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고 온전한 나로 존재하고 싶어요” ‘어나더 컨트리’ 문유강
- 2019.07.26
- 박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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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강은 현재 ‘어나더 컨트리’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열망하는 강직한 학생 토미 저드를 연기하고 있다. 지난 22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문유강은 기자가 던진 질문마다 신중한 표정으로 꽤나 긴 대답을 이어갔다. 자신이 맡은 인물의 행동 저변에 있는 심리를 깊고 폭넓게 들여다본 배우의 답변이었다. 또한 뒤이은 이야기에는 배우로서의 삶과 방향성에 대한 나름의 확고한 주관도 담겨 있었다. 깊고 차분한 사고와 그 이면에서 느껴진 따뜻하고 솔직한 감성, 이제 갓 데뷔한 이 배우의 이후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 이유다.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이건 내 생각이 맞아’하고 밀어붙이는 면이 좀 닮은 것 같아요. 자기만의 규칙,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라는 믿음 같은 거요. 제가 지금도 어리지만,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17세의 토미 같은 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좀 더 편협한 생각을 할 때도 있었고요. 근데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군대를 다녀오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한 지점들이 있죠.
근데 저드도 그럴 것 같아요. 물론 그는 자신의 신념을 좇아서 죽음까지 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깨우침이 있고, 이 작품 안에서도 저드가 변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베넷을 통해서 저드도 성장하고, 동성애자와 공산주의, 소수자에 대한 생각이 한 단계 변화하고 깨닫게 돼요.
사실 처음 대본을 공부했을 때는 ‘17살짜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라고 생각했어요. 17세에 그렇게까지 조숙하고 자기 신념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본인이 명확하게 어떤 선을 긋는다든가, 진심으로 상대를 달래 주는 성숙한 면들이 있고요.
그래서 저는 저드한테 어린 면도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완벽한 사람이잖아요. 죽음까지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곳(스페인 내전)에 가서 맞게 됐고요. 근데 그런 완벽한 인물도 어쨌든 17살이고, 가이 베넷한테는 좀 더 솔직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트웬티투(총학생회) 애들을 대하는 모습과 베넷을 대하는 모습이 명확히 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베넷 앞에서는 좀 흔들려도 될 것 같았거든요. 어리지만 조숙한, 조숙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저드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작품 속에선 없는 것 같아요. 굳이 꼽는다면 저드가 프리펙트(선도부)를 하기로 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산주의는 수단일 뿐이었다’고 폄하되는 것? 어떻게 보면 저드는 자기 자신이 가장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강하고 곧은 것은 어느 순간 부러질 수가 있잖아요.
Q 좀 아슬아슬한 느낌인 거죠?
네. 잘 휘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그래서 일찍 생을 마감했던 걸 수도 있고요. 또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엄청난 상실감이 들 것 같아요. 물론 그랬다면 또 새로운 것을 찾아서 인생의 경로를 계속 재탐색하겠지만, 만일 자신의 신념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면 그게 두렵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는 사실 저드가 커닝햄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도 저드가 지는 모습이 보였으면 좋겠어요. 물론 저드는 또래보다 훨씬 조숙하니까 (커닝햄의) 면전에 대고 불손하게 행동하거나 분노를 드러내지는 않아요. 도리어 웃으면서 자신이 한 수 위에 있는 듯 행동하죠. 그런데 사실 커닝햄 선생님도 병역거부를 할 만큼 강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고,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잖아요. 저드처럼 뚝심 있게 살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수없이 깨지는 시간을 겪어온 사람일 거에요. 그러니 그에게는 이 어린애(저드)가 고단수로 웃으며 응대하는 모습이 흥미롭게 보일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장면에서 저드가 좀 어린애 같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자기는 (커닝햄을) 이겼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제3자가 봤을 때는 그 한계치가 다 보이는 거죠. 분명 커닝햄은 나를 웃으면서 대했고, 나도 지지 않고 대응했는데, 대화가 끝나고 나니 뭔지 모르게 진 느낌, 찝찝함, 내 한계가 까발려진 느낌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원작에서 큰 비중은 아니고 흘러가는 정도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저드가 집에 있는 게 부모님께 방해가 된다는 말이 있어요. 달가워하시지 않잖아, 라는 말이 있어서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는 않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저드에게 트라우마로까지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워낙 이 친구는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냉소적으로 달관하며 거리를 두거든요. 심지어 자기가 프리펙트가 되려고 했다가 배신당했을 때도 웃어버리고 말아요. 세상은 원래 그렇게 멘지스 같은 애들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곳이라고요. 다만 그 결과가 베넷한테 갔을 때는 그게 베넷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좀 더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된다’고 충고하죠.
그렇게 이른 나이에 많은 걸 깨우친 저드라서 부모님과의 관계도 트라우마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서로 좀 냉소적이고 따뜻하지 않다 정도. 내면에는 아픔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게 겉으로 드러나거나 어떤 인물을 대할 때 그 부분이 건드려지거나 하는 지점은 없거든요.
