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악역 완전 정복?’ 마성의 아재파탈 배우 박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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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파탈. 올해 돋보이는 신조어 중 하나다. 아저씨를 뜻하는 ‘아재’에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남성 ‘옴므파탈’을 덧붙인 말이다. 아재파탈의 조건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아재’스럽지 않은 깔끔한 외모와 패션감각은 물론이며 직업적 성공, 성숙한 인격, 유머감각까지 요구된다.

그런 조건에 견주어 볼 때 데뷔 20년차 배우 박호산은 아재파탈의 훌륭한 아이콘이다. 4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한 균형잡힌 체형, 늘 호평받는 연기력, 겸손한 인격과 ‘아재개그’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원티드>에서 겸손한 척 하며 악행을 일삼는 기업가 함태섭 역으로 출연하며 성공적인 TV진출 신고식을 치른 그가 다시 대학로로 돌아왔다. 연극 <도둑맞은 책>의 서동윤 역이다. 제자의 작품을 훔쳐 성공을 거머쥔 뻔뻔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이 보조작가 조영락에게 감금당한 후 치열한 심리싸움을 벌이는 스릴러물이다. 1시간 남짓 작품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난 후 어느새 박호산의 유쾌한 '아재파탈' 매력에 흠뻑 빠졌다.

 

“캐릭터 해석이 잘 맞아 분량도 늘어났죠.“
 
Q. 드라마 <원티드>가 끝나고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연극<도둑맞은 책>을 준비하고 계시네요? 올해만 벌써 여섯 작품째 출연이에요.
전 제가 몇 작품 했는지 잘 몰라요. 그냥 출연 제의 오면 마다하지 않다 보니 작품을 많이 한 것 같네요. 그 와중에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은 찾아가서 시켜달라고 졸라서 출연했고요. 보통 그렇게 제가 먼저 요청하면 페이가 작긴 하죠. (웃음)
 
Q. 목소리가 좋으시네요. 중저음에 신뢰감 있는 톤이에요.
그런가요? 배역 받을 때 목소리를 디자인하는 편이긴 해요. <원티드>의 함태섭 역도 그랬고요. 평소에는 이렇게 말하다가 작품에선 이런 목소리로 말하죠. (즉석에서 목소리 변화를 들려줬다. 디자인된 음성이 훨씬 울림이 컸다.) 함태섭은 뭐랄까 일반 기업인이랑 다르게 대외적인 걸 중요시하는 인물로 보였어요. 남에게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는 사람, 확실하게 하는 사람 같아서 또박또박한 말투로 연기했죠.
 
Q. 목소리 디자인이 잘 통한 걸까요? 드라마 작가가 출연 분량도 늘려줬다면서요?
음, 목소리보다는 캐릭터에 대한 생각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겸손 떨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인자한 척 하는 인물이 악한 속내를 드러내면 낙차가 굉장히 크게 느껴지잖아요. 함태섭을 그런 인물로 표현했는데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작가님이랑 잘 통했던 것 같아요.
 
Q. 올해는 악역 정복의 해인가요? <데블인사인드>의 칼 교수, <원티드>의 함태섭, <도둑맞은 책>의 서동윤까지 모두 악역이네요.
그러네요. 작년에는 계속 예술가만 했는데… 에릭사티, 김광석, 시인 민효석, 이중섭까지 이어지다가 근래에는 무게감 있는 악역들을 계속 했네요. 함태섭이 이중적인 악인이었다면 <도둑맞은 책>의 서동윤은 대놓고 악한 사람이에요. “다들 그렇게 살지 않아? 난 내숭떨지 않겠어.”이러면서 사는 사람이죠. 그래서 함태섭이 더 돈을 많이 번 것 같아요. (웃음) 한 차원 더 고수죠, 고수.
 
