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림·설렘·짜릿함, 이 맛에 배우 인생 사는 것 아닐까요” ‘아이언 마스크’ 이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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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국내 초연한 뮤지컬 ‘아이언 마스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총사’의 은퇴한 후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지난해 체코에서 세계 초연한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산들, 이창섭 등 젊은 배우들과 이건명을 비롯하여 중장년 배우들이 만나 시너지를 내며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이 옷, 이상하지 않나요”라며 쑥스럽게 웃으며 등장한 이건명은 러브 미라는 사랑스러운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유쾌, 발랄하게 촬영에 임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는 뮤지컬 ‘아이언 마스크’ 무대 위 달타냥의 모습처럼 우직하고 꾸밈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뮤지컬 ‘아이언 마스크’에서 자신과 비슷한 연령대의 캐릭터를 만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연기할 맛이 난다는 이건명은 소극장, 대극장, 라이선스, 창작 뮤지컬 할 것이 없이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이십 년 넘게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열정의 원천은 무엇일까?
 
 
Q. ’아이언 마스크’ 연습 때, 이 작품에 대해서 “석양의 모습과 닮은 작품이다”라고 이야기하셨죠. 한참 본 공연 중인데 요즘 느낀 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연습 때 이 작품은 “해가 떨어지기 전 빨갛게 불타오르는 모습이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것처럼 이번 작품에선 은퇴한 총사들의 가슴 뛰는 열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었죠. 그런데 석양의 빨간 정도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빨갛고 이글이글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이 작품 들어가기 전에 염려했던 게 있어요. 뮤지컬 관객들은 젊은 여성분들이 대다수인데, 우리 작품은 석양의 분위기와 같은 중후한 남자들의 이야기예요. 중후하다고 이쁘게 표현해서 그렇지,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늙은 남자들의 이야기죠. 이게 과연 젊은 여성분들에게 어떻게 다가설 수 있을까? 저는 중년의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연습하면서 감동받아서 마음이 울컥할 때가 많았는데요. 과연 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우리 작품을 보고 감동할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하지만 그건 제 기우였던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때 무대 위 벽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형님 세 분(아라미스, 포르토스, 아토스)이 무대 앞으로 나가는데 그 순간 특히 제 가슴이 뜨거워져요. 그 연배의 배우들이 커튼콜에서 마지막에 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이 제 기억에는 별로 없거든요. ‘형님들도 이런 무대가 그리웠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까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Q. 그런 우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선택한 결정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런 경우가 제 인생에 없을 것 같았어요. 47살의 이건명이 9명의 형님을 모시고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그게 저를 이곳으로 이끈 가장 큰 이유예요. 또 형님들과 함께 형님들 나이대, 제 나이대의 캐릭터를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의의는 충분한 것 같아요. 물론 많은 관객의 사랑도 많이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이 작품에서 제가 배우들 중에 중간 나이이다 보니 형님들 분장실에도 들어가고 어린 친구들 분장실에도 놀러 가서 자주 이야기를 하게 돼요. 그런 것들이 되게 새롭고 색다르고 재미있어요.
 
Q. 다른 작품에서는 선배인 경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의지할 수 있는 선배님들이 많아서 든든했겠네요.
든든하죠. 그런데 모든 상황이 양면이 있으니까요. 든든한 만큼 실제 상황에서는 불안감도 없지 않아 있었어요. 형님들이 연세가 있다 보니 아주 가끔 가사를 깜박깜박도 하시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있고요(웃음). 가사는 틀려도 괜찮아요. 예를 들어 오렌지 주스가 원래 대사라면 그냥 주스라고 해도 되고, 이 차가운 거라고 해도 되고, 말 안 하고 손가락질만 해도 돼요. 이야기는 다 통하니까요.

