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덕후의 추석 생존기: 상황별 특효 넘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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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Y 1 오전

오전 10시, 고향 내려가는 버스 안. 깜박하고 있다가 이틀 전에 운 좋게 한 석을 예매했다. 고속버스 예매 따위, 인터파크에서 0.01초를 다투는 피켓팅에 단련된 나한텐 껌이다. 그런데 고속버스에서도 역시 ‘관크’는 피할 수 없는 듯, 자리에 앉자마자 잠에 빠져 코를 고는 옆 사람 때문에 점점 머리가 아파온다. 게다가 차가 제자리 걸음을 한지 벌써 2시간째,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차창 밖 안내표지를 찾아봐도 도무지 휴게소 안내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다음 휴게소까지 한 두시간은 족히 걸릴 듯. 머리 속에 절로 <모차르트!>의 ‘내 운명 피하고 싶어’가 울려 퍼진다. 아아…나도 콜로레도 대주교처럼 누가 병풍 치고 임시 화장실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하고 실없는 상상을 하는 사이 다리가 저릿저릿 저려온다. 어른들 선물로 산 술병들이 깨질까 꼭 안고 있었더니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이게 티켓 몇 장 값인데…깨지기라도 하면 정말 피눈물이 날 거다. 차는 밀리고, 방광은 터질 것 같고, 다리는 저리고, 옆 사람의 코고는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하나님, 이 고통은 뭔가요? 기다려야 할까요? 거기 있다면 대답해줘요."
# DAY 1 저녁

지옥 같은 교통체증을 뚫고 밤이 다 되어서야 고향에 도착했다. 부모님, 친척들이 달려나와 반갑게 맞이하…는가 싶더니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붓는다. “살쪘네” 부터 “남자친구는 생겼니?”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영영 노처녀로 살래?”까지…결혼은 어디까지나 선택 사항일 뿐이라고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보수적인 어른들의 귀에 그런 말을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다. 할 수 없이 대충 웃어넘기면서 속으로 흥얼거린다.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 난 이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 내 인생의 나의 것....난 자유를 원해, 자유!”
 
잔소리가 잠잠해졌나 싶더니, 얄미운 막내고모가 내 <헤드윅> 핸드폰 케이스를 보고 “아직도 공연만 보러 다니니?”라고 툭 던진 한마디가 또 어른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주말엔 남자 좀 만나고 그래! 그러니까 애인이 안 생기지!” “그런 데 쓸 돈으로 옷도 좀 사고 꾸미고 다녀라” 아아… 사람이 모든 사람들이 날 부셔 Tear me down!” 속이 끓는다, 끓어…이러다 ‘앵그리 비치’ 될 판.
# DAY 2 오전

차례 준비를 하느라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전을 부쳤다. 전을 부치고 그릇을 나르고, 일은 끝도 없는데 벌써 싱크대 한 가득 쌓인 설거지거리에 한숨부터 나온다. 무엇보다 제일 화를 돋우는 건 오랜만에 친정 왔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대는 막내고모다. 저렇게 게을러도 회사에선 잘 나간다는데…너무 착해서 온갖 손해는 다 보는 우리 엄마랑은 딴판이라 한숨이 나온다. <두 도시 이야기> 시드니 칼튼이 “착하게 사는 건 멍청한 짓이야”라고 했는데…역시 인생의 명언은 다 무대 위에 있다니까. 착하게 사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야. / 착하게 사는 건 절대로 못할 짓이야.”
 
아침부터 일어나 상을 다 차려 놨더니 차례상에 절하고 음식을 먹는 건 어김없이 남자들이 먼저다. 요즘이 어떤 시댄데…공연계도 젠더 스와프가 화제라고! 우리집 추석 풍경도 젠더 스와프를 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이런 구시대적인 남녀차별 문제는 언제쯤 해결될 수 있을까…생각하니 안 그래도 피곤한데 머리가 아파온다. 아, 이제 그만 생각하고 나도 전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하자. 구석에서 자작을 하고 있자니 <프랑켄슈타인> 앙리의 노래가 절로 음성지원된다. 부어라 마셔라 빈잔을 채워라 / 취해보자 사는 게 대수나 / 큰소리 쳐보자 노래하자”
# DAY 2 오후

