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에 대한 수수께끼”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박정복·신창주·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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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지가 든 금고의 열쇠를 주세요.” 영악한 학생들의 요청으로 ‘게임’이 시작된다. F를 받지 않기 위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인생의 승자가 되기 위해, 또는 단지 선생님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네 명의 학생은 밤늦게 여교사의 집을 찾아 그녀를 닦달하고, 급기야 협박과 폭력을 저지른다. 궁지에 몰린 여교사는 과연 열쇠를 내어줄까?
 
‘시험 답안지가 든 금고의 열쇠’라는 작은 소재에서 시작해 인간의 도덕성과 선악의 개념을 낱낱이 해부하고 충격을 던지는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 8년 만에 무대에 올라 펼쳐지고 있다. 드라마의 깊이와 짜임새는 물론이고,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탄탄해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토록 밀도 높은 무대를 만들어내기까지 배우들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난 28일 이 연극에 출연 중인 세 배우를 만났다. 박정복이 연기하는 발로쟈는 네 학생의 리더 격인 인물로, 논쟁과 회유, 협박을 통해 엘레나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에게는 이 모든 일이 한낱 게임일 뿐이다. 신창주가 연기하는 비쨔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쇠를 얻어내려 하고, 이지혜가 연기하는 랼랴는 다소 냉정하게 이 사태를 지켜보다 점차 혼란에 빠진다. 세 배우는 이 작품이 자신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Q 대사도 많고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작품이라 연습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연기하시는 입장에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어떤 작품인가요.  
이지혜: 처음에 대본을 받았을 때는 이 작품이 구세대와 신세대의 세대 갈등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어요.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학생들, 그리고 선과 정의를 지키려는 선생님의 대립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연습을 하다 보니 이 연극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성과 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더라고요. 공연을 올려보니 그 질문이 훨씬 더 분명하게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것 같아서, 공연을 하면서 더 작품에 매료되고 있어요.   
 
박정복: 단지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을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던지게 되는 질문,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아요.
 
신창주: 무대가 객석과 가깝기도 하고, 저희도 1시간 40분 동안 퇴장 없이 연기를 해야 되니까 처음엔 부담이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런 공간이 작품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어쩌면 관객 분들도 그만큼 더 재미있게 보실 수도 있는 것 같고요.
 
Q 연습하면서 당대 러시아 사회와 역사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셨을 것 같아요.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를 꼽는다면 뭐가 있나요?
박정복: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꽤 많이 공부했어요. 배우들이 즉흥적인 연기를 통해 이 텍스트를 완성했다고 하는데, 왜 이런 대사와 단어들로 논쟁을 펼쳤는지 되게 궁금했어요. 그걸 찾기 위해 러시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죠. 그리고 러시아의 시대상을 담은 이 연극을 왜 지금 관객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한 합의점을 찾기 위해 정말 토론을 많이 했어요.
 
Q 그렇게 해서 찾으신 합의점은 무엇이었나요.
박정복: 공부를 하고 나니까 보이는 것들이 생기더라고요. 이 작품이 1980년대에 쓰여졌으니까 그 전후는 물론이고,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기 전부터 공부를 했거든요.
 
신창주: 정말 러시아의 탄생부터 다 공부했어요(웃음).
 
박정복: 공부를 해보니까 어떤 흐름이 계속 반복되는 거에요. 한 시대가 싫어서 혁명이 일어나고, 또 그 시대가 싫어서 혁명이 일어나고, 우리나라도 어떤 상황에 대한 반발로 촛불집회가 일어나서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는 발로쟈처럼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고, 빠샤처럼 흔들리는 사람도 있고, 비쨔처럼 순수하게 무식하게 갔다가 멈칫하는 사람도 있고, 랼랴처럼 계속 고민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 이건 인간의 본질, 본성에 대한 이야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고,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사실 정답은 없잖아요. 근데 우리 작품의 인물들은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이 맞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요. 그 모습을 관객들이 보시면서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내가 이상적으로 꿈꿨던 삶은 무엇이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조금이나마 바라보실 수 있다면 저희도 이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보람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Q 이런 작품을 하면서 많은 공부와 토론을 하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좀 바뀔 것 같아요.
이지혜: 개인적으로는 정의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어요. 이제까지 살면서 나름대로 불의한 것을 못 참고 화를 냈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그 실체가 뭔지 의심해보게 되더라고요. 내가 생각하고 주장했던 정의감이 과연 무엇이었나, 내가 도덕이라는 것을 편협하게 적용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이 작품에 다섯 명의 인물이 나오지만, 사실은 한 인간 안에 그 다섯 사람의 모습이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누가 옳고 그른 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내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불편하기도 하고요.  
 
