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여성 역할 많아질 듯…우리도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오펀스’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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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연극 ‘오펀스’는 젠더프리캐스팅으로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박지일, 김뢰하, 박정복, 김도빈, 김바다, 현석준 등 남자 배우들과 함께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등 여성 배우들이 이 작품에 합류한 것이다. 한평생 거친 삶을 살아온 중년의 갱스터와 고아 형제의 이야기를 여성 배우들이 어떻게 소화해낼지, 기대와 궁금증 속에 개막을 기다린 이들이 많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캐스팅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정경순과 최유하, 최수진은 온 몸으로 세파에 부딪히며 세상을 향한 두려움과 분노, 결핍을 켜켜이 쌓아온 여성 해롤드, 트릿, 필립을 선명히 그려내며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고 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작가도 현지에서 젠더 프리 공연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미국 초연(1983) 후 약 36년 만에 한국을 기점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셈이다. 그 변화의 주인공인 세 여성 배우를 지난 11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Q 갱스터 해롤드와 반항적인 트릿,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필립을 각각 연기하고 계시죠. 각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가장 신경 쓰신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정경순: 사실 처음엔 좀 힘들었어요. 작품이 어느 정도는 번안이 될 줄 알았거든요. 이름도 여자 이름으로 바꾸고 의상도 여자 옷으로 바꿀 줄 알았는데 그대로 간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를 바꾸는 과정이 좀 힘들었죠.

근데 연습하면서 우리끼리 합을 맞추다 보니 그런 게 없어졌어요. 우리 셋의 캐릭터가 작품 속에 녹아 들면서 의심이 없어지더라고요. 여자 이름이든 아니든 이건 삶과 어떤 가치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꼭 혈연관계가 아닌 그냥 인간들 사이에서 맺어질 수 있는 관계에 대한 개념이니까.

최수진: 사실 극중 상황이 워낙 특수한데다 좀 센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이 인물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캐릭터적인 부분을 좀 많이 생각했어요. 특히 고민했던 건 필립이 고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아이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분명히 필립은 좀 남다르고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고 결핍을 가진 인물이지만, 고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건 아니에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캐릭터거든요. 그런 변화의 여지를 가진 인물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그 선을 찾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연출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언니 오빠들의 모니터도 많이 받았어요.

연습과정에선 그랬다면, 공연을 하면서부터는 셋의 관계성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특히 필립은 형밖에 모르던 아이였잖아요. 트릿과의 관계, 해롤드와의 관계를 더 디테일하게 갖고 가려고 신경을 쓰고 있어요.
 
최유하: 저는 다른 작품을 연습할 때보다 외적인 것들에 좀 더 신경을 많이 썼어요. 연습 초반에 지일 선생님이 “넌 비속어도 쓰고 분명 거칠게 말하고 있는데 왜 거칠어 보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니까, 자세가 너무 바르더라. 거북목을 하고 어깨를 좀 말아봐, 정복이처럼 해봐”라고 하시는 거에요(일동웃음).

정경순: 정복이는 막 건들거리잖아(웃음).

최유하: 그래서 정복이를 관찰했죠(웃음). 제가 그동안 운동을 이것저것 많이 해서 항상 몸을 바르게 펴는 습관이 있었나 봐요. 자세를 바꾸니까 좀 더 트릿에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엔 어떤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그 인물의 정서를 품는데 더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정서뿐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들을 연구하는 과정이 개인적으로 새롭고 특별했어요.

Q 기존의 남성 역할을 여성으로 바꿔서 연기하고 계신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신체 및 감정 표현에 있어 새로웠던 지점이나 해방감을 느끼신 지점이 있다면요.
최수진:
남자가 하던 역할을 한다는 것에 크게 비중을 두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필립은 집에서만 자란 아이니까 여자답게 혹은 남자답게라는 것을 표현할 필요도 없고, 그냥 필립으로서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저는 그동안 재미있는 역할을 많이 맡았고, 작은 역할이라도 항상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서 ‘왜 난 맨날 남자 서포트만 해줘야 되지?’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종종 남자 역할 중에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으면 ‘해보고 싶다’ 정도였죠.

근데 이번에 ‘오펀스’를 하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연습 과정은 정말 힘들었어요. 분량도 많고 대사와 움직임도 많다 보니 땀도 많이 나고, 몸이 힘드니까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컸어요. 근데 그런 와중에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아침에 일어날 때 ‘아…또 어떻게 하지?’ 싶다가도 막상 연습을 시작하면 너무 재미있었어요.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역시 텍스트와 캐릭터의 힘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외람된 말이지만, ‘남자 배우는 항상 이런 재미있는 역할만 하는 건가?’ 싶은 거에요. (정경순: 맞아, 맞아). 물론 남자 배우들도 늘 주연만 맡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역할이 더 많으니까요. 
 