Q. 지난 재연에 이어서 <도둑맞은 책>에 다시 출연하시는 거잖아요. 서동윤이란 캐릭터에 대한 해석이 지난 번과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인물이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바뀐 부분은 없어요. 하지만 상대배우가 바뀌었잖아요. 2인극에 페어공연이니까 상대배우가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치죠. (조)상웅이가 연기하는 ‘조영락’의 느낌이 예전 배우들과는 사뭇 달라서 거기에 맞춰 제 캐릭터도 자연스레 바뀌더라고요.
 
예를 들면 조영락이 서동윤을 협박하는 장면이 있는데, 상웅이가 연기하면 더 구체적으로 겁이 나더라고요. 상웅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기운이 되게 선해요. 인상도 소심해 보이고 굉장히 예의바르잖아요. 그런 친구가 저를 감금하고 “저 작가님 죽일 수 있어요.”라고 대사치면 정말 섬뜩해요.(웃음) 소름끼쳐요.
 
Q. 영화 시나리오를 각색한 작품이잖아요. 영화적인 요소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지 않나요?
<도둑맞은 책>은 장면 전환이 영화적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연극에는 암전이 꼭 필요하잖아요. 그 암전시간을 최소화 시켰어요. 갇혀있는 장면을 연기하다가 회상 장면을 연기하고, 과거와 현재를 바쁘게 오가는 스토리 흐름상 암전이 없어선 안되는 작품이에요. 묶여 있는 서동윤이 다음 장면에서 과거 회상 신을 연기하려면 결박을 풀고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암전이 꼭 필요하죠. 하지만 이번 시즌 공연의 모토는 암전시간 단축이었어요. 아무래도 세번째 공연이니까 더 능숙해지기도 했고 더 밀도 있게 탄탄하게 다듬었어요. 빠른 장면전환 덕분에 영화같이 느껴질 거에요.

Q. 서동윤은 납치, 감금 당한 채 조영락이 시키는 대로 시나리오를 쓰는 극단적인 상황속에서도 오랜만에 글이 잘 쓰여지니까 즐거워 하잖아요. ’감금 당한 사람이 저럴 수 있나?’싶다가도 묘하게 공감되더라고요.
서동윤은 작가잖아요. 작가의 목적은 좋은 글을 쓰는 거니까요, 상황이 어떻든 간에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면 기쁜 거겠죠. 배우에게 적용해보면, 연기자의 목적은 좋은 연기를 펼치는 것이니까 어떤 매체에 가 있든 좋은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서동윤이 마지막에 밀실에서 풀려나는 장면에선 자신을 감금한 조영락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애드립을 치기도 했어요.

 
“연기는 몰입이 아니라 균형이라고 봐요.“
 
Q. 욕 대사 분량이 꽤 있어요. 지난 공연에서는 그 욕이 찰지다는 반응도 많았고요.
아 그게 뭐 20년 배우 했으면 욕하는 역할 한 두 번 해보겠어요? 이 욕 저 욕 다해보죠. 밑바닥 거지부터 상류층 회장님까지 욕도 해보고 노래도 해보고 다 해보죠. 아, 욕은 (김)무열이가 잘하지. (웃음) 사실 무열이랑 <얼음>할 때는 내가 몇 년만 젊으면 무열이 역할(형사2)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그래 네가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열이가 속 시원하게 연기해줘서 아쉬움이 남진 않았어요.
 
Q. 치열한 심리극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공연하면서 정신적으로 위태로워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년에 그런 순간이 좀 있었어요. 배역을 맡는다는 건 되게 친한 친구를 사귀는 느낌이에요. 아주 가까운 친구와 동고동락하는 건데, 친한 친구가 있으면 말투도 좀 닮아가고 쓰는 용어도 비슷해지고 닮아가는 지점이 생기잖아요. 작년에 여러 작품을 통해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운 예술가들을연속으로 연기하면서 많이 우울해진 기간이 있었어요. 극단적인 안 좋은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시기가 지나고 보니 ‘맡는 배역들이 계속 우울한 인물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는 악역들을 계속 맡다보니 ‘내가 점점 사악해지려나?’ 하는 걱정도 잠깐 했는데 전혀 그렇지는 않더라고요(웃음).
 
