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으로 펼쳐진 화가의 삶…'레드' 속 마크 로스코의 실제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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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정보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공연도 많지만, 미리 배경지식을 알고 가야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있다. 국내 다섯 번째 무대로 돌아온 연극 ‘레드’는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제64회 토니어워즈에서 최다 수상작의 영예를 안았던 이 공연은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꼽히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생애 중 한 시기를 재구성한 2인극이다. 팽팽한 긴장과 지적 희열이 어우러진 대사, 커다란 캔버스를 붉은 빛으로 채우는 배우들의 역동적 몸짓, 신구 세대를 아우르는 진한 감동을 담은 이 연극을 십분 즐기려면, 먼저 마크 로스코에 대해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과연 어떤 예술가였는지, 연극 ‘레드’는 그의 생애 중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췄는지 관극 전 잠시 들여다보자.

오직 예술에서 위안을 구했던 처절한 이방인
마크 로스코는 러시아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열 살이던 1913년 “영어로 말할 수 없어요”라는 표찰을 목에 걸고 미국 행 기차를 탔다. 그의 부모가 당시 러시아에 퍼지던 반유대주의를 피하기 위해 이민을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스코의 아버지가 암으로 숨을 거뒀고, 로스코는 가난 때문에 학창시절부터 육체노동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로스코는 치열한 공부로 월반을 거듭한 끝에 19세에 예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뜻밖의 좌절을 겪는다. 당시 미국 주류사회까지 퍼진 반유대주의로 인해 예일대학교가 로스코의 장학금을 돌연 취소해버린 것이다. 로스코는 결국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곳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이방인이었던 그가 위안을 구한 곳은 오직 예술이었다. 그는 1923년 친구를 만나러 방문했던 한 미술기관에 등록해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행보를 걷게 된다.
 
마크 로스코와 그의 초기작(The Omen of the Eagle, 1942)

“나는 단지 기본적인 인간 감정들,
그러니까 비극, 황홀, 숙명 등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로스코는 서서히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쌓아 나갔다. 1935년에는 동료 화가들과 급진적인 예술가 집단 ‘더 텐(The Ten)’을 결성해 기성 미술계에 반기를 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그리스 비극과 관련된 그림을 그리며 동시대인들에게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비극성을 인식시키려 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 등의 근원적 감정을 전달하기를 원했고, 이를 특정 형상에서 벗어난 색채로 표현하는 작업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멀티폼 양식의 그림(multiform, 1948)

1946년, 로스코는 일명 ‘멀티폼(Multiform)’이라 불리는 양식의 그림을 그리면서 새로운 기점을 맞았다. 다양한 색채가 캔버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 그림들은 그가 구상에 대한 의무감에서 더 자유로워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 이 그림들은 보는 이에게 어떤 감동이나 드라마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로스코는 거듭된 탐구 끝에 1949년 드디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게 된다. 단 두 세개의 색채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로스코의 대표작이 이때부터 탄생한 것이다.
 
전성기의 작품(green-and-tangerine-on-red, 1956)

화려한 전성기, 그리고 비극적 죽음
거칠고 강렬한 색채로 완성된 로스코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한 편의 드라마처럼 정서적 동요를 일으켰고, 로스코는 전성기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열광했고, 1950년대 중반부터 로스코의 그림은 해마다 몇 배씩 높은 값에 팔려나갔다. 1961년 로스코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받았고, 같은 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까지 열었다. 그는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거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려움도 찾아왔다. 동료 예술가들은 그의 세속적 성공을 비난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계는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열광했다. 어느덧 로스코는 구시대의 예술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에게 오랫동안 정신적 위안을 주었던 두 번째 아내 멜과의 관계도 나빠졌다. 우울과 불안에 빠진 로스코는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의 어두운 색채를 점점 더 많이 사용했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는 1964년 평생의 소원이던 예배당 벽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 뒤 몇 년 후인 1970년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살했다. 
 
로스코가 벽화를 그린 예배당(로스코 채플)  

씨그램 벽화 사건과 연극 ‘레드’
전성기를 구가하던 1958년, 로스코는 ‘시바스 리갈’로 유명한 거대 주류 업체 씨그램으로부터 200만 달러 짜리의 작업을 의뢰받았다. 뉴욕 본사에 들어설 ‘포시즌 레스토랑’의 벽면에 걸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를 수락한 로스코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즐기는 상류층 사람들의 허위를 무너뜨릴 작품을 구상했으나, 이듬해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고 판단되자 곧장 계약을 파기하고 작업을 중단해버렸다.
 

연극 ‘레드’ 
 

연극 ‘레드’는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공연이다. 연극은 가상의 인물 ‘켄’을 통해 관객들을 로스코의 작품 세계로 안내한다. 로스코의 작업실에 조수로 들어온 켄은 로스코가 씨그램과 상업적인 작품 계약을 맺은 것에 의문을 품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 대고, 로스코는 그에 맞서 자신의 예술 철학을 웅변한다. 관객들은 피카소, 잭슨 폴록, 마티스, 니체 등을 오가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로스코의 치열한 작품 세계를 만나게 된다. 레드, 오렌지 등의 밝은 색채로 찬란한 생명의 힘을 캔버스에 담아냈던 그가 말년에 느꼈던 ‘블랙’에 대한 공포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진한 감동이 있다. 두 사람이 거대한 캔버스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는 장면도 압권이다.   
 

연극 ‘레드’는 내달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볼 수 있다. 
 

* 참고도서: <마크 로스코>, 강신주 지음, 2015년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출처: 신시컴퍼니, www.mark-rothk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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