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는 ‘장발장’이 꿈” 윤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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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페스트>에 출연 중인 윤형렬을 지난 17일 만났다. 알베르 까뮈와 서태지의 만남으로 화제가 됐던 <페스트>에서 그는 관객에게 극중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이자 이상과 현실을 고민하는 저널리스트 랑베르로 활약 중이다. 맨 처음 공개된 뮤직비디오에서 서태지의 ‘버뮤다’를 색다르게 소화해내며 큰 기대를 모았던 그는 무대에서도 역시 강렬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모았고, 일부 장면이 급박하게 수정된 지난 몇 주를 돌아보며 “이젠 익숙하다”고 여유롭게 웃음지었다. 어느새 데뷔 10년 차, 지난 10년의 시간이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지금 매 순간 무대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는 그의 진짜 전성기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Q 처음 서태지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창작에 초연, 쥬크박스 뮤지컬 작업이 쉽지 않으리라는 예상도 했을 텐데.
서태지의 음악 자체가 워낙 대중적으로 친숙하지 않나. 그 음악에 <페스트>라는 까뮈의 소설을 과연 어떻게 접목시킬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가 원래 가수로 데뷔했기 때문에 대중가요를 했던 사람으로서 서태지 음악이 어떻게 뮤지컬로 만들어질지 환상과 기대도 있었다. 마침 작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 친하게 지냈던 김성수 음악감독님이 편곡을 하신다고 하시더라. 그 때 ‘버뮤다’ 편곡 버전을 잠깐 들려주신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았다. 그래서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음악의 힘을 믿어보자, 하고 하게 됐다.
 
Q 직접 노래 하는 입장에서 서태지 음악은 어땠나.
일단 쉽지는 않았다. 서태지가 노래보다는 음악성이 강한 가수다 보니 뮤지컬 배우로서 가창력을 보여주거나 드라마틱하게 부르기 쉽지 않은 노래가 많더라. 부르다 보면 꼭 서태지처럼 부르게 되는 노래가 많았다. 특히 ‘제로’는 처음 들었을 때 ‘이걸 어떻게 부르라는 거지’ 했다(웃음). 일단 사운드가 여러 트랙으로 가기 때문에 혼자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더라. 뮤지컬에서 어떻게 부를 수 있을지 초반에 고민이 많았는데 편곡을 워낙 잘 해주셨다. 잘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Q 새롭게 시도한 발성법도 있을 것 같다.
작품에 따라 노래하는 스타일이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두 도시 이야기>처럼 악기 편성이 클래식하게 된 작품이면 노래도 그렇게 불러줘야 하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처럼 완전 록음악이면 거기 맞춰서 불러줘야 한다. 근데 <페스트>의 음악은 실용음악에 가깝기 때문에 좀 뮤지컬스럽지 않게 - 어느 순간 ‘뮤지컬스럽다’가 일종의 수식어가 됐는데(웃음) - 그런 느낌이 최대한 안 나게 가요처럼 부르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Q 김성수 음악감독의 편곡이 화제였는데, 가장 의외고 새로웠던 곡은.
이미 서곡부터 압도를 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 공연은 서곡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페스트>는 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어차피 공연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서 초반에 관객들을 그 거짓말 속으로 얼마나 잘 끌어당기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걸 결정하는 것이 첫 장면과 서곡인데, 서곡 속에 이후 나오는 모든 음악이 다 들어있을 뿐 아니라 무게감 있게 객석을 압도해버리는 것 같다.
 
▲이날 함께 진행된 페이스북 라이브 인터뷰
 
Q 윤형렬이 생각하는 랑베르는 어떤 인물인가.
랑베르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5년 전을 회상하면서 하는 대사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비록 그 시스템이 그 뒤에 숨은 소수의 기득권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있었다”고. 랑베르의 캐릭터를 잘 보여주는 말 같다.
 
지금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나.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사회의 병폐가 있고, 그걸 하나 둘 들춰내다 보면 엄청난 대수술을 해야 한다. 잘못 맞춰진 퍼즐인데 나름대로 균형을 잡고 무너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거다. 랑베르는 그런 현실을 알기 때문에 저널리스트로서 알려야 할 것은 알리지만, 숨길 것은 적당히 숨기기도 하는, 소위 ‘유도리’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공화국에서 유일한 신문사의 기자고, 시장이 좋은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기자다. 거기까지 올라가려면 그만큼 실력도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선에서는 현실과 타협도 하는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Q 랑베르의 캐릭터 소개글이 ‘변화하는 자’인데, 실제로 극 후반에 전염병이 퍼진 도시에 남겠다고 극적으로 마음을 바꾼다. 자칫 설득력이 떨어져 보일 수 있는 부분이라 고민스러웠을 것 같다.
그게 사실 더블캐스팅된 (김)도현 형과 지금 공연하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원래 처음 대본에서는 랑베르의 변화가 좀 더 잘 보였다. 리유와의 대립 장면도 있었고. 리유는 완전히 고지식하고 대쪽같은 인물인 반면, 랑베르는 산전수전 다 겪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이다. 그 둘이 만났을 때 철저한 대립이 빚어지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는 모습에서 나오는 곡이 ‘제로’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 부분이 많이 잘렸다. 그래서 랑베르를 지금 좀 힘들게 연기하고는 있다. 갑작스럽게 그 변화를 보여줘야 하니까. 그래도 최대한 주어진 대본 안에서 그걸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좀 아쉽긴 하다.
 
Q 일부 장면을 수정했다고 들었다. 어떤 부분이 바뀌었나.
우선 2막에 원래 ‘Take5 Reprise’가 나오면서 랑베르가 시민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 전에는 이 장면에서 사람들이 뜻을 모아 연대하는 모습까지만 보여줬다면, 바뀐 부분에서는 ‘T`ikT`ak'이라는 곡이 추가되면서 연대하고 저항하겠다는 의지까지 보여주면서 장면이 끝난다. 코타르 부분도 추가됐고.
 
