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짐 없이, 늙을 때까지 배우로” 연극 ‘컨설턴트’ 양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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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살고 싶어? 그럴 거야.”
서늘하게 웃으며 타인의 생사를 쥐고 흔드는 남자, 그러나 실상은 그 자신 역시 조직의 일개 부속품일 뿐인 존재. 양승리가 ‘컨설턴트’에서 연기하는 ‘M’은 그런 인물이다. 그는 얼마 전 개막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J에게 살인 컨설팅을 의뢰하는 정체불명의 남자 M으로 분해 열연 중이다. 훤칠한 키에 검은 양복을 입고 등장해 여유만만한 태도로 J를 조종하는 모습은 이 작품이 그리고자 했던 ‘개인을 압도하는 거대 시스템’을 선명히 대변했다.  
 
올해로 데뷔 10년차를 맞은 배우 양승리는 원래 사회체육학과에 진학했다가 방향을 틀어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고전 소설과 철학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고, 뮤지컬 앙상블로 데뷔해 활동하다 연극 ‘모범생들’로 또 다른 분기점을 맞았다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던 학생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배우로, 그리고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로서 또 다른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본 끝에 “가장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것”이라며 미소지었다.
 
Q 연극 ‘컨설턴트’는 어떤 작품으로 다가왔나요.
우선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대본을 접하고 나서 바로 원작소설을 읽었는데, 소설도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고, 또 내가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도 되고. 많이 기대가 됐죠. 
 
Q M은 J에 비해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인데, 어떻게 M이라는 인물에 접근하셨나요. 등장 전에 입매를 훔친다거나 하는 세세한 표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이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인고의 시간을 거쳤는데(웃음), 다행히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잘 만들어진 것 같아요. M이라는 인물도 같이 연기하는 오민석, 고영빈 형과 같이 고민하고, 형님들이 좋은 것들을 많이 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원작에는 J만 있고 M이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아요. 소설에는 J와 그가 뛰어넘을 수 없는 시스템만 등장하는데, 그 시스템을 사람으로 표현해낸 것이 M이거든요. 그래서 M이라는 인물이 시스템의 집합체인지, 아니면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인지 등을 고민했어요. M은 어떻게 이 조직에 들어왔는지, 지금 몇 명의 컨설턴트를 관리하는 건지 등도 많이 상상했죠.
 
그러면서 M이 신의 경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시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어떨 때는 여유롭게 J를 하수로 내려다보지만, 또 다른 순간엔 자신을 바라보는 남들의 시선에 분노하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죠. 캐릭터 설정은 형님들과 같이 하되, 그것을 어떻게 디테일한 행동으로 표현하느냐는 모두 달라요. 연출님도 그걸 굉장히 존중해주셨어요.
 
Q 극 후반부에 평범한 삶, 합리화 등에 대한 인상적인 대사들이 있던데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대사를 꼽는다면.
M이나 J의 대사 중에 정말 하나하나 주옥 같은 대사가 많아요. “평범하게 사는 게 더 어렵다”라는 대사라든지, “구조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피라미드에 절대 정점은 없다” 라든지. 거대한 이야기 같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 모두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와 닿게 말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뒀어요. 전 아무래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소박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 세상이 엿 같아서”가 제일 와 닿더라고요. 다들 사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웃음).
 
Q ‘컨설턴트’는 삶의 주체성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살면서 비슷한 주제로 고민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나의 욕망,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하게 되잖아요.
전 일단 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없었어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운동을 하게 됐고, 사회체육과에 진학해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그러다가 졸업할 즈음에 이대로 졸업하면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죠. 근데 제가 신동엽 선배님의 팬이었거든요. 포털 사이트에 ‘신동엽’을 쳐봤더니 서울예대 연극과 출신이라고 나오더라고요. 저기 가면 뭐가 있을까? 해서 더 찾아봤고, 그러다가 ‘저기 가서 개그맨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개그맨을 꿈꾸면서 서울예대에 들어갔는데, 학교에서 연극을 접하면서 연극배우로 살아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스물 두세 살 때였던 것 같아요.
 
Q 왜 이 분야에 마음이 끌렸나요.
많은 배우들이 하는 얘기지만, 고루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고,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는 게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사회체육과에 다닐 때만 해도 제 자신을 되게 싫어했어요. 방황도 많이 했고, 못된 짓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연극을 하고 이쪽 일과 작품을 접할수록 세상이 살만하다고 느꼈고, 내 행복을 찾는 것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됐어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많아졌고. 공연을 하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인격을 느껴볼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아요.
 