Q. 이제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셈이네요.
연기라는 건 몰입이 아니라 균형이라고 생각해요. 과하게 배역에 몰입한 연기는 좋은 연기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줄타기인 거죠. 이성과 감성의 줄을 잘 타서 균형을 잡고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해요. 연극은 늘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잖아요. 일반적인 상황이면 무대에 올릴 이유가 없죠. 눈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거나 주변 모든 인물들이 나를 등지는 상황처럼 극단적인 사건들을 반복해서 무대에서 겪어내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작년에 연극 <프로즌>에서 소아성애자 랄프 역을 맡았을 때도 가슴이 좀 아팠어요. 2007년에 연극 <미친 키스>할 때는 홧병에 걸리기도 했고요. 성격이 더러운 사람을 연기하다 보니 뭘 먹어도 다 체하더라고요.
 
Q. 그렇게 힘들 때, 기분 전환을 위해서 따로 하는 활동이 있나요?
없어요. 기분전환을 위해 다른 작품을 하죠. (웃음) 다른 취미활동을 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이게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들어오는 작품을 마다하는 것도 배우로서 좋은 태도는 아니잖아요? 작품 제의가 들어오면 솔직하게 ‘나 이미 다른 작품 하고 있는데, 이걸 또 하라고요?’하고 반문해요. 제작사 쪽에서 ‘해주세요’라고 하면 전 또 ‘그래요 그럼.’하고 바로 수긍해요. (웃음)
 
상반된 캐릭터를 같은 시기에 연기하게 되면 단점도 많지만 한 배역에 너무 잠기지 않게 캐릭터끼리 서로 환기시켜주는 장점도 있어요. 한 공연 쉬는 날 다른 작품 속에서 살다가 오면 또 새롭게 느껴지거든요. 동시에 두 작품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나 대사가 헷갈린 적은 한번도 없지만 캐릭터가 조금씩 닮아가는 건 있어서 그걸 많이 경계해요. 예를 들어 <변태>의 시인 민효석과 <얼음>의 형사를 동시에 맡으면 시인이 형사스러워지고 형사가 시인스러워질 수 있는 거죠. 두 배역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겨 달라붙지 못하게 양쪽에 걸친 다리를 힘줘서 쫙 벌립니다. (웃음)
 
“아재개그 선구자요? 불구자쯤은 될 걸요.”
 
Q. 그동안 맡은 악역들은 나름의 유머러스한 면을 갖고 있더라고요. 실제 성격이 배어나오는 건 아닐까요?
아니에요. 저는 호가 ‘정적’이에요. 정적 박호산. 무슨 말을 하면 썰렁함을 지나서 ‘정적’이 찾아와서요.(웃음)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선배 대접을 해주는 건지 많이들 웃어줘요. 소위 말하는 아재 개그의 끝판왕이죠.
 
Q. 최근에 하셨던 아재개그 하나만 들려주세요.
누가 아재개그, 아재개그 자꾸 그러길래 “아! 쟤~ 걔, 그?”라고 받아줬죠. (웃음) 전 오래 전부터 늘 이런 개그를 해왔는데 시대별로 이름만 달라졌던 거 같아요. 썰렁개그, 허무개그, 후폭풍 개그 … 이러다가 최근 아재개그까지 왔죠.  
 
Q. 아재개그의 선구자인 셈이네요?
선구자까지는 아니고, 불구자쯤은 될 걸요. (웃음)
 
Q. 그러고보니 얼굴의 주름이 미소형 주름이네요. 평소 많이 웃으시나봐요.
많이 웃으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해요. 근데 오늘은 메이크업 지워지면서 주름이 먹은 거 아니에요? 자국 생긴 거 같은데.
 
“선생님이라뇨 어휴.”
“연기방향이 없는 게 제 방향이에요.”

