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뒤집어 보여주는 우리 세계의 폭력성, ‘이갈리아의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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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의 배경은 모든 것이 거꾸로 뒤바뀐 세계다. 이곳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뒤집혀 있다. 출산의 ‘특권’을 타고난 여성은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로서 가정과 사회를 이끌고, 남성은 철저히 여성에게 종속되어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극은 이렇게 기존의 성 역할이 전복된 세계의 천태만상을 낱낱이 보여줌으로써 거꾸로 우리의 현실 속에 자리한 차별과 폭력을 극명히 드러내 보인다.

금일(1일) 개막하는 ‘이갈리아의 딸들’은 그간 ‘DAC Artist’ 프로그램을 통해 윤성호, 이경성, 이승희, 김은성, 여신동 등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지원해온 두산아트센터가 김수정 연출과 함께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단 신세계 대표인 김수정 연출은 그간 ‘광인일기’, ‘공주(孔主)들’, ‘파란나라’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도사린 폭력과 차별, 혐오를 다뤄온 바 있다.
 
지난해 워크숍 공연에서부터 전석 매진되며 화제가 됐던 이 연극은 1977년 출간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Gerd Brantenberg)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 속 ‘이갈리아’는 남성이 집안일과 육아를 하고 여성이 경제활동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나라다. 김수정 연출은 이 원작이 2018~2019년 한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도록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두산아트센터는 개막에 앞서 지난달 30일 이 작품의 전막을 언론에 공개했다.
 
공연은 현란한 런웨이로 시작된다. 극 곳곳에서 관객들을 다음 장면으로 이끄는 ‘가이드’의 등장을 시작으로 십 수명의 배우들이 나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이미 여기서 관객들은 현실과는 정반대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머리를 산만하게 풀어헤친 여자들은 화장기 없는 민낯에 서슴없이 ‘쩍벌’을 하며 거칠고 위압적인 태도로 ‘여성성’을 과시하고, 남성들은 하이힐에 미니스커트, 배꼽티 등을 차려 입고 미모를 뽐낸다.
 
극의 1부는 이렇게 성 역할이 뒤바뀐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세세히 보여준다. 여자에게만 허락된 직업인 잠수부를 꿈꾸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소년, 엄마에게 매일 얻어맞고 우는 아빠를 지켜보는 소년, 여자들에게 유린당하고도 자신의 ‘총각성’ 상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입을 다무는 소년 등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폭력과 차별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에 의해 대상화된 자신들의 삶에 문제의식을 갖게 되고, 이어지는 2부에서는 서로 연대해 저항의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남녀간 성차별을 뒤집어 비추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무대 위 뒤집힌 세상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이 시스템의 피해자가 남자만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된다. 여기서는 립스틱을 바르고 싶은 여자나 레즈비언도 비정상 취급을 당하며, 어릴 때부터 늘 거칠고 주도적인 ‘상여자다움'을 장려 받아온 딸들도 어딘지 어색하고 불행해 보인다. 결국 사회가 존재의 우열과 정상/비정상을 규정하는 한 폭력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공연은 보여준다.
 
극은 여기서 또 한발 나아간다. 가난한 상어잡이 여성 그로와 장관의 아들 페트로니우스의 관계 속에서는 성차별과 계급차별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로의 저돌적이고 폭력적인 사랑에 상처받은 페트로니우스는 정작 자신이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타인의 폭력을 두둔하거나 침묵을 선택한다. 피해자가 이기심으로 인해 시스템의 조력자가 되는 순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 등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불편한 지점들을 이 극은 서슴없이 비춘다. 그리고 그런 모순과 갈등이 극대화된 지점에서 침묵의 시선을 관객에게 돌리며 끝을 맺는다.
 

묵직한 메시지를 담은 극이지만, 연극 ‘이갈리아의 딸들’은 165분간 지루할 틈 없이 경쾌한 속도로 이어진다. 집에선 폭군처럼 군림하다가 밖에선 상급자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는 여성들의 모습은 거꾸로 가부장제의 위계질서를 통렬히 풍자하고, “수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거나 “여자는 고쳐 쓸 수가 없어” 등 현실을 비튼 대사들도 실소를 자아내며, 인터미션에서 상영되는 광고 영상조차 섹시한 포즈로 립스틱 ‘이갈루즈’를 홍보하거나 다소곳한 모습으로 피임약 ‘센스보이’를 홍보하는 남성들의 모습으로 웃음을 이끌어낸다.


각기 실제와 다른 성별을 맡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역동적인 에너지도 무대를 가득 채운다. 성큼성큼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면서도 무채색의 양복과 작업복만 입고 등장하는 여성들, 반대로 불편한 힐과 미니스커트를 입고 조신한 몸가짐을 하려 애쓰는 남성들의 신체 동작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몸과 근육 하나하나에서 시작된 차별의 경험을 생생히 되짚어보게 한다.
 

김수정이 연출하고 배우 강지연, 권미나, 김명기, 김보경, 김선기, 김시영, 김정화, 김형준, 민현기, 박지아, 이강호, 이진경, 이창현, 조영규, 하동준, 하재성 등이 출연하는 ‘이갈리아의 딸들’은 오는 1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펼쳐진다.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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