고 하시면서 제 일을 저보다 더 소중히 여겨 주실 정도예요. 아기 낳고 집에만 있어서 좀 편한 모습으로 있던 때였는데 어머님이 “곧 일 시작할텐데.” 하시면서 미용실도 가고 관리하러 가자고 하셔서 배우로서의 저를 잊지 않을 수 있었어요. 어머님은 젊은 시절 밖에서 일하지는 않으셔서 직업을 가지고 활발히 일하는 요즘 여성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님 덕분에 제가 활발히 활동하고 배우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는 건데, 그런 모습이 대견스럽다고 하시면서 더 많이 도와주겠다고 하셔서 너무 감사했죠.
 
마지막으로, 관객분들에게 배우 김선영은 어떻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멋있게 봐주시는 것도 무척 감사하지만, 그보다도 공연을 보시면서 제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셨으면 좋겠어요.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셨을 때 저의 노래와 연기 때문에 작품을 떠올리고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고, 이로써 작품을 빛나게 하는 뒷받침 역할을 하는 배우로 남고 싶어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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