 
Q. 서동윤은 ‘끝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안달난 작가잖아요. 이 이야기면 대박 칠 것 같다 싶은 박호산만의 스토리 아이템이 있나요?
뭐 제가 생각했던 건 대부분 이미 나왔더라고요. 전 꾸고 싶은 꿈을 디자인해주는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본 적 있어요. 사람은 꾸고 싶은 꿈을 마음대로 꾸지 못하잖아요. 그걸 어떤 대가를 받고 의뢰인이 원하는 꿈을 꾸게 해주는 이야기를 코믹극으로 해보고 싶어요. 직장 상사를 두들겨 패는 꿈처럼 구체적인 상황을 꿈으로 꾸게 해주는 거에요. 하룻밤 동안 꾸고 싶은 꿈을 실컷 꾸고 깨어나면 후련해져서 나가는 거죠. 사실 연극의 기능도 그런 거잖아요.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Q. 데뷔 20년차에요. 선생님 소리도 가끔 듣지 않으세요?
어휴, 선생님이란 호칭은 정말 아니에요. 물론 오빠, 형 소리가 제일 좋죠. (웃음) 그냥 누군가에게 가까운 사람이었음 좋겠어요. 그냥 편하게 ‘술먹자, 나와‘하면 볼 수 있는 사람요. 팬들하고도 그렇게 지내요. “팬이 뭐야, 내가 무대에 있을 때나 배우고 관객이지, 내려오면 너희나 나나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직장인이야.”라고 팬들에게 말해줬어요. 얼마전에 드라마 <원티드>마지막회는 한 열명 정도 ‘번개’로 모여서 같이 보기도 했고요 엠티도 종종 같이 가곤 해요. 기자님도 술 드시고 싶으면 연락하세요.
 
Q. 워낙 다작(多作)하시잖아요. 가족들이 건강 걱정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작품이 없어지면 걱정할 걸요? 작품이 저를 지탱해주거든요. 배역이 ‘네가 아프면 안돼’하면서 붙잡아주는 느낌? 그래서인지 작품 하나 끝나면 몸이 놔져요. 녹초가 돼버려서 쫑파티에서 만취해 본 적이 없어요. 술이 잘 안 들어가거든요. 근데 또 다음 작품 연습나가는 날이 되면 멀쩡해져요. 일년 중 아픈 날이 거의 없지만 작품 하나 끝내는 날이 아픈 날이에요.
 
이번에 건강검진 받았는데 신체 나이가 20대 후반에서 30대초반으로 나왔어요. 아직 술 좀 더 먹어도 되겠구나 싶더라고요.(웃음) 특별히 운동하는 건 없지만 계속 공연하고 움직이니까 살 찔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아, 소식하는 편이긴 해요. 보통 식당밥 한 공기면 배불러서 더 못 먹어요. 조금씩 자주, 하루 5끼 먹는 스타일이죠.
 
Q. 시간이 있다면 해보고 싶은 운동이 있나요?
레포츠 좀 해보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올까 싶은데, 대학 다닐 때는 스케이트 보드나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거 좋아했거든요. 지금은 나이도 그렇고 어울리지도 않지만 평소에 타는 종류를 좋아해요. 스노보드, 서핑보드처럼 균형 잡고 타는 거 해보고 싶어요.
 
Q. 점점 활동반경이 넓어지고 있으세요. 앞으로의 연기방향에도 변화가 생길까요?
연기 방향이 생기지 않게 하는게 제 방향이에요. 어떤 고정적인 캐릭터로 기억되는게 두려워요. 재미 없어질까봐.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박호산을 떠올렸을 때 특정한 연기스타일이 연상되지 않았음 좋겠어요. 그게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하고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주제가 좋은 작품을 많이 하는게 1차 목표고 그 안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역할을 맡는 것이 2차 목표입니다. 누가 트위터에 영화 <족구왕>에서 기숙사 선배로 나왔던 제 모습하고 함태섭 회장 할 때 사진 붙여놓고 ‘이게 같은 사람이냐’고 써 놨던데 되게 기분 좋더라고요. 내가 잘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 이렇게 가고 싶어요.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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