Q 열쇠를 지키려는 선생님과 뺏으려는 학생들 중 결국 누가 이긴 걸까요?  
박정복: 누가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닌 것 같아요. 발로쟈의 입장에서 보면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했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도덕성을 가진 선생님을 무너뜨렸다는 만족감도 느꼈겠죠. 근데 세 친구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나 답답함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지혜: 좀 시각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발로쟈가 완전히 이겼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 경험을 통해 학생들 각자의 삶이 달라졌을 것 같거든요. 극중 엘레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하잖아요. “단 한사람이라도 맞서서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악은 사라질 거고, 선과 정의는 승리하게 될 거에요”라고. 학생들이 여기서 ‘아니오’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각성과도 같은 감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게 큰 변화는 아닐지라도 일종의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발로쟈의 완전한 승리도 아니고, 선생님의 완전한 패배도 아닌 것 같아요.
 
Q 비쨔는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요?
신창주: 시골에 내려가서 알코올 중독에 걸려 죽었을 것 같아요. 근데 좀 다르게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더 열심히 잘 살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시 그림을 그린다거나, 시골에 내려가서 엄마와 잘 지내면서요.
 
저는 엘레나 선생님도 이기고 발로쟈도 이겼다고 생각해요. 비쨔는 결국 답안지를 못 받았으니 졌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다시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도 있으니까 길게 보면 성공한 순간일 수도 있겠죠. 만약 제가 비쨔였다면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술만 먹다가 죽었을 것 같아요. 워낙 제가 소심하고 그래서(웃음).
 
Q 공연을 봤을 때 다섯 배우 분들의 연기가 모두 강렬했어요. 연습하면서 서로에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꼽는다면요.
이지혜: 일단 신창주 오빠에 대해 얘기하면, 우리 캐릭터들이 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열쇠가 필요한지. 근데 비쨔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해요. 근데 그 날 기억나? 그런 비쨔의 마음이 너무 진실하게 느껴져서 연출님도 너무 좋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거든요. 우리가 각자 캐릭터를 머리로 계산하기도 하지만, 그게 마음으로 들어오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 때도 비쨔의 마음이 창주 오빠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만큼 진실하게 느껴졌어요. 캐릭터마다 다들 그런 감동의 순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복 오빠는 워낙 중심을 잘 잡고 끌어가는 선배에요. 연습하면서 어려운 순간이 정말 많았거든요. 그런 순간마다 이렇게 해보자고 제안하면서 중심이 돼서 끌고 가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요.
 
박정복: 저희 팀의 가장 큰 장점이 발로쟈 역을 빼면 더블이 없다는 거에요. 저도 사실 원캐스트로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블로 하게 됐는데 (우)미화 누나와 다른 세 배우가 원캐스트로 공연을 지켜주니까 호흡이 변하지 않아요. 저희는 애드립 없이 그동안 공부하고 생각했던 것을 그대로 연기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것을 칭찬하기가 애매한 게, 원래 연극은 원캐스트로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걸 칭찬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좀 씁쓸하기도 하죠.
 
Q 극중 인물들처럼 우리 모두 앞으로 닥쳐오는 상황에 따라 계속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살겠지만,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이것만은 잃지 않고 싶다고 생각하는 신념이나 가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박정복: 그런 게 있을까요? 닥치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가족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원리원칙을 다 지키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이 무서운 것 같아요. 책임져야 할 게 많을수록 나약해지고 눈물도 많아지니까. 제가 강아지를 키우는데, 강아지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예약이 안 되면 답답하거든요. 아버지가 응급실에 가셨을 때도 빨리 처치를 안 해주면 다그치게 돼요. 결국 누구나 다 흔들린다는 거죠.
 
신창주: 저도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정해진 면회 시간이 끝난 뒤에도 거짓말을 하면서 들어갔어요. 내가 급하니까, 아빠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고 싶으니까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계속 흔들리지 않을까요? 막연한 기준은 있을 수 있지만, 그걸 100퍼센트 지킬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지혜: 저는 평소에 웬만하면 분리수거를 하려고 하는 편인데, 미국에선 거의 분리수거를 안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럼 과연 내가 분리수거를 하는 게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엄청난 쓰레기의 양에 비하면 제가 버리는 양은 극히 작을 테니까요. 그런 크고 작은 사안마다 내가 너무 편협했던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정치적으로도 막 분노해서 열변을 토하다가 문득 내가 그런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Q 어떻게 보면 그걸 선뜻 장담하지 못할 만큼 생각을 열어주는 작품이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네요.
신창주: 그런 것 같아요. ‘이거야’라고 단정짓기보다 ‘과연 이걸까?’하고 질문을 던지는 작품 같아요.
 
박정복: 관객 후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자신이 학생일 때 이 연극을 보고, 교사가 되어서 다시 봤대요. 학생일 때는 엘레나 선생님이 너무 답답해 보였는데, 교사가 되고 나서 연극을 보니까 학생들이 미워 보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개개인의 생각과 가치관도 계속해서 달라지는 거죠.
 
이 연극을 보면서 발로쟈가 미운 분들도 계실 거고, 엘레나가 답답해 보이는 분들도 계실 거에요. 그런데 바로 그 답답하고 미운 인물들이 관객 분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일 것 같아요. 그게 이 작품이 계속해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힘 같아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 수수께끼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하지 않을 테니까.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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