정경순: 전 이번 작품을 하면서 좋았던 게 내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는 거에요. 사실 내가 캐스팅된 이유 중에 하나가 내 목소리였을 거에요. 목소리가 또래 중에서도 좀 허스키하고 낮으니까. 근데 그동안 드라마만 하고 목소리 단련을 안 하다 보니 목소리가 좀 가늘어졌어요. 비음도 섞이고. 그걸 김태형 연출이 딱 지적하더라고. “선배님, 이 인물은 무조건 목소리가 낮아야 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있어요”라고. 그래서 내가 목소리에 진짜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러다 보니 평소 목소리까지도 낮아졌어요. 옛날의 목소리가 돌아온 거죠. 그게 개인적으로 정말 기뻐요.

그리고 수진이도 얘기했지만, 남자 역할은 이렇게 재미있는 게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전 그동안 엄마 역할을 정말 많이 했어요. 비극적이고 눈물 많은 엄마 역할. 근데 이 역할을 하니까 너무 속이 후련한 거야. 어떤 면에선 이 캐릭터가 나와 더 가깝거든요. 무대 위에서 완벽한 몰입 상태에 있을 때 내가 연기를 정말 즐기고 있다는 걸 느껴요.

또 다른 건 우리 셋의 호흡이 정말 잘 맞는다는 거에요. 배우들은 연극을 하면 항상 스트레스를 받아요. 상하 관계일 수도 있고 평행 관계일 수도 있는데, 서로의 관계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항상 압력을 받죠. 근데 우리 셋은 친하기도 하고 아이들 심성도 너무 좋아서, 누가 실수를 해도 그게 실수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평생 함께 살아온 사람 같아요. 정말 이 역할은 맨날 하고 싶어요(웃음).

최유하: 공연 끝나도 그냥 셋이 모여서 하고 싶어요(웃음). 저도 아까 수진이가 한 얘기에 공감해요. 배우는 늘 무대 위에서 희로애락을 표현하잖아요. 저도 이제까지 그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더 큰 영역이 있다는 건 몰랐던 거에요. 배우로서 여자 역할을 연기할 때는 분노를 표현할 기회도 적고, 그것도 ‘히스테리컬’, ‘비명을 지르며’ 정도의 감정으로 정의되죠. 근데 여기선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분노하기도 하고 ‘NO’를 외치거든요. 인간이 가진 희로애락이 따로 있고 여자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희로애락이 따로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게 굉장히 행복해요. 남자 역할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이 되게 명확한 역할을 처음 해봐서 즐거운 것 같아요.

정경순: 그만큼 이 작품이 정말 잘 쓰여진 거지. 은유가 너무 좋고 탄탄해요. 이렇게 모든 관객이 다 똑같이 공감하고, 계속 공연되는 이유가 있는 거에요. 한번은 내가 드라마 작가가 공연을 보러 왔는데, 엄청 울면서 보더니 대본을 보내달라고 하더라고. 자기가 꼭 보고 싶다고.
 
Q 정서적으로는 각 캐릭터가 가진 결핍 혹은 두려움 등에서 어떤 부분에 특히 공감하셨나요.
최유하:
트릿은 마음의 벽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방어기제가 있죠. 근데 트릿의 허세나 ‘센 척’을 저도 저만의 방식으로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너무 하고싶은 역할이나 오디션이 있는데 ‘난 그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아’라고 하는 거죠.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사실 그 역할을 못했을 때 너무너무 슬펐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감싸고 또 감싸서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거에요. 내 안의 슬픔에 다가갈 수 없게 나 자신을 계속 막는 것이기도 하고요.

또 저는 내면이 정말 약하거든요. 분노나 울화도 많아요. 그래서 누군가가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는 걸 보면 트릿처럼 가서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한 적도 많아요. 요즘은 저를 걱정하는 분들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 주셔서 잘 안하지만(웃음). 그렇게 울분을 토해내는 면이 제게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코어가 강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또 스스로 그걸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더 강한 척을 했던 것 같고요.