Q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랑베르의 ‘제로’를 부를 때. 3층에서 ‘제로’를 부르면서 무대가 전환될 때가 가장 좋다. 그 때 ‘나 지금 좀 멋있는 것 같아. 멋있어 보이겠는데?’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Q 최근 <복면가왕>에 출연했는데 어땠나. 배우 아닌 인간 윤형렬로서 서는 무대라 특별하다고 말했는데.
뮤지컬 배우로서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자기 이야기가 아닌, 극중 캐릭터의 이야기를 하지 않나. 근데 복면까지 쓰고 얼굴을 감춘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노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더라. 꼭 유명 프로그램이서가 아니라, 얼굴을 가리고 진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너무 좋았다.
 
Q 5월 초 키이스트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새로운 소식이었는데, 키이스트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된 건가.
사실 <아가사>를 할 때 대표님이 공연을 보러 오셨었다. 다른 분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겠냐’고 넌지시 이야기하셨는데, 그때는 거절했다. 그런 기획사는 자신들의 뜻에 따라 배우들을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거든. 언제 촬영 들어갈지 모르는 영화 크랭크인을 기다리다 무대에 못 오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영화가 잘되면 다행이지만, 영화가 잘 안되거나 엎어지면 뮤지컬에 설 자리도 없어지는 거다. 그래서 그 때는 고사를 했다.
 
그런데 원래 키이스트에 있던 친구(매니저)를 통해 또 이야기가 들어왔고, 그때는 좀 속상한 일이 있던 터라 기획사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힘이 있는 회사에 들어가면 좀 달라질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대표님이 이례적으로 좋은 계약조건까지 제시해 주셔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다.
 
Q 활동방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의가 됐나. 그 전과 크게 바뀌는 것은 없나.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매체 출연의 기회가 조금 많아진 정도. 매체를 하더라도 무대는 놓고 싶지 않다. (영화, 드라마도 출연할 수 있나?) 그렇다. 이제는 어느 정도 멀티가 되는 게 좋을 것 같다. 더 유명해지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뮤지컬을 하면서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고 하는 것이 상호적으로 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뮤지컬 시장에도 도움될 수 있고. 그리고 예술은 테크닉이나 방법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다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배우로서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고, 팬들에게도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
 
Q 원래 가수로 데뷔했는데, 앞으로 가수로서 활동할 계획은 없나.
아직 그런 계획은 없다. 가수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한다기보다 그동안 해왔던 드라마 OST라든지, 팬들을 향한 선물 개념으로 내는 앨범을 내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이다. 그리고 원래 싱어송라이터가 꿈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특별한 감정이 들 때마다 곡을 쓰고 있다. 그런 것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잘 다듬어서 단순히 가수로서가 아니라 음악가로서, 아티스트로서 앨범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Q 출연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점에 가장 비중을 두나.
‘이걸로 뭘 배울 수 있을까’이다. 뭐라도 하나 얻고 배워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스트>는 특히 강렬했던 게 서태지의 음악 자체가 록을 베이스로 한 강렬한 음악이다 보니 기존의 뮤지컬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세련된 음악, 세련된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랑베르라는 캐릭터도 되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단 관객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고, 가장 살아있는 캐릭터 같았다. 게임으로 치면 NPC(Non-Player Character,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 없는 캐릭터)같은 캐릭터가 있고, 유저 캐릭터가 있는데, 랑베르는 유저인 거다(웃음).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Q 올해로 데뷔 10년째인데, 지금 시점에서 배우로서의 자신을 평가한다면?  
어느새 10년이 됐다. 가끔 10년이 됐다는 생각을 하면 부끄럽다. 10년이나 됐으면 이것보다 더 잘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고(웃음). 노래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어느 정도 ‘아, 이런 건가?’하고 감이 오기 시작한 게 2~3년 전이었던 것 같다. 군대 다녀와서 1년쯤 지났을 때부터, <두 도시 이야기> 재연 즈음. 대사 하나, 노래 하나를 하더라도 ‘아, 이런 건가? 이렇게 하니 더 좋은데?’하는 깨달음 같은 것이 온 게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그동안은 내가 닫혀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것들을 다 캐치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내가 좀 열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다 당겨서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뭔가를 보는 시각도 좀 달라져 있고. 그래서 요즘 무척 열의에 차 있다.  
 
Q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10년 후 되어있고 싶은 모습은.  
대본이나 악보 같은 것들은 다 도구일 뿐이고, 그것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진짜 메시지가 있지 않나. 큰 대주제를 전하기 위해 중간중간 배우로서 해야 할 것들이 있는 건데, 그런 것들을 맛깔나게 잘 전달하고 같이 공연하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잘 중심을 잡아주는 배우가 좋은 배우 같다. 관객 분들에게 작품을 잘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본인이 여력이 안 돼서, 또는 각자 인생에서 지나고 있는 시기가 다르다 보니 자기 앞만 보고 가는 친구들이 보인다. 그러면 좀 안타깝지. 근데 그런 친구들조차 아우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10년 뒤는 마흔 네 살이네(웃음). 그 즈음에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후배들 잘 챙기고, 자기 자리를 내어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지. 박수 칠 때 떠나야 하나?(웃음).
 
Q <페스트> 이후 계획은. 
지금 공개된 게 다다. <페스트> 이후 아직은 계획이 없다. <신사들의 품격>이라고 한지상 형, 휘성, 이창민과 하는 콘서트가 있고. 갑자기 서글퍼지네(웃음). 이건 꼭 나가야 한다. 그래야 작품이 들어오지(웃음).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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