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을수록 더 많은 걸 보게 돼요” 연극 <블라인드> 박은석, 김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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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뒤덮인 외딴 저택. 시력을 상실한 후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가둔 청년 '루벤'에게 흉한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여자 '마리'가 찾아온다. 외로운 루벤을 위해 책을 읽어줄 사람으로 고용된 것. 각자 상처와 결핍을 안고 살아가던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어가는 과정을 그린 연극 <블라인드>가 관객들을 찾아왔다.

루벤과 마리로 분한 박은석과 김정민은 이 작품이 단순한 로맨스물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작품에 배어 있는 철학적이면서도 따뜻한 메시지를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이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도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었다고. 과장하지 않고 작품과 자신들의 연기에 대해 적확한 단어로 설명하려 애쓰는 두 배우에게 믿음이 갔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작품으로 연극 <블라인드>를 선택하셨네요.
박은석(이하 박): 오래전부터 하기로 돼 있던 작품이었어요. 2년 반에서 3년 전쯤 동명의 원작 영화를 봤는데 이런 작품을 연극으로 만들면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정민(이하 김): 전 원작 영화를 몰랐어요. 그런데 캐스팅 제안 받고 나서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은 거에요. 감각적이고 흥미롭더라구요. 그래서 참여를 결정하게 됐어요.


<블라인드>는 어떤 작품인가요?
박 : 시각장애인 루벤과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여자 마리의 사랑을 다루지만 사랑이 포커스인 작품은 아니에요.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고, 루벤과 마리가 가진 결핍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외모지상주의나 편견,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주는 행위들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결핍이 충돌하면서 생겨나는 갈등,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들이 얽혀 있는 이야기에요.
 
김 : 마리는 어떤 상처의 기억 때문에 콤플렉스가 강하고 타인에 대해 방어적인 사람이에요. 얼굴에 상처가 가득해서 세상이나 사람과 교감하기보다는 책과 교감을 하죠. 그런데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손끝과 마음으로 사람을 느끼는 루벤은 마리에게 참 아름답다고 말해줘요. 그동안 스스로를 미워하고 폐쇄시켜왔던 마리는 루벤을 통해서 자신에게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돼요.
 
박 : 이 작품이 시각장애인 캐릭터를 장애에만 초점을 맞춰서 1차원적으로 풀지 않은 점이 좋았어요. 루벤을 당차고 자기 할말 다하고 원하는 게 명확한 캐릭터로 그려내서 신선했죠. 제가 그동안 맡았던 배역들은 우월주의에 빠져 있거나, 완전히 연약한 사회의 소수자들인 경우가 많았는데 루벤과 같은 종류의 결핍을 가진 캐릭터는 처음이어서 재밌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눈을 감으면 훨씬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일까요? 이 작품의 어떤 메시지가 가장 마음에 와 닿으셨나요?  
김 : 원작 영화 속 장면인데요, 연극 무대에선 어떻게 구현되는지 아직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루벤이 목욕하다가 수도꼭지에서 욕조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상상해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욕조 속에서 헤엄치고 그 속에 자신이 앉아있는 환상적인 장면을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이 장면의 메시지가 가장 강렬한 것 같아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시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아름다운 상상을 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죠. 우리들이 눈뜬 장님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 : 비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보면서 ‘앞을 못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시각을 차단한 채로 연습하다 보니 오히려 눈뜬 사람들이 좁은 프레임에 갇혀 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눈을 뜨고 있으면 영화를 보듯이 한 프레임 속 세상만 보게 되잖아요. 그 프레임 밖의 세상이 훨씬 더 많이 있는데.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 프레임 바깥까지 봐요. 잠깐의 소리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세계를 머리 속에서 만들어내니까요.
 
깊이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만큼 명대사도 꽤 있을 것 같은데요?
김 : 마리가 루벤에게 남긴 편지 내용인데 “난 너에게서 놀라운 사랑을 봤어. 가장 아름다운 건 너의 손 끝으로 본 세상일거야” 그 말이 제일 좋았어요. 사실 마리가 대사가 별로 없어서 더 임팩트 있게 들리는 것일 수도 있어요. 보통 “일어나” “만지지마”같이 짧은 대사들이 많거든요.
 
박 : 무언극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요?(웃음) <블라인드>는 제가 기존에 맡았던 작품들에 비해 대사량이 5~10% 밖에 안돼요. 하지만 분위기나 움직임, 숨소리, 대사 중간의 포즈까지 세밀하게 컨트롤 헤야 하는 작품이라서 한편으론 걱정돼요. 대사 없을 때 연기하기가 더 힘들잖아요. 대사가 있으면 뭐라도 할 게 있는데. 이제 제 연기력이 들통나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
 
탈북자 목란(<목란언니>)이나 광복 직후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1945>)을 비롯해서 정민 씨가 올해 연기해 온 배역들은 다들 풍파에 시달렸네요. 상처투성이 마리도 그 연장선상일까요?
시대와 상황에 희생당하는 약자이면서도 내면의 강인한 면모를 잃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보면 이전 작품 속 배역들과 마리는 다르지 않아요. 차이점을 찾자면 명숙이나 목란은 시대적 무게감이 컸고 마리는 자기 세계 안에서의 상처가 강한 인물이라는 점이겠네요.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나온다는 점도 이전 작품들과는 살짝 결이 달라서 좀 쑥스럽기도 해요.(웃음)
 