어떤 분들은 트릿을 보면서 ‘왜 쟤는 저렇게까지 하지?’ 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어쩌면 누구나 트릿에게 공감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어기제가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방어기제가 있고, 또 겁이 정말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트릿의 정서와 맞닿는 지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 연극 '오펀스' 공연 사진

최수진: 제 경우는 엄마가 저를 대학생 때까지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셨어요. 늘 엄마의 인생을 제 인생에 투영하면서 “엄마는 이 나이에 이랬으니 너도 이래야 한다”고 하셨고, 저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죠. 그러다 처음 뮤지컬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가 하신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뮤지컬 하는 애들은 다리 쫙쫙 벌리고 앉아 있고”라고 하셨거든요.(일동웃음) 사실 스트레칭 하려고 그러는 건데(웃음). 그런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가 제가 사회로 나온 후에 엄마에게서 좀 벗어나야 하겠다고 시작한 시점이 있었고, 엄마와 많이 부딪히기도 했어요. 엄마도 저로 인해 생각을 많이 바꾸시기도 했고요. 제가 살아가는 시대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아신 거죠. 지금은 제가 새벽 2시까지 안 들어가도 전화를 안 하세요(웃음).

최유하: 예전에는 저녁 9시 반부터 전화를 하셨거든요(웃음).
 
최수진: 제가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필립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어요. 필립이 나중에 트릿에게 “형한테 고맙고 형의 마음도 다 아는데, 난 집을 나갈 거야. 난 새로운 세상을 봤어”라고 할 때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이해됐어요. 형에 대한 분노나 억울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형의 사랑을 다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더 많이 감정이입이 된 것 같아요.

정경순: 해롤드의 경우엔 사실 두려움이 주된 정서에요. 그리고 이 아이들의 두려움을 알고 있죠. 해롤드가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 친구들과 서로 의지해 살면서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그 두려움을 평생 안고 살다가 트릿과 필립을 만났고, 이 아이들이 갖고 있을 두려움 때문에 연민을 느끼는 거지. 트릿이 이렇게 반항하고 일탈하는 게 다 두려움으로 인한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거죠. 또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거에요.

사실 모든 인간은 항상 두려움과 염려를 갖고 있어요. 근데 그 두려움에서 유일하게 해방시켜줄 수 있는 존재가 가족이에요. 해롤드도 처음엔 트릿을 이용하려고 집에 따라왔지만, 이 아이들이 고아라는 걸 아는 순간 결심을 하는 거에요. 내가 너희들 곁에 있을 거야, 가족이 되어 줄게, 라고.
 
Q 이 작품은 위로와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동안 힘들 때 세 분을 위로하고 성장하게 해준 것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최수진:
저는 사실 인생에 큰 굴곡이 있었던 편은 아니에요. 그리고 어떤 일이 있든 그걸 깊이 파고들기보다 ‘아냐, 난 안 힘들어’라고 생각하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30대가 되면서 좀 변한 것 같아요 힘든 건 힘든 대로, 슬픈 건 슬픈 대로 내 안에 차곡차곡 쌓으려고 하게 됐죠. 그리고 사실 저는 신앙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 같아요. 그 쪽에 의지할수록 제가 많이 단단해지고 알맹이가 생기는 걸 느껴요.

정경순: 저는 개인적으로 결혼이 나를 성장하게 해줬어요. 혼자 살다가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살게 된 것이 큰 인내력을 길러줬죠(웃음). 근데 그게 나쁘지 않아요. 나를 풍요롭게 해주거든요. 인내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자꾸 나를 사색하게 되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게 돼요.

최유하: 저는 실패를 통해서 성장했던 것 같아요. 실패를 하고 나서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가다 보면 대체로 더 좋은 길이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인간관계 같은 경우도 그래요. 저는 원래 ‘나만 잘 살면 돼, 사회생활도 동료도 필요 없어, 혼자 일하면 돼, 왜 같이 술을 먹고 어울려야 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로 인한 실패를 맛봤어요. 내가 직면한 여러 힘든 일들의 이유를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과 잘 협력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좀 부자연스럽지만 같이 어울리려고 노력해요. 그게 저한텐 성장이더라고요.
 
Q 공연계에 젠더 프리 공연 혹은 여성 중심 서사가 늘어나고 있고, 다른 장르에서도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캐릭터가 점차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고 계신가요.
정경순:
영화판에서는 남성 위주의 조폭, 경찰, 범죄물이 너무 식상하다는 평론이나 기사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장르를 다양하게 변화시켜야 하고, 여성캐릭터를 부각시켜야 된다고. 이건 세계적인 경향 같아요. 20년 전만 해도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들이 굉장히 불만이 많았어요. 다 남자들이 독식하고 우리가 할 게 없다고. 어느 분야든 그렇게 어느 한 쪽이 독식을 하게 되면 거기서 갑과 을이 생기고, 부작용도 생기는 거에요. 그래서 ‘미투’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누군가는 그 시스템에서 희생을 당하는 거니까.

