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성악가 패티를 빛내다, <안나 카레니나> 강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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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비극적 사랑의 소용돌이 속 처절한 한 여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개막 전부터 국내 처음 소개되는 러시아 발 작품이라는 것과 화려한 캐스팅 등으로 화제를 모아온 이 작품은, 개막 후 단 한 장면 등장하여 관객들의 귀를 단숨에 황홀의 경지로 몰아넣은 인물, 극 중 유명 소프라노 패티의 등장에 더욱 큰 이목이 쏠리고 있다.

아찔한 고음으로 이뤄진 아리아 ‘죽음 같은 사랑’을 맑고 찬란하게 불러 극중 주인공 안나의 괴로운 심정과 위기를 더욱 절정으로 보여주는 패티. 작곡가 베르디가 ‘너무나 완벽하다. 그러므로 다시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19세기 실존 소프라노 아델리나 패티를 모델로 한 역으로, 전문 성악가가 소화해야 하는 이 역할을 빼어나게 그려내고 있는 이는 실제로도 많은 팬들이 따르는 스타 소프라노, 강혜정이다.

아름다운 아리아, 딱 듣자마자 "러시아가 그려져"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2막 후반부에 등장하는 패티는 전설적인 소프라노로 모든 왕족, 귀족들이 저마다 ‘모시고’ 노랠 듣고 싶어하는 스타 중의 스타이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진 후 사회의 지탄을 받던 안나 역시 용기를 내어 패티의 공연장으로 향하지만, 그를 맞이하는 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패티의 아리아 ‘죽음 같은 사랑’이었다.
 
“가사가 ‘타들어 가는 이 갈증, 생기를 잃은 내 마음, 후회 없는 사랑 날 쓰러트리네’에요. 안나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죠. 기존에 있던 곡이 아니라 극을 위해 작곡한 거에요. 이 노랠 듣자마자 러시아적인 느낌이 확 왔어요. 너무 곡이 좋아요. 신기한 건 극 중 성악가가 부르는 오페라틱한 아리아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넘버 중 하나로, 뮤지컬에 들어가서도 너무 잘 맞더라고요.”

안나는 패티의 아리아를 들으며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이라는 비극의 길로 스스로를 내몬다. 극을 절정으로 이끄는 부분으로, 절망 속 안나의 내면과 아름다운 아리아가 팽팽히 맞서며 아이러니한 궤를 같이 하는 장면의 높은 밀도를 위해선 실제 성악가가 패티 역을 맡아 완성도 있게 소화해야만 했다. 강혜정은 또다른 소프라노 김순영, 성악 전공자로 극중 키티 역도 소화하고 있는 이지혜와 함께 번갈아 패티로 분하고 있다. 그녀에겐 이번이 첫 뮤지컬 출연이다.

“딱 (공연 프로덕션에) 들어왔을 때부터 에너지가 다르더라고요. 가수(그녀는 자신에게 익숙한 ‘가수’라는 말로 배우들을 지칭했다.)들이 주는 분위기가 (클래식과는) 너무너무 달랐어요. 오페라도 뮤지컬과 같이 종합극이지만 고전이다 보니 극이 좀 정적인데 여기는 훨씬 느낌이 다양하다고 해야 하나? 또 장기 공연이라 에너지가 끊기면 안 되잖아요. 그 이어가는 에너지도 정말 좋아요. 그런 분위기나 에너지가 저 스스로에게도 리프레쉬 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지만 뮤지컬은 그에게 친근한 장르다. 대학 졸업 후 뉴욕 매네스 음대 대학원 유학시절, 브로드웨이에서 하는 뮤지컬은 다 찾아봤다. <오페라의 유령>은 다른 캐스트로 8번이나 봤다고.

“물론 오페라도 봤지만 뮤지컬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또 브로드웨이는 학생 티켓이 싸기도 했고요. 극장 분위기나 뮤지컬적인 맛은 브로드웨이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제가 노래하는 사람이니까 노래는 한국 가수들이 훨씬 더 잘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한국 가수들이 훨씬 더 잘 불러요.”

