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 안나는 누구? <레드북>처럼 차별에 맞선 여성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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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연에서 큰 호평을 이끌어냈던 창작뮤지컬 <레드북>이 무대로 돌아왔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뮤지컬은 탄탄한 만듦새에 앞서 우선 참신하고 의미 있는 소재로 눈길을 끈다. 당시 여성에겐 금기였던 ‘19금’ 소설을 당당히 써내려 가는 여자 주인공 ‘안나’를 통해 성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날카로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창작진이 탄생시킨 가상의 인물이지만, 실제로 역사에는 안나처럼 당돌하게 당대의 금기와 통념에 맞섰던 여성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이 남긴 예술작품은 극중 안나가 쓴 소설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하고 변화를 불러왔다. 안나처럼 당돌하고 발칙했던, 그리고 뜻 깊었던 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6)
17세기에 활약했으나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주목받은 위대한 예술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로 (뒤늦게) 알려진 인물이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난 그녀는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며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녀는 17세에 여자라는 이유로 미술학교 입학을 거부당했고, 같은 해 끔찍한 사건을 겪게 된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한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뒤 재판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당시의 재판 제도 때문에 수치스러운 검사와 고문을 받은 것이다.
 
(왼쪽부터) 회화의 알레고리로서 자화상, 1639 /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 1602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여성에게 덧씌워진 억압과 편견을 깨나갔다. 그녀는 여성을 연약하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다른 화가들과 달리 주체적이고 강인하며 반항적인 여성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특히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유디트’를 즐겨 그렸는데, 대표작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는 오랫동안 겸손과 정숙의 상징이었던 유디트를 능동적인 여성 영웅으로 되살린 작품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이같은 활동을 통해 여성 최초로 피렌체 디세뇨 아카데미아의 회원이 되는 등 여성의 능력 밖이라 여겨졌던 예술적 성취를 왕성히 이뤄냈다.

작가 아나이스 닌(1903~1977)
프랑스 출신의 미국 소설가 아나이스 닌은 여성의 관점에서 쓴 에로티즘 문학의 선구자 격 인물로 꼽힌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유리종 아래에서>(1944) <콜라주>(1964) 등의 소설을 발표한 그녀는 1966년부터 발표한 일기집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십대 초부터 평생 동안 일기를 썼는데, 특히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를 만난 1931년부터는 더욱 왕성하게 일기를 썼고, 성(性)에 대한 과감한 글쓰기에도 도전했다. 그 중 1931년 10월부터 1년 동안의 일기를 그대로 옮긴 작품이 대표작 <헨리와 준>이다.
 
(왼쪽부터) 아나이스 닌 / 소설 <헨리와 준>
 
“만약 남자였다면, 내가 욕망하는 것에 기꺼이 즐거워했을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헨리와 준>에서 아나이스 닌은 남편인 휴고, 사촌인 에두아르도, 그리고 소설가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인 준 맨스필드 등 4명의 남녀와 나눈 뜨거운 사랑을 과감하게 기록했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남성적인 면과 양성애적 기질을 깨닫고 번민하기도 한다. 그것은 당시의 통념을 크게 거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이스 닌은 자신이 느낀 모든 욕망과 관능과 쾌락, 그리고 치밀한 자기성찰을 모두 글로 남겼다. 당대의 보수적인 시각과 남편이 받을 충격 때문에 그녀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 글을 발표할 수 있었지만, <헨리와 준>은 여성의 성과 욕망을 주체적으로 기록한 문학으로서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가 실비아 슬레이(1916~2010)

미술사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누드 작품들은 대개 남성의 눈으로 대상화된 여성을 그린 것이다. 20세기 후반 뉴욕에서 활약했던 여성 화가 실비아 슬레이는 여성의 눈으로 본 남성 누드를 그림으로써 이같은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그녀는 벨라스케스·앵그르 등 고전주의 화가들이 남긴 여성 누드를 비틀어 그린 남성 누드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괴리감과 충격을 느끼게 했다. 성적 욕망의 ‘주체’였던 남성을 여성에게 보여지는 욕망의 대상으로 그려낸 것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실비아 슬레이 / 벨라스케스, 비너스의 화장, 1651
/ 길게 누운 필립 골럽, 1971(위의 그림을 비틀어 그린 남성 누드)
 
“나의 그림들은 남성과 여성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실비아 슬레이는 인물을 그릴 때 체모나 피부를 있는 그대로 세밀하게 그림으로써 여성은 희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성은 늠름한 모습으로 담아냈던 기존의 관습을 깨고 사실적인 누드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남편과 동료 화가, 평론가들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 적나라할 만큼 실제와 가깝고 개성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실비아 슬레이의 작품은 ‘남성이 그리고 여성이 그려지는’ 기존의 권력관계를 뒤집고 남녀를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자 한 시도였다.  
 
글/구성 :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플레이디비 D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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