그래도 요즘 드라마를 보면 좋은 방향으로 많이 가고 있어요. 여자들이 기업 회장을 하고, 경찰청장을 하고, 판사를 하잖아요. 유하야 수진아, 너희들 이제 준비해. 앞으로 여자 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정말 많아질 거야. 우리도 연극에서 이렇게 하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우리 공연에 작가들, 감독들을 많이 부르는 거야.
 
최유하: 남성 중심 작품이 많아서 지겹다고 하는 것처럼, 여성이 주가 되는 작품들도 지겹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이런 변화가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쉽게 이 구도가 평평해지지 않거든요. ‘이제 여자들 얘기는 지겨워, 여자 영화는 지겨워’라는 말이 나올 만큼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아져야 그때 비로소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가 5대 5의 비율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선생님이 조폭, 경찰 소재를 얘기하셨지만, 그런 소재들이 실제로 재미있기 때문에 다뤄지는 거잖아요. 근데 그동안엔 그런 직업군이 남자로 이뤄져 있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그 분야에도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진출하고 있으니까, 그런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도 많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여자 조폭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웃음). 그런 변화가 그냥 한 순간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더 오래 지속되면 좋겠어요.

최수진: 그렇게 남자들이 맡아온 역할만 재미있는 소재라는 생각도 없어지면 좋겠어요. 여자가 그냥 엄마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아내일 수도 있는데,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변방으로 밀고 곁가지로 얘기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얼마 전에 ‘빅 리틀 라이즈’라는 미국 드라마를 봤어요. 니콜 키드먼, 리즈 위더스푼 등이 출연하는데, 초등학생 아이를 둔 엄마들이 나와요. 거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살인 사건에 연루된 엄마, 또 그 엄마의 엄마 등 엄마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요. ‘베르나르다 알바’도 그런 엄마와 여자들의 이야기였고요.

우리가 엄마라는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 여자가 체력적으로 약한 것도 사실이고요. 근데 왜 그런 여성성을 부정하려고 하는지, 왜 남자처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과도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치마 입고 화장하고 예뻐지고 싶은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물론 ‘여자는 이래야 돼’라는 부정적인 학습 때문에 그런 거라면 탈피해야겠지만, 여자든 남자든 좋으면 화장할 수 있잖아요. 그냥 그런 편견을 다 버리고 인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Q 마지막으로 앞으로 하고 싶으신 작업, 그리고 배우로서 놓치고 싶지 않은 가치나 신념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정경순:
배우라면 다 마찬가지겠지만, 역할의 다양성이 있다면 어떤 역할이든 할 거에요. 그리고 정말 부드러운 멜로 연극을 하고 싶어요.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연기를 잘 해야 된다는 거에요. 나를 갈고 닦고, 내 자신을 많이 들여다보고, 내 안의 다양한 면들을 끌어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최유하: 저는 여성이라는 마이너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마이너가 아닌 권력을 가진 사람을 연기하고 싶어요. 현실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까.

제가 배우로서 가진 신념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거에요. 그리고 여권신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여성에게 요구되는 코르셋도 많지만, 여성 배우에게 요구되는 코르셋도 많거든요. 누가 살이 쪘다더라, 스타일이 어떻다더라, 하는 말들에 대해 “그런 말은 별로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처럼 울분에 차서 투쟁하듯이 말하는 게 아니라 젠틀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정경순: 유하처럼 이렇게 의식 있는 배우가 꼭 필요해요. 겉으로 의식 있는 척하는 사람은 많지만, 유하는 내가 4개월 동안 지켜보니까 정말 의식이 확고한 배우에요. 이런 사람들의 행동이 쌓여서 큰 변화가 생겨나는 거죠.


최수진: 저는 그동안 안 해본 역할이면 다 좋아요. 그동안에도 다양한 역할을 해봤다고 생각하고요. 다음에도 ‘내가 이런 것도 해보네’ 싶은 역할이라면 뭐든 다 해보고 싶어요.
 

데뷔 때부터 늘 얘기했던 거지만, 저는 관객 분들이 제 이름만 보고도 다음 공연을 예매할 수 있을 만큼 신뢰를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저도 예전에 (윤)공주 언니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아서 언니 나오는 공연마다 따라다니면서 봤거든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 2~3인극 소극장 공연을 하면서 하게 된 생각인데, 나 혼자 튀고 나 혼자 잘 하는 배우가 되면 정말 안 되겠더라고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유연하게 맞춰주면서 상대 배우를 편안하게 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정말 좋은 배우 같아요.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주)레드앤블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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