함께 무대에 서는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 못지 않게 객석에서 보내주는 관객들의 에너지 역시 그녀를 놀라게 했던 새로운 경험이다.

“이게 장기공연인데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 극장에 찰까? 싶었어요. 제가 무대 2층에서 공연하잖아요. 2층에 섰을 때 조명이 딱 돌아가는데 그 비춰지는 2층까지 다 관객이 찬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티켓이 그렇게 싼 것도 아닌데 같은 작품을 다른 캐스팅으로, 아니면 똑같은 캐스팅이라도 몇 번씩 보고. 또 뮤지컬 보는 관객들 연령층이 굉장히 다양하잖아요. 그런 게 부러웠어요. 클래식도 좀 더 대중화되었으면. 관객들이 있어서 배우들이 오히려 에너지를 얻지 않나 생각해요.”
 
육상선수? 아나운서?
매 순간 노래와 함께 최선 다한 지난 10년


“데뷔가 빨라서 그렇다”며 자기는 ‘젊은’도, ‘중견’도 아닌 ‘끼어있는’ 사람이라고 겸손의 말을 반복했지만, 그녀는 지난해 국내 데뷔 10년을 맞았고 1년에 100회 이상 무대에 서는,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정상의 성악가이다.

“공연이 많은 편이긴 해요. 제 소리가 아주 무거운 소리도, 아주 낮은 소리도 아니거든요. 신년 음악회나 협연들에선 너무 부담스러운 곡들을 잘 안해서이기도 하고, 듣기 좋은 곡들을 선호하다 보니 제 목소리가 여기저기 잘 맞아 많이 불러주시는 것 같아요. 종교극이나 미사곡, 바로크곡에 잘 어울리니까요.”
 
노래는 초등학생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했다. 선명회 합창단(현 월드비젼 합창단) 생활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노래가 아니었다면 뭘 하고 살았을까를 최근까지 아예 생각조차 못해봤다는 고백이다.

“가족들이 모여서도 그 얘길 해요. 누굴 닮아서 노래를 하고 있는 걸까? 목청은 아빠가 좋으시고 워낙 엄마가 노래를 좋아하시긴 했지만 주변에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신체적으로 상체가 좀 두꺼워야 노래를 잘 한다고 하는데, 제가 그래요. 어떤 한의사님이 언젠가 저를 보고 소리 낼 몸이라고. 그래서 노랠 하거나 판소리를 하거나, 하여튼 소리를 내는 직업을 해야 건강에 좋다고 하셨어요. (웃음) 그래서 아, 그럼 이 길이 내게 맞나보다, 했죠. (웃음)”
 
“그냥 열심히 뛰었는데 1등을 했다”며 중학생 때 잠시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 시 대회까지 나갔고, 대학시절 교내 방송국에 어렵게 합격해 들어가 아나운서의 꿈을 키워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그녀는 노래와 함께 했다.

“한 번도 노래가 싫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슬럼프가 있었거나 아팠다거나, 뭔가 계기가 있었다면 다른 걸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행인지 그런 게 없었거든요. 유학 후 해외 활동을 이어 나가려고 했었는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고(현 계명대학교 음악공연예술대학교 교수), 학기가 시작하면 나가기가 쉽지 않아 해외 공연도 많이 취소 했었어요. 그렇지만 지난 10년 후회는 없어요. 주어진 연주나 주어진 시간에 충분히 노력을 했다고 생각을 하니까요.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직업이라는 거 자체가 어려운데, 이왕 계속 노래를 해야 한다면 더 연구해서 더 좋은 무대 보여드리려고 해요.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고요.”
 
따뜻한 인상과 정겨운 어투는 황홀한 그녀의 목소리를 완성시키는 또 하나의 요소임이 분명하다. 공연장에 아이를 데리고 올 때 모자가 함께 노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는 공연관계자의 말을 빌지 않아도 삶과 커리어, 노래와 인생의 하모니를 최선을 향해 담담히 조화시키는 그녀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udiochoon.com), 쇼온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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