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있다면 천천히 가도 괜찮아" 뮤지컬 무대로 돌아온 천만배우 진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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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도시’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에겐 ‘천만배우’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1600만 관객을 돌파한 ‘극한직업’을 비롯해 ‘돈’, ‘사바하’ 등의 영화에 줄줄이 출연 중인, 그러나 이미 그 전 오랫동안 연극과 뮤지컬 무대를 오가며 활약했던 배우 진선규에 대한 이야기다. 공연계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가 내달 1일부터 12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펼쳐지는 ‘나빌레라’의 주연을 맡아 ‘난쟁이들’ 이후 4년 만에 뮤지컬 무대에 오른다.

동명 웹툰이 원작인 ‘나빌레라’는 일흔을 앞두고 오랫동안 꿈꾸던 발레에 도전하는 노인 덕출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방황하는 23살의 발레리노 채록의 이야기다. 진선규는 이 작품에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레단에 들어가는 덕출을 연기한다. 원작을 보고 덕출이라는 인물에 깊이 공감했다는 그는 드라마 ‘킹덤’을 촬영하느라 연이어 밤을 샌 뒤 인터뷰 자리에 왔다면서도 작품에 대한 애정을 표하며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인터뷰 다음 날인 17일, ‘나빌레라’ 연습실에서 다시 만난 그는 발레를 통해 따스한 꿈과 위로를 전하는 노인 덕출로 완연히 변해있었다.

Q 일찌감치 덕출 역을 맡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작년에 우연히 원작을 봤는데, 보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너무 감동적이었거든요. 덕출이라는 인물이 너무 잘 이해돼서, 이 작품이 영화든 공연이든 다른 장르로 만들어지면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정말 작년 초에 이 작품의 출연 제안이 들어온 거에요. 제목만 듣고는 대본도 안 본 채 무조건 하겠다고 했죠. 그만큼 꼭 하고 싶었던 작품이에요.
 
Q 덕출의 어떤 마음이 그렇게 공감되셨나요.
덕출과 제 가치관이 굉장히 흡사하다고 느꼈어요. 덕출이 채록과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넌 아직 늙지 않았어. 재능도 충분해. 지금처럼 행복하고, 즐기면 돼”라고 말하는데, 그게 마치 저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 후배들한테 하는 말도 덕출과 비슷해요. 후배들에게 “형을 봐, 형도 늦게 됐잖아.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네가 즐겁고 행복하면 돼.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어. 너의 길을 가면 돼”라고 하거든요. 지금도 이 마음을 그대로 가져가서 70살 때 덕출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덕출을 말리는 주변 인물들의 마음도 다 이해됐어요. 그들이 나쁜 게 아니라 걱정돼서, 또는 효도하려는 마음 때문에 말리는 것이거든요. 저도 제 아버지가 69세인데 아버지가 발레를 한다고 하면 헛웃음이 나오고 걱정부터 했을 거에요. 그렇게 어떤 입장이든 다 이해되더라고요. 그리고 전체적인 작품의 느낌이 너무 따뜻했고요.

Q 발레 연습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캐스팅 된 후에 발레 연습을 먼저 시작했어요. 근데 발레 같은 클래식은 어렸을 때부터 몇 십 년간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태를 따라가기가 힘든 것 같아요. 다행히 덕출은 70세에 처음 발레를 시작하는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저는 두 달간 연습해서 무대에 올라가면 덕출과 흡사한 수준이 될 것 같아요(웃음). 발레를 정식으로 배우는 게 처음이라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힘들지만 재미있어요. 코어 근육을 많이 쓰고 안쪽 근육, 등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건강해지고요. 되려 채록이 역의 배우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에요. 채록은 발레리노 역할이니까.
 
Q 이번 작품은 70세 노인 덕출과 23세 청년 채록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대 차이가 큰 두 사람인데, 둘 사이에 어떻게 진정한 우정이 생겨나게 되나요. 
예전에 연극 ‘신인류의 백분토론’을 할 때 뇌과학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어요. 꼰대란 자기가 겪어온 상황과 잣대에 뇌의 인식 작용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이상 남의 것이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려하지 않고, 내가 맞다고 여기는 거래요.

근데 덕출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계속 생각해온 사람은 아마 꼰대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남을 이해하고 남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채록의 마음을 알아봐주고, 그가 겪는 힘든 과정을 같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또 발레라는 꿈과 공통 관심사가 있으니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연기가 옳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연기가 좋다면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연기를 하는지 이해하고 공유하고 싶고, 도전해보고 싶거든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마음을 열어놓고 살아가고 있어요.

Q 덕출이 채록에게 힘을 주는 존재인 것처럼, 진선규 씨에게도 계속 꿈을 꾸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준 존재가 있었나요.
와이프, (민)준호(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간다) 대표), 그리고 극단 간다의 친구들이요. 같이 팀을 만들고 연기를 하고 공연을 하면서 친구들이 “선규야, 너 잘 해. 걱정하지 마, 잘 될 거야”라는 말을 많이 해줬어요. 와이프도 “돈 좀 더 받는 거 해서 뭐해, 그냥 오빠 좋은 거 해”라고 해줬고요. 물론 저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어필을 했겠지만(웃음).
 