그런데 칼싸움은 틀리면 안돼요. 실수하면 사람이 다쳐요. 그것도 세게 다쳐요. 우리가 공연에 사용하는 칼이 진짜 펜싱 칼이에요. 끝만 동그랗게 만들었지 실제 칼이죠. 저도 '삼총사' 때 눈이 찢어진 적 있었고요. 그래서 연습 때도 그렇고 공연 전에 우리가 맨날 이야기하는 게 가사를 까먹으면 잠시 쪽팔리면 되는데 칼싸움을 틀리면 이건 돌이킬 수 없다고 이야기해요. 정신 바짝 차리고 해야 해요. 그런데 정신을 안 차리려고 안 차리는 게 아니라. 이게 정말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거든요. 형님들이 너무 든든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어요. 지금까지 공연 잘 올렸는데 남은 공연도 큰 탈 없이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Q. '아이언 마스크'가 삼총사들의 은퇴한 뒤의 이야기라 여러 번 참여하셨던 ‘삼총사’라는 작품을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고 했지만 제가 연기했던 ‘삼총사’의 아토스와 ‘아이언 마스크’의 달타냥은 너무 닮아 있어요. 총사대장이라는 위치, 남들에게 절대 말하지 못할 사랑의 아픔까지도요. ‘삼총사’에서 달타냥은 총사가 되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이었죠. 달타냥은 아토스를 굉장히 따랐어요. 그래서 달타냥은 당연히 아토스를 총사 롤모델로 삼았을 거예요. 그러니 달타냥은 아토스와 굉장히 많이 닮아 있었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예전에 했던 아토스를 굳이 버리려 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기억이 나면 나는 대로 기억이 나지 않으면 안 나는 대로 달타냥을 만들면 그 안에는 아토스가 자연스럽게 묻어 있을 거예요.

Q. ‘아이언 마스크’가 앞으로 어떤 의미로 남을까요?
'아이언 마스크'가 수정, 보완돼서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서 '삼총사'가 10년 한 것처럼 롱런해줄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공연이 계속 지속된다면 형님들에게도 무대에 대한 열정을 풀어줄 수 있는 장이 마련되는 거잖아요. 저에게도 꿈꿀 수 있는 소중한 무대로 남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제가 ‘삼총사’에서 아토스를 했기 때문에 저도 인간인지라 자연스럽게 아토스의 모습에 눈길이 많이 갔어요. 그래서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더 들고 세상을 더 안 후에 아토스를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때 원래 삼총사 멤버들이 다 모이면 좋을 것 같아요. 5년 후만 돼도 저나 (신)성우 형이나 (민)영기 형이나 다들 나이가 50대가 넘어가니 그때가 되면 연기하는 우리도 보시는 관객들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막 신이 나요. 이건 정말 실현 가능한 꿈일 것 같아요.
 
Q. 과거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다, 10년도 더 된 사진을 봤는데 그때와 변한 것이 없어요(웃음).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젊어 보이려고, 20대 비주얼과 똑같이 만들고 싶어서 운동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체력을 유지하려고 운동하는 거예요. 무대는 감성 싸움이기도 하지만 체력 싸움이기도 하거든요. 감성이 아무리 충만해도 그걸 표현할 수 있는 몸 컨디션이 되지 않으면 그날 무대는 그냥 망해요. 게다가 뮤지컬은 음으로 표현해야 하잖아요. 정확한 소리를 내야 나의 가장 불타오르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소리를 내지 못하는 컨디션이라면 말짱 꽝이죠. 커튼콜까지는 지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요. 그게 배우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 같아요.

Q. 이쪽 업계에서 젠틀하고 다정한 배우라고 칭찬이 많던데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쪽 사람들은 다 그래요. 워낙 독특한 사람이 많다 보니까 안 그런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요. 우리 작업은 단체 작업이잖아요. '아이언 마스크'도 스태프까지 치면 한 백 명 될 거예요. 거기서 나 혼자 튀려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 돼요. 종종 후배들에게 “주인공이 연기만 잘하면 주인공인 것 같아? 아니야 주인공은 팀을 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야”라고 이야기해요.

주인공은 팀을 막 자기 마음대로 끌고 가라고 하는 게 아니라. 팀의 분위기를 띄워줄 수도 있고, 뭔가 구멍이 나면 그 구멍이 왜 생겼는지 바라볼 수도 있고, 무대 위에서도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그 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주인공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감사하게도 주인공 생활을 꽤 하다 보니까 그런 게 몸에 배어 버린 것 같아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니라 제 주변에 저랑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은 다들 그래요. 저만 다정하고 젠틀한 거 아니에요.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돼요(웃음).
 