은석씨가 맡은 배역들은 세상의 기대와는 다른 사랑을 한 것 같아요. 여러 여성 사이를 오가는 <클로저>의 댄이나 남녀 모두와 사랑에 빠지는 <수탉들의 싸움>의 존, 그리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마리를 사랑하는 루벤까지요.
이전 캐릭터들에서 도움을 받은 면들이 있긴 해요. 예를 들면 루벤은 극 초반에 화를 많이 내고 날 것 그대로의 에너지를 표출하는데 <나쁜 자석>의 ‘프레이저’처럼 윽박지르는 역할들을 몇 개 해 본 경험이 있거든요. 사실 사람을 만지는 행위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인 루벤의 예민한 부분들은 처음 연기하는 거라서 걱정이 많았어요. 영화와는 달리 클로즈업도 안되고 몸 전체가 다 보이는 연극 무대 위에서 미묘한 감정들을 표현하려면 ‘움직임’이 관건인 것 같아요. 일반적인 연기와는 다른 이 작품만이 가진 포맷이 있는 것 같아서 그걸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시각장애인 이해하기 위해 눈 가리고 연습
대사보다 ‘움직임’이 연기의 관건

 
눈이 보이지 않는 연기, 연습 과정도 좀 다를 것 같은데요?
박 : 눈을 뜨고도 앞이 보이지 않게 해주는 특수한 콘택트렌즈가 있어요. 그걸 착용하고 연습하니까 단순히 눈을 감고 연습할 때와는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분노, 답답함이 컸어요. 루벤은 원래 시력을 갖고 있다가 잃어버린지 몇 년 된 인물이라서 더 힘들었을 거에요.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있다가 없는게 힘들잖아요. 마치 돈처럼요(웃음)
 
저희 배우들이 그런 훈련을 했어요. 눈을 감고 방을 돌아다니면서 물건들을 만지는 훈련이요. 처음에는 너무 답답했는데, 두 세번 반복하니까 방의 사이즈가 나오고 제 머리 속에 공간이 투영되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죠. 전 배우가 함께 <어둠속의 대화>라는 체험에 참여해봤는데 분명히 상식적으로는 공연장 안에 있는걸 알고 있지만, 보트를 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함께 바람도 불어주고 하니까 예전에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보트를 탔던 기억이 실제처럼 확 펼쳐지더라고요.
 
오세혁 연출은 배우들에게 어떤 디렉션을 주고 잇나요?  
김 : 굉장히 재능이 많으신 작가이자 연출이라고 생각해요. 보니까 연출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싫은 소리도 잘 안하시고 정확하게 “이걸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얘기하지 않는 스타일이더라고요.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배우가 진짜 자기가 잘하는 줄로 착각할 수도 있어요(웃음). 맑고 어린아이처럼 순순한 면도 있으시고요. 배우들이 다들 열정적이고 아이디어도 많은데 그런 다양한 의견을 잘 받아들여 이끌어나갈 수 있는 분 같아요.
 
박 : 긍정의 아이콘이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긍정적일 수가 없어요. 사람이 어느정도 예민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잖아요. 이쯤이면 한번쯤 화낼 것 같은 순간에도 너무 긍정적이세요. 배우를 동등한 입장에서 대해주시고 얘기도 잘 들어주시니까 그런 부분들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도 어떤 빛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고 싶은 연기 다 했기에 후회 없는 한 해
 
올해가 1달 남짓 남았어요.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얼마나 이뤘는지 스스로를 평가해 본다면?
김 : 제가 배우로서 너무 감사한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 너무 아픈 인물을 연이어서 연기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좀 밝은 역할이나 다른 환경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블라인드>를 포함해서 결이 다른 작품들을 만나게 돼서 저는 되게 만족스러운 한 해였어요.  
 
박 : 선택에 대한 후회가 없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스스로를 살짝 과대평가해서 100점을 주고 싶어요. 하루하루를 뭐 하나라도 더 이뤄내려고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공연도 방송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뭔가 다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라 후회 없었던 것 같아요.
 
연말이면 시상식이 떠올라요. 혹시 서로에게 상을 준다면 어떤 이름의 상을 주고 싶나요?
김 : 은석이에겐 ‘작품발굴상’을 주고 싶어요. <블라인드>를 연극화하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이 은석이거든요. 저는 보지도 못했던 작품이었는데 은석이를 통해 알게 됐기 때문에 이 상을 주고 싶습니다.
 
박 : 누나에겐 옵저버(observer) 상. 한국말로는 관찰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면 누나는 유심히 보고 있어요. 통찰력이 있는 거죠. 괜히 섣불리 얘기하지 않고 나중에 한마디 하거나 아예 얘기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인 것 같아요.
 
한창 바쁜 요즘, 만일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무얼 하고 싶으신가요?
박 : 자전거요. (박은석은 자전거 마니아로 유명하다) 지난 여름에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 가서 자전거를 탔어요. 거기는 유럽의 사이클리스트들이 휴가가서 자전거를 즐기는 섬이에요. 실제 선수들의 훈련지이기도 하고요. 산과 평지, 해안도로 코스가 섞여서 너무 좋아요. 매해 대회가 있는데 일주일의 휴가가 있다면 거기 참석하지 않을까 싶어요. 내년 1월에는 오키나와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에요. 시즌오프란 저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영하 10도까지는 탑니다. (웃음)
 
김 : 많은 분들이 그렇겠지만 여행이요. 지난 1월에 독일 베를린에 다녀왔어요. 그 때 공연을 많이 봤어요. 그 기억이 1년을 버티는 힘이 돼 준 것 같아요. 독일 연극을 보고 너무 센세이셔널했어요. 전 독어를 잘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독일 연극은 내러티브로만 풀어내지 않고, 되게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재밌게 볼 수 있었어요. <미스 줄리>처럼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작품들도 있어서 한국에서 봤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보기도 했고요, 어떤 작품은 영상을 많이 써서 영상미 위주로 감상하니까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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