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롤로지’ 이주승 “데이비에게 좋은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덜 외로웠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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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배우를 만나 그의 인생과 무대 위 캐릭터에 대해 인터뷰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다. 지난 17일 만난 배우 이주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난 4월에 개막한 연극 ‘킬롤로지’에서 끔찍한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소년 데이비를 연기한다.
 
이 작품에는 상대를 잔인하게 죽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온라인 게임 'Killology'의 개발자, 게임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된 소년, 그리고 소년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3인극이지만 1인극 같은 독백과 현실과 과거, 환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전개가 눈길을 끈다. '킬롤로지'는 표면적으로는 폭력적인 게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 시스템, 부모의 부재로 인한 상처 등 여러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참여한 배우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많은 양의 독백. 그 안에 담고 있는 밀도 높은 텍스트를 집요하게 탐구해 세상의 빛을 본 한 소년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을까?

Q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이 작품을 거절했다고.
연극은 군대 가기 전 참여한 허진호 감독님의 ‘낮잠’이란 작품 이후 이번이 8년 만이다. 그동안 간간이 연극 출연 제의는 있었지만 타이밍이나 여러 가지가 맞지 않아서 무대에 서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번에도 연극이 너무 오랜만인 데다가 대본을 보고 ‘이 방대한 독백을 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됐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걸 하지만 않으면 어떤 것에 지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참여를 결정했다.
 
Q 처음 대본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 대본을 보고 ‘이게 뭔가’ 싶었다. 9살 꼬마가 나오는데, '나한테 9살 역할을 준 건가?' 싶고. 읽다 보니 이야기들이 흩어져 있지만, 나중에 묘하게 합쳐지더라. 도대체 이 작품의 작가는 ‘독백을 무슨 생각으로 썼을까?’ 독백 사이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대본을 보면서 다시 앞 장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몇 번씩이나 반복했다. 나중에 연습 때 들으니 “다른 선배님들도 그랬다”고 하더라.
 
Q 연습실 분위기는 어땠는지, 테이블 작업을 오래 했다고 들었다.
대본을 보면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 단어나 문장은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렸다. 독백은 처음에는 분량 때문에 걱정했지만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오히려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사들이 입에 붙고 입으로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있으니까 잘 외워졌다.

개인적으로 반복되는 삶을 싫어하는 스타일인데, 하루 8시간씩 연습실에 갇혀 있으니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갔다. 연습을 거의 두 달 동안 했는데 그 두 달이 평생 같았다.

연습실 분위기는 완전히 우울했다. 한 마디로 라이터를 켜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웃음). 연습실 바닥에 가스가 흐르는 것처럼 차가웠다. 형님들과 서로 눈이 마주치면 한숨부터 나왔다. 연습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면 다들 모여서 “어떻게든 올렸으면 좋겠다” 그러고. 각자 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초반에는 힘들었다. 혼자만의 싸움이니까 다 같이 있는데도 외로웠다. 공연이 올라간 지금이야 완벽한 무대와 음향, 조명이 있지만 연습 처음에는 '이 작품이 정말 무대에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Q 연습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저는 모든 이야기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고 있는지 그게 분명하지 않으면 연기할 때 굉장히 어려워하는 쪽이다. 배우로서 연기하는 목적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데이비가 사랑하는 강아지 메이시를 싸움 붙이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최악의 랜달에게 데이비가 “좋아”라고 한다. 그런데 저한테 그 말이 진짜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데이비는 그 말을 긍정의 뜻으로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넌 그렇게 할 거잖아”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 대사가 ‘데이비가 진짜 할 수 있는 말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 “좋아”라는 말은 아무리 감정을 잡아도 잘 안 돼서 나중에 연출님을 설득해서 바꾸기로 했다. (플디: 실제 무대에서는 “그래 그렇게 해”라고 한다.)
 
Q 데이비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다. 표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왜 굳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서 그런 상황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데이비가 메이시를 죽게 내버려 두는 이유를 찾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데이비를 미워했다. 그래서 데이비를 표현하기 싫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연습실 가서 아무 영혼 없이 대본만 읽고 오다 집에 온 적도 있었다.
 
‘데이비가 좀 똑똑하게 머리를 굴려서 그 상황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연출님이 “데이비가 메이시를 데리고 나간 것은 그전에 메이시가 날 지켜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어차피 랜달 마음대로 선택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데이비에 대한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다. 그렇지만 완전하게 풀린 건 아니다.
 
메이시가 죽은 다음에 데이비의 삶도 변했다. 메이시가 죽고 데이비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놓아 버린 것 같다. “나는 어차피 좋은 사람이 되기는 글렀고, 강하게 살 거야. 강자가 돼서 약자를 괴롭히면서 쓰레기처럼 살 거야. 어차피 날 사랑해주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나한테 관심도 없잖아” 이런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살다가 애한테서 자전거를 빼앗아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린다.