제가 생각한 저드는 베넷이 남자만 있는 학교라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동성애)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베넷에게 “너는 엄마를 좀 본받아야 돼, 어떻게 하면 동성이 아닌 이성과 가까워질 수 있는지”라고 하잖아요. 베넷의 동성애가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 혹은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전 어쩌면 베넷이 (학생들에게 배신당한 후의 장면에서) 공포를 느낀다고 생각했어요. 체벌을 당해서, 프리펙트가 못 돼서 느끼는 분노도 당연히 있고 배신감도 있지만, 동시에 “내가 (하코트를) 진짜로 사랑하나 봐” 했을 때 정답이 나 버린 거죠. 와, 나 진짜 동성애자야. 그리고 앞으로 자기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물론 베넷들의 연기는 각자 다르겠지만, 같이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의 공포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리고 베넷의 감정을 외면하던 저드도 어느 순간 알게 돼죠. 그게 진짜라는 걸. 또 그 때 베넷이 마티노에 대해 얘기하잖아요. 마티노가 왜 죽었는지 아냐고. 저드가 생각하지 못했던, 마티노가 왜 죽었는지 그 본질을 알았을 때, 그리고 이게 나라고, 어쩔 수 없다고, 너라도 나를 인정해달라는 베넷의 말을 들었을 때 많은 생각이 오가거든요. 내가 공부했던 것들, 단정지었던 것들, 편협했던 것들이 한 단계 깨지는 것 같아요.
Q 차기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발레리나 김주원 씨와 함께 제이드(도리안)를 맡았어요. 어떤 작품이 될지 궁금한데, 요즘은 어떤 연습 단계인가요.
저도 궁금해요(웃음). 큼지막한 것들은 했고, 지금은 인물을 입체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에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아예 스핀오프 개념으로 (배경을) 2019년도로 가져 오는 거라 많은 부분이 원작과는 달라질 것 같아요. 연출가님과 작가님이 이 작품을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새롭게 보이는 것들을 담았어요. 지금 시대에서 바라보는 도리안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이런 지점들을 지금의 관점으로 재해석해서 표현하려고 부단히 땀 흘리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던 것 같아요. ‘어나더 컨트리’의 워튼 역 전변현이 제 고등학교 후배인데, 그 때 연극반에서 같이 공연도 하고 대회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때까진 단순한 즐거움이 컸다면, 대학에서, 또 군대에서도 계속 고민을 했어요. 왜 배우를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사실 (배우의 삶이) 일반적이지는 않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삶도 일반적이지 않게 될 수도 있고, 어떤 부분은 포기해야 되는 삶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런데도 왜 나는 그렇게까지 배우가 되고 싶은지를 생각하다가 전역하고 나서 나름의 답을 찾은 것 같아요. 물론 즐거움도 있지만, 화자로서 하고 싶은 말, 혹은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요.
학교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을 할 때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그걸 무대 위에서 딱 하게 되는 순간, 제가 하고 싶은 말과 작품 속 인물이 하고 싶은 말이 똑같은 순간이요. 그 순간이 너무 감사했고 좋았어요. 물론 앞으로 그런 순간이 안 올 수도 있죠. 또 배우가 꼭 어떤 메시지를 줘야한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어떤 영화를 보고 그 전까지 못했던 생각을 하거나 깨우친 적이 있던 것처럼 그런 지점을 배우가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것이 (배우가 되려는) 이유이지 않을까.
근데 또 중요한 건, 연기를 즐겁게 하고 싶어요. 물론 책임감은 느껴야 하겠지만, 고통스럽고 하기 싫은데 일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즐겁게요.
찾아가는 과정입니다(웃음).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사람들은 다 뭔가가 되려고 한다, 물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정말 자기 것이 아니면 힘들구나, 라는 생각이요. 저도 그랬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주위의 사랑과 인정을 받더라도 고통스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척’을 하면요. 근데 나도 뭔가가 되려고 하고 있구나, 하다 못해 친구들과 카페에 있는 순간에도 어떻게 보이려고 하고 있구나. 온전한 나로 존재하는 게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그걸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Q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상, 반대로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상을 얘기하신다면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솔직하고, 만나면 피곤해지지 않는 사람이요. 방금 얘기했던 거랑 똑같은데, ‘내가 이 사람한테 어떻게 보여야 하지’가 신경 쓰이면 피곤해요. 저는 남자든 여자든 형이든 누나든,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에너지가 맞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랑 에너지가 맞는 사람이 좋고 에너지가 다르면 좀 힘들죠. 근데 좀 가식적인 사람, 자꾸 뭔가를 입으려고 하는 사람, 그게 보이면 싫어하기보다 좀 불편해요. 솔직한 사람이 좋아요.
Q 스트레스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요즘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현재까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좋은 것 같아요. 그림은 도구만 있다면 언제나 할 수 있잖아요. ‘어나더 컨트리’를 같이 하는 최정우도 그림을 그려서 취미를 공유하고 있죠. 제가 초보자라 아직 엄청난 걸 담아낼 수는 없지만, (선을) 그리다가 다른 곳으로 튀었을 때 그 우연의 결과가 너무 예쁜 거예요. 너무 멋있는 척인가?(웃음) 그렇게 우연을 수습하고, 또 우연을 가장해서 다른 걸 그리다 보면 재미있고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어서 좋아요.
Q 올해가 개인적으로 특별한 해일 것 같아요. ‘어나더 컨트리’로 데뷔 무대에 올랐고, 그에 따른 생활의 변화도 많을 테고요. 요즘의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 같나요.
생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있지만, 저는 오히려 안 변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모든 게 감사한 요즘인데, 그것 때문에 제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이려고 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팬 분들을 만나도 저는 저이고 싶은 것 같아요. 당연히 생각은 변하고 환경도 계속 변하겠지만, 제가 어떻게 보이려고,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플레이디비DB,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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