Q. 4-5년 전부터 일본 활동도 활발히 하셨잖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미스 사이공’ 한 후에 ‘잭 더 리퍼’ 섭외가 들어왔어요. ‘잭 더 리퍼’에서 살인마 잭 역할이라는 거예요. 저는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비련의 주인공, 착한 사람, 아픈 사람 이런 역할만 많이 했거든요. 새로운 역할이라 호기심도 생기고 원래 하려던 다른 작품이 취소되는 바람에 시간도 생기고 우연히 참여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게 ‘삼총사’와의 인연을 만들어줘서 ‘삼총사’에 출연하게 됐고, 그 두 작품이 일본 무대에 올랐고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팬덤이 생기고 그래서 제 이름의 콘서트까지 열게 된 거예요. 인생이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 바로 이웃나라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내 이름을 걸고 콘서트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에요.

일본에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일본에 처음 콘서트를 하러 가서 어느 호텔에 묵었어요. 거기가 일본에서도 아주 고급 호텔이라고 하더라고요. 식사로 라멘을 배불리 먹고 산책하려고 숙소를 나왔는데 호텔 1층에 맥도날드가 보이는데 되게 낯이 익은 거예요. 그래서 길을 건너 호텔을 봤더니 제가 1993년도에 친구들이랑 일본에 놀러 왔을 때 묵었던 호텔인 거예요. 그때 일본인 여자친구가 있던 친구 덕에 여행을 왔는데, 자존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잡은 호텔이거든요. 호텔값으로  여행 경비가 다 들어가고 수중에 돈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그 호텔 1층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제일 싼 햄버거를 사 먹었던 풋풋한 추억이 있던 곳이거든요. 그런 곳에 내가 콘서트를 하러 와서 묶고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실감이 안 나더라고요.

Q. 지금이야 여러 무대에도 오르고 주인공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잖아요.
제가 이십 대때 뮤지컬 배우들 연봉이 100~200만 원 받던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시간 나면 무조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건축 현장 가서 막노동도 뛰고 가락시장 가서 짐도 나르고요. 그러니까 지금은 미친 듯이 행복해요. 내가 사랑하는 무대에서 꾸준하게 일할 수 있는데 왜 안 그렇겠어요. 그 당시에는 내가 소주가 아닌 맥주를 사 먹을 돈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해봤는데, 지금은 양주도 마실 수 있는 돈도 생겼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때는 그런 힘든 현실도 각오하고 뛰어들었어요. 작은 불안함도 있었겠지만 열정이 어마어마했어요. 낯간지러운 표현이지만 무대에 대한 사랑만큼은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어요. 가끔 힘들 때가 있어도 그건 작품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아픔 그런 것 때문이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어요.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려고 하잖아요. 저는 무대만 생각하면 행복했으니까 설사 다른 게 힘들었다 하더라도 힘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제가 진짜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아가씨와 건달들’이란 작품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보고 ‘나도 저거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이쪽으로 달려들었어요. 뮤지컬 배우를 꿈꾸면서 노래랑 춤을  배우고 서울예전 연극학과에 입학했고 졸업하자마자 꿈꾸던 ‘아가씨와 건달들’도 했고 이십 년 넘게 무대에 서고 있어요. 그러니 전 정말 행운아죠. 앞으로도 이순재, 신구 선생님처럼 저도 건강하게 오래 무대에 서고 싶어요.

Q. 이십 여년 동안 많은 작품과 만나고 이별했는데요. 돌이켜보면 어떤가요?
배우 인생은 항상 만남과 이별이 맞물려 있어요. 만나고 떠나보내고 또 만나고요. 예전에는 작품 끝나면 힘들어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혼자 여행 가서 생각 많이 하고 나만의 의식 같은 걸 치렀는데 요즘은 지금 이 작품과 헤어져도 그다음 해에 다시 만나잖아요(웃음). 다음을 기약하다 보니까 예전만큼의 헤어짐의 아쉬움은 덜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어떤 작품, 어떤 역할이든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새롭고 반가워요. 대본이 처음 나에게 와서 그것을 열어볼 때의 두근거림, 첫 공연의 설렘, 마지막 무대 인사의 짜릿함. 배우 인생, 이 맛에 사는 거 아닐까요?

글: 강진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jini21@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 플레이디비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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