Q 관객들이 이번 공연을 보고 어떤 메시지를 받아가길 바라시나요.
꿈을 꾸고, 꿈을 갖고, 꿈을 위해 행동하는 열정을 품는 건 20대든 80대든 나이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것, 나이와 관계 없이 꿈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고, 그런 마음만 있다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요. 그게 이 작품이 가진 큰 메시지일 것 같아요.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희망을 향해서 같이 나아간다는 것,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둘보다는 여럿이 낫다는 것도.

Q 영화를 통해 인지도가 높아진 후에도 극단 간다에서 하는 지방공연을 꾸준히 하셨어요.
우선 영세한 극단의 생활비를 축적하는 데 도움도 되고(웃음), 극단 후배들한테 용돈도 될 수 있으니까 공연이 잡히면 무조건 해요. 요즘은 역으로 제가 출연하면 초청을 하겠다는 곳들이 있어서, 그렇게 되면 무조건 가겠다고 해서 최대한 하고 있어요.

Q 그렇게 공연의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영화와 병행하게 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밖에 있다가도 엄마 아빠 계신 집에 꼭 들어가잖아요. 쉬기 위해서, 충전하고 다음날 다시 또 밖에 나가기 위해서. 저도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전 공연계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별로 없어요. 그냥 영화를 잠깐 한 것뿐인데 영화가 잘 되니까 사람들이 제가 영화 쪽에 있다고, 영화를 하다가 공연계에 ‘돌아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근데 전 지난 달에도 지방 공연을 했고, 계속 공연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에요. 이런 창작 작업은 오랜만이지만. 영화든 공연이든 때가 맞으면, 그리고 좋은 작품이라면 하고 싶고, 특히 공연은 창작 위주로 하고 싶어요.
 
Q 덕출이 발레를 꿈꾸듯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제가 복싱을 너무 좋아해요. 나랑 싸우는 것, 내 한계를 이겨내는 것이 너무 좋더라고요.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게 있다기보다 복싱을 좀 더 일찍부터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은 있어요. 그리고 만약 제가 70세까지 계속 배우를 하고 있는데 그 때까지 멜로를 해보지 못했다면 꼭 해보고 싶어요(웃음). ‘파이란’이나 ‘너는 내 운명’ 같은.

Q 극단 간다 단원들과 함께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요.
지금은 좀 어렵겠지만, 예전에 준호와 ‘매트릭스’ 같은 액션을 연극으로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런 걸 하려면 더 젊은 배우들이 해야 하지 않을까(웃음). 준호와는 새로운 창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 극단 자체가 창작극을 많이 해왔고요. 장르를 떠나서 같이 창작극을 만드는 작업은 나이 들어도 계속 해나갈 거에요.
 

Q 지금 배우로서 가진 마음가짐 중에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천천히 조금씩 해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이요. 실력, 연기력만으로 따지면 젊은 나이에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천천히 쌓아가다 보면 나중에 그게 큰 힘이 될 수 있거든요. ‘너 지금 당장 이게 왜 안 돼’라는 말도 듣겠지만, 그런 말을 듣더라도 좌지우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빌레라’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사람이 언제 초라해지냐”는 물음에 “사람은 자기가 초라하다고 느끼는 순간 초라해진다”고 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만약 내 후배가 갑자기 너무 잘 되고 나는 3만원 받기 위해 공연을 하더라도 내 길을 가기 위한 과정이면 초라하지 않은데,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꿈의 질감이 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제가 출연한 작품이 잘돼서 인지도가 높아지더라도 다음 작품이 안 될 수도 있고, 또 잘 안 되는 작품에서 캐릭터를 맡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 했다면 모두 다 나를 한발 더 나아가게 해주는 과정일 수 있다는 마음가짐만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예전에 연기를 정말 못했던 배우고, 하나하나 단계를 거치며 내 길을 만들어왔다는 걸 잊지 않고, 앞으로도 조금씩 무너지지 않게 차곡차곡 쌓아가면 좋겠어요.
 

Q 좋은 배우란 어떤 사람일까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야, 여기선 네가 좀 더 욕심 내서 이기적으로 가져올 것 가져오고 (분량을) 따와야지’라고. 전 그걸 되게 못하는 배우였거든요. 근데 좋은 인성을 가진 배우라면 그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뭘 해도 결국엔 인정받더라고요. 배우든, 또는 뭘 하는 사람이든, 좋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 더 오래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Q 마지막으로,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나빌레라’ 공연 후에는 작년에 찍었던 영화 ‘롱 리브 더 킹’이 개봉할 거에요. 서예지 씨와 찍었던 ‘암전’이라는 저예산 공포영화도 곧 개봉하고, 10월부터는 영화 ‘승리호’ 촬영 들어갈 예정이고요.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서울예술단 제공, 배경훈(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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