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 살 청년의 우직한 무대, ‘에쿠우스’ 안승균
- 2018.10.18
- 박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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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는 7마리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을 중심으로 신과 인간, 금기와 욕망, 본능과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지난 11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안승균은 “알런처럼 무언가에 정말로 빠져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정작 이어진 이야기는 연기에 푹 빠져 치열한 청춘을 보내고 있는 그의 일상을 어림짐작하게 했다. 연기를 배우기 전 스트릿 댄스를 췄다는 그에게는 머리 굴리지 않고 몸으로 세상에 부딪혀가는 사람의 우직함이 느껴졌다. 총명한, 그러나 약삭빠르지 않은, 자기만의 깊은 우물을 품은 듯한 이 배우의 미래가 더 궁금해졌다.
Q 관객으로서 처음 ‘에쿠우스’를 접했을 때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처음 본 게 2014년 이해랑예술극장에서였는데, 그 때 느꼈던 공연은 ‘에너지’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 처음 보는 특이한 형식의 연극이었고, 알런이라는 역에도 큰 매력을 느꼈고요. 보자마자 바로 호기심이 발동돼서 예술의전당 영상자료원에 가서 옛날 영상도 찾아보고, 희곡도 다시 한 번 읽어봤어요. 열정과 호기심을 많이 불러일으켰던 공연이었어요. 특히 1막 마지막에서 알런이 말의 눈을 찌르는 장면이 충격적이었어요. 극 초반에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있다 보니 그 장면이 직접 시연될 줄은 몰랐는데, 대사가 아닌 행동으로 바로 보여지니까 강렬했죠.
Q 그 작품에 올해 드디어 출연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생각과 달랐던 점들은 어떤 게 있었나요.
‘에쿠우스’는 정극이고, 대사가 굉장히 많은 연극이잖아요. 이 작품이 이렇게 오랫동안 공연된 이유가 분명히 있고, 이 공연만의 스타일과 형식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제가 그런 부분을 소화하는 데 있어 부족하다는 게 많다는 걸 느꼈어요. 가장 컸던 부분은 발성을 비롯한 여러가지 기본기였고요. 전 이렇게 소리를 내는 걸 처음 해봤거든요. 처음에는 알런의 감정에 대한 명확한 공감과 해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소리를 내니까 목이 가버리더라고요. 저희 연출님(이한승 실험극장 대표)이 엄청 열정적이고 순수하신 분인데, 그 순간순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선배님들도 많은 팁을 주셨고요. 많은 자극을 받았죠.
Q 출연을 결정할 때 노출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부담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저도 노출이란 걸 처음 해봤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되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노출 장면에는 분명히 연출님과 작가의 의도가 있다고 믿었어요. 저도 관객으로서 공연을 본 적이 있고, 그 장면을 볼 때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이 작품이 본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제로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옷을 벗고 하잖아요. 그 자체를 그냥 보여주는 거니까, 부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의도를) 믿고 따랐어요. 관객 분들이 혹시 처음 이런 연극을 보셔서 불편해하시거나 놀라시지만 않는다면, 배우로서는 여기서의 노출이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Q 알런의 장면을 세세히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역시 1막 엔딩 장면이에요. 저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내가 알런처럼 무언가에 온 몸을 다 바쳐 사랑하고 흠뻑 빠진 적이 있었나? 없었거든요. 그 마음과 그 감정을 표현하는 건…지금도 늘 고민해요. 무언가에 숭고하게 집중하고 몰입한다는 것, 정말로 빠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 진심과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그 장면이 가장 어려워요.
‘본능’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이사트의 대사에도 ‘원초적’, ’원시의’ 같은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극 안에서 본능과 이성이 계속 충돌하잖아요. 어른들의 거짓말, 합리화, 순응, 이런 것들이 다 이성의 편에 속하는 것이고요. 알런이 믿고 경외하는 에쿠우스라는 신이자 말의 존재가, 또 극 중에서 (배우가) 동물로 분장해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굉장히 본능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물론 말들도 채찍질을 통해 본능이 억제되기도 하고, 알런도 그런 가정 환경에서 자라긴 했지만.
사실 본능과 이성의 충돌은 실제로 일상에서 많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여기선 사건이 더 극대화되긴 했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잖아요. 사람들이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현실에 순응하고, 그러면서 본능이 무너지고. 그런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Q 알런이 말들의 눈을 찌른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셨나요.
그 장면을 연기하면서 늘 감정이 달라져요. 그래서 그날그날의 제 충동을 믿는 편이긴 한데, 단순하게는 알런이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것 같아요. 충동적인 행동, 혹은 순수해서, 죄책감 때문에 저지른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알런은 회의를 느낀 것 같아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계속 본능과 이성이 부딪히면서 갈등이 일어나는데, 사실 알런의 성적 욕구도 자연스런 ‘본능’이잖아요. 그런데 말들이 지켜본다는 이유로 그 본능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에 대해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고 생각해요. 이게 맞나? 이게 뭐지? 신이 왜? 하고.
사실 알런이 뭘 알겠어요. 정상과 비정상이 뭔지도 모르고, 보살핌도 제대로 못 받았고, 친구 하나 없는 아이잖아요. 그런데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경이롭게 여기고 사랑하는 그 신에게조차 버림받을까 봐 무서웠던 거죠. 그 때 회의감이 들었을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회의감이나 의심을 느끼는 순간 극단적으로는 자해를 하거나 자살을 하기도 하잖아요. 알런의 행동 또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Q 알런은 병원을 나간 이후 어떻게 살아갔을까요?