Q 데뷔 후 출연했던 작품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공연, 배우로서 분기점이 된 작품을 꼽는다면.
바로 얘기할 수 있어요. 연극 ‘모범생들’이죠. 제가 원래 연극 전공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대극장 뮤지컬로 데뷔해서 계속 뮤지컬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언젠가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박훈 형이 연락을 했어요. ‘형이 하는 연극이 있는데, 네가 했으면 하는 역할이 있으니까 꼭 와서 한번 봐’라고. 그게 ‘모범생’의 종태 역이었어요.
 
그때 공연을 보고 너무 하고 싶어졌고, 2015년에 드디어 출연하게 됐죠. 하고 싶었던 연기를 실컷 할 수 있어서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지금도 ‘모범생들’ 팀이랑 계속 연락하고 자주 봐요. MT만 네 번 갔어요(웃음). 좋은 일 있으면 서로 다 챙겨주고. 좋은 기억이 너무 많은 작품이에요.
 
Q 예전에 ‘팬레터’ 컨셉 컷 촬영장에서 조용히 ‘태백산맥’을 읽고 계시던데요. 평소에 책을 많이 보시나봐요.
처음 서울예대에 입학했을 때, 다들 2~3년씩 연기공부를 하다 온 친구들인데 저만 체육을 하다 갑자기 들어온 거잖아요. 이 친구들한테 내가 너무 무식해보이진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즈음 한 교수님이 “책을 많이 읽으면 무대에서 빛나 보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걸 듣고 ‘내가 너무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채로 학교에 다니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수업은 안 들어가고 도서관에서 살면서 책을 많이 봤어요. 도서관 가면 권장 도서가 쭉 있잖아요. 그 중에서 일단 어려운 사람의 책을 좀 읽어보자, 해서 몇 권 읽었는데 재미있어서 또 다른 걸 찾아 보고, 다른 번역본으로도 읽어보고 그랬죠. 지금도 작품에 들어가면 우선 대본에 집중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자리를 잡으면 바로 읽고 싶었던 책들을 봐요.
 
Q 어떤 책을 보세요?
매일매일 달라요. 일단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을 제일 좋아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1등이에요. 그 작가의 책은 지금도 가끔씩 계속 봐요. 그리고 고전문학이 좀 힘들다 싶으면 요즘 나오는 소설들,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소설을 봐요.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짬짬이 읽고 있죠.
 
영화나 음악도 그렇지만, 책은 배우로서도 정말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알면 알수록 깊이가 있고, 스스로를 좋은 배우로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아닌가 싶어요. 전시회도 다니면 좋다고들 하는데 아직 그림에는 조예가 없네요. 딸내미들이 크면 같이 전시회를 다녀볼까 생각 중이에요.
 
Q 아빠가 된 후에 달라진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살다 보니 딸이 셋이나 있는데(웃음) 아이가 생기면서부터는 내 인생의 주체는 나야, 라는 생각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인생의 목적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고, 내 인생의 1순위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게 어떻게 생각하면 슬프긴 하지만, 또 그만큼 멋진 일도 없는 것 같아요.
 
혼자서 계속 배우를 했다면 그만뒀을 수도 있고, 힘든 시간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내 인생을 누군가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고맙죠.
 
그리고 딸들을 키우면서 사회성도 많이 좋아졌어요(웃음). 원래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같이 얘기하고 즐기는 걸 잘 못해서 항상 혼자 있었어요. 근데 딸 셋이 계속 조잘대는 걸 받아주다 보니 많이 좋아졌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왜 모여서 수다를 떠는지 잘 이해를 못했는데, 지금은 그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스트레스가 풀려요.
 
예전에 대극장 뮤지컬을 할 때는 제가 항상 동생들을 혼내는 입장이었어요. 사람이 많으니까 군기를 잡는 역할을 제가 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들을 요즘 만나면 저한테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요. 무섭고 독기 가득했던 얼굴이 없어지고 많이 순해지고 좋아졌다고. 스스로도 그걸 많이 느껴요. (문)근영, (박)정민이랑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할 때는 배해선 선배가 저보고 며칠간 딸을 보지 말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제가 맡은 티볼트가 악한 인물이어야 하는데 자꾸 눈에 사랑이 넘친다고(웃음). 그렇게 자꾸 사랑이 충만해지는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 혹은 바람이 있다면.
일단 제 인생의 목표는 가족을 부양하는데 흐트러짐이 없이 늙을 때까지 배우생활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려면 일단 다방면으로 열심히 해야겠죠. 그 와중에 가족들을 잘 보살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좋은 작품을 바라보는 혜안도 있어야 하고. 그래도 어쨌든 가장 큰 소망은 딸들 건강하게 잘 키우고, 행복하게 배우 생활 하면서 가족하고 잘 사는 거에요.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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