데이비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의 시작은 자기가 메이시를 지켜주지 못한 거에서 오는 죄책감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전에 어른들의 책임이 있다. 엄마, 아빠의 관심과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Q 8살짜리 아이의 자전거를 빼앗아 도망칠 때, 데이비는 어떤 감정이 든 건가.
어떤 한 아이의 아빠를 봤는데 자신의 과거가 떠올라 마음의 동요가 일었던 것 같다. 데이비가 위험에 처했을 때, 아이의 아빠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친구 이러지 말지”하는 것처럼 알란이 날 지켜줬다면, ‘난 이렇게 살지 않았을 텐데’라고 그 상황에 자신을 대입한 것 같다.
(플디: 만약에 그때 아버지가 데이비의 손을 잡아줬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음, 손을 잡아줬더라면 그건 솔직히 모르겠다. 친구 잘못 만나서 랜달 패거리처럼 살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데이비가 최악의 상황은 똑같다 하더라도 그 옆에 좋은 친구 한 명만 있었어도 덜 외로웠을 것 같다. 
 
Q 후반부 환상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고 연기하는가.
데이비는 극 중에서 9살, 13살, 16살, 24살 순으로 나온다. 24살은 병원의 포터가 되고 아빠를 다시 만나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데이비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안타까운 것 같다. 포터가 된 24살의 데이비 이야기는 저는 환상이라기보다 다른 차원의 어떤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데이비가 죽을 수도 있던 상황까지는 똑같지만 정말 운이 좋게 경찰이 그곳에 들이닥쳐서 살아남은 데이비를 표현하려고 했다. 데이비가 그 사건을 통해 좀 더 성장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빠에 대한 증오도 있고 짜증도 나고 아파서 다시 만난 아빠가 불쌍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여 아빠에게 애증이 있는 데이비로 표현하려고 했다. ‘날 버리고 갔는데 좀 좋은 어른이 돼서 잘 살지. 왜 아픈 건가’라는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9살 이후에 보지 못한 아빠를 굳이 집으로 데리고 와서 7주 동안 돌봐 드린다는 게 나라면 못 했을 것 같다. 데이비는 메이시가 죽었을 때 후회했기 때문에 아빠가 죽는다면 또 후회가 남을 것 같아 '내가 돌봐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Q 모든 역할이 더블 캐스팅이다. 다른 배우들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먼저 같은 역할의 장율 형은 데이비에게 뜨겁게 접근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에 비교하면 차가운 편이다. 데이비가 죽고 나서도 장율 형은 친절하고 살가운 아들로 표현한다. 실제 성격이 나오는 것 같다. 장율 형은 실제로도 정말 착하다(웃음). 저는 여전히 아빠한테 미운 마음이 많이 남아 무뚝뚝하고 짜증도 내고 그렇지만 아픈 아빠를 돌봐주는 그런 아들이다. 
 
우리끼리 이야기하는데 이석준 선배님, 이율 형이랑 저는 영 팀이고, 김수현 선배님, 승대 형, 장율 형은 올드보이 팀이다. 영 팀은 같은 역할의 상대 역과 비교해서 나이가 좀 어리다(웃음). 올드보이 팀은 뜨겁다. 후끈후끈하고 정석 같은 느낌이다. 그에 비해 영 팀은 조금 비뚤어진 느낌. 이리저리 튕겨 오르는 탁구공 같다.
 
Q 고등학교 때부터 단편 영화를 찍으러 다녔다고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기였다. 그때 놀이공원에서 아무한테나 막 명함을 주고 그랬다. 나도 하루에 명함을 5장을 받았다. ‘내가 잘 생겼나?’ 이런 생각도 잠시 해보다가,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보자’ 싶어서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필름메이커스라는 영화 사이트에 등록하고 영화감독님들께 연락을 많이 돌렸다. 고등학교 때 거의 매일매일 단편 영화 찍으러 다녔다. 영화 촬영도 재미있었고, 처음으로 연기로 일을 해서 이만 원을 벌었다. 엄청 뿌듯했다. 그리고 관련 학과로 대학교에 갔지만 하루에 몇 시간씩 갇혀 있고 반복되는 게 싫어서 1년을 다니다 그만뒀다.
 
Q 이십 대 이후 거의 쉬지 않고 활동했다.
군대 가는 동안 빼고는 1년 이상 쉰 적이 없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뭔가 도태되는 느낌이다. 규칙적이고 반복되는 삶을 싫어하는 데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잘 맞는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살아 보니까 흥미롭다. 그런데 또 안 맞는 면도 있다. 배우의 삶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또 다음 일을 구해야 하니까. 뭔가를 계속해야 하는 성격이라 집에서 무조건 나간다. 집이 세상 편하다는 사람들이 부럽다.

Q 어릴 때부터 많은 현장에서 선배 배우들을 봤을텐데, 롤모델이 있다면?
이성민 선배님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선배님은 현장을 여유롭게 즐긴다. 옆에서 볼 때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그런 것들을 배우고 싶다. 연기를 잘해서 인정받는 배우가 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현장을 즐기지 않고, 재미있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한 배우가 돼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반대로 배우로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역할이 중점이 되지 않아도 되는 장면인데 나서서 하는 배우는 되고 싶지 않다. 작품을 서바이벌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 한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작품의 흐름도 깨지고 현장 분위기도 좋지 않게 된다.
 
Q 나중에 '킬롤로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 같나.
 '킬롤로지'를 일 년에 한 번씩 다른 배우들이 했으면 좋겠다. 배우에게 공부가 되는 작품이다.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는 없지만, ‘막상 하면 되는구나’라고 느낄 것이다.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이 공연을 올렸으면 좋겠다. 초연을 한 사람이 저니까 나중에 저한테 조언을 많이 구하러 오면 좋겠다(웃음).
 
글: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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