제 바람이기도 하지만, 전 알런이 되게 행복해질 거라고 믿어요. 어찌됐든 알런은 그 누구도 못해본 경험을 해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너의 온 몸을 다 바쳐서 무언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해봤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자신을 솔직히 다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알런은 분명히 다이사트라는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사람을 만났고, 이후에도 자주 만나면서 어쩌면 같이 여행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카우보이가 돼서 이제 정말로 말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카우보이는 알런에게 말 다음으로 경이롭고 자유로워 보인 존재였으니까요.
고등학교 때 연극과 선배들이 공연한 연극을 봤던 순간 같아요. 그 때 연극이란 걸 처음 본 건데, 슬픈 연극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그 자체로 너무 멋있어서 커튼콜 때 막 울었어요.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까지 스트리트 댄스를 췄고, 춤으로도 무대를 많이 서 봤지만, 춤과는 또 너무 다르더라고요. 경이로웠고,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막 생겨났어요. 그때 예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 연극을 보고 나서 연극과로 전과를 했어요.
이 일(연기)을 하면서 성격도 좀 바뀌었어요. 원래 운동 말고 친구 관계나 다른 면에서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고 성격이 되게 급했는데, 많이 차분해졌어요. 사교성이나 친화력도 많이 생겼고요.
Q 많은 사람을 만나서 부대껴야 하는 일인데, 그런 것들이 힘들지는 않았나요?
네. 신기하게도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런 게 힘들지 않았어요. 일의 힘인 것 같아요. 그리고 중간에 깨달은 것들도 있었고요. 제가 재수를 했는데,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동기들과 아예 안 어울렸어요. 선배들이 뭘 시켜도 ‘전 알바가야 됩니다’하고 가버려서 욕을 먹기도 했거든요. 근데 그때 한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마음의 벽을 열 필요가 있다. 경험해봐라”였어요. 너무 존경하는 분이라 그 말을 믿고 바뀌려고 노력했어요. 그 벽을 허물고 나니까 정말 다 배울 점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때부터 좀 유연해졌어요.
어려운데요? 만약 저를 다 알 수 있다면 연기의 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음…제 입으로 얘기하긴 좀 민망하지만…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넌 참 단단하다, 열심히 산다, 독하다는 말이요.
Q 어렸을 때부터 그랬나요? 그 단단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어렸을 때부터 그렇지는 않았어요. 여러 경험을 하면서 여러 가지가 쌓였던 것 같고, 성인이 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더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끌려가거나 타인에 의한 선택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성인이 되면서 몇 번의 깨달음이 있었어요. 왜 남 때문에 이걸 선택했지? 왜 계속 남을 배려하려고 했지? 그런 걸 돌아보니 뭐가 됐든 사소한 거라도 내 자의로 선택했을 때 후회가 없고 행복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더 솔직해 지려고 하게 된 것 같아요. 나를 더 사랑하고 아끼자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래야 남에게도 더 진심을 말할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생기니까요. 제가 누군가에게 엄살을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합리화를 했던 순간들이 기억나고 깨닫는 순간 굉장히 공허하더라고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해야 주변에 좋은 사람이 더 많아지고 그걸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것 같아요. 때로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과 내가 맞지 않는 거죠. 예전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그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 걸로 나를 자책하고 싶지는 않아요. 자책하려고 하면 할 게 너무 많잖아요.
Q 스스로에게 엄격한 편일 것 같아요.
네, 약간 그래요. 완벽주의까지는 아닌데 후회하기 싫으니까. 후회라는 게 너무 아파요. 근데 계속 바뀔 거에요(웃음).
Q 연극과 병행해서 드라마, 영화 작업도 계속 해오셨잖아요. 무대에서만 느끼는 희열은 어떤 건가요.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드라마나 영화도 확실히 그만의 재미가 있어요. 근데 연극은 쌩 라이브잖아요. 시작하면 멈출 수 없고, 호흡도 길고, 누군가와 마주하면서 생동감 있게 살아있음을 보여줄 수 있고요. 그리고 저는 연습 과정이 그렇게 재미있어요. 다른 배우 분들과 피땀 같이 흘리면서 지지고 볶으면서 같이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연극만의 매력 같아요. 좀 더 가족적이고 정이 오고 가는 재미가 있어요.
Q 닮고 싶은 사람, 혹은 배우로서의 롤모델이 있나요?
딱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건 없지만, 제가 직접 겪은 사람들 중에 사람 대 사람으로 너무 존경하는 분들이 많아요. 제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분명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좋아요. 그런 분들께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직업이 없더라도 열심히 산다면 멋있는 것 같아요. 희망적이잖아요. 또 그런 분들이 보통 선하고 아낌없이 베푸시는 것 같고요. 좋아하는 선배님들을 보면서 그런 것들을 어깨 너머로 많이 배워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요.
보고 있으면 편안해지는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건 말하지 않아도 온전히 몸으로 느껴지는 거잖아요. 같이 있으면 너무 좋고 편안한 사람, 또 제가 무대에 서거나 브라운관에 나왔을 때 보는 사람에게 편안함과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 사람으로서도, 배우로서도.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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