압도적인 앙상블이다. 어린 조카들은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문을 여는 압도적인 탭댄스신보다 더 빠른 발놀림으로 온 집안을 타닥타닥 뛰어다녔고, 술취한 친척 어르신들은 <페스트>에서 감금된 오랑시티 주민들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숨막히는 이 풍경이 추석마다 펼쳐진다. 이 난장판 속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한발짝 앞으로 나선 둘째 고모가 독백을 시작한다. “아니 우리 애가 이번에 성과급을 거의 연봉만큼 받았어. 어렸을 때부터 속 썩이는 일 하나없이 그렇게 공부를 잘 하더니. 연말에 우리 부부 유럽여행 보내준대. 호호호…” 둘째 고모네 외동아들은 변호사다. 이번에도 바쁘다면서 얼굴은 안 비치고 어른들 용돈만 두둑이 보낸 눈치다. 성과급을 많이 받든 말든, 아직 취직 못한 사촌들도 줄줄이 있는데 눈치없이 왜 자랑질이야…얄미운 마음에 <스위니토드>의 넘버를 (물론 속으로) 불러본다. 변호사 파이, 주둥이만 살아서 그런지 씹는 맛이 최고죠.”
 
“이것 좀 드셔보세요.” 한창 신혼인 새언니가 정체 모를 간식거리를 접시에 담아 내왔다. 어디 여행가서 먹어본 퓨전음식이라는데, 너무 맛있어서 일부러 재료를 싸 왔단다. 오빠가 새언니가 지독한 ‘곰손’이라고 푸념하는 걸 들었기 때문에, 난 배부르다는 핑계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음식을 먹어 본 어른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난 분명히 그 표정을 봤는데, 다들 칭찬의 말만 늘어놓는다. “아휴, 새애기가 음식 솜씨도 좋네.” “그러게, 처음 먹어봤는데 맛이 썩 좋네.” 등등. 자꾸 그러니까 음식 솜씨가 늘지를 않지! 어휴"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 숱한 가식 속에...”
# DAY 3 오전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기억 안 나지만 눈떠보니 아침이다. 그래, 어서 서울로 가자- 라고 마음먹었지만 왠지 엉덩이가 무거운 건 왜일까? 문득 고향 내려와서 아버지랑 몇 마디 나눴던가 되짚어보게 됐다. ‘회사는 괜찮고? 밥은 먹었나?’류의 기초 한국어 회화 책에 나올 법한 식상한 대화만 나누곤 추석의 소란스런 시간 속에 몸을 맡겨버렸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니까.’라는 확고한 믿음에 금이 간 건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를 본 날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살갑게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신구의 모습을 보면서 ‘설마 우리 아빠도?’란 뭉클한 의심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대학 때 자취를 시작하면서 왠지 모를 거리감이 생긴 아버지에게 의무감 반, 애정 반을 섞어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전에 비해 그다지 나아진 것 없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또다시 엄마에게 걱정담긴 잔소리를 한보따리 건네받고 꺼림칙한 기분으로 집을 나서 귀경길에 오른다. 연휴의 왁자한 소란 속에서도 틈틈이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던 아버지의 얼굴이 문득 떠오르며 나도 <레미제라블> 코제트처럼 사랑받는 딸이었다는 게 생각난다. 아빠한테 전화 좀 자주 해야지.
# DAY 3 오후

마음 속으로 <킬 미 나우>를 수십 번도 더 외쳤던 절망적 추석이 지나고 다시 혼자만의 고요를 찾은 시간. 근데 이 허전함과 외로움은 뭘까? 공허함의 근원을 괜히 파고들어 들춰보는 건 덜 익은 여드름을 섣불리 건드려 상처를 키우는 것만큼 경솔한 행동이라 판단하고, 다른 위안거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추석이 공연계 비수기라고 했던가? 아직 할인 기간이 끝나지 않았다면 공연보기엔 딱 좋은 날일 텐데.
 
엄마가 싸준 송편을 하나 둘 집어먹다가 문득 하복부에 두툼한 기운(?)이 감지되어 체중계에 올라보니 오 마이 갓! 3일 동안 2kg가 늘었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송편 하나에 50칼로리란다. 벌써 다섯 개나 먹었는데…게다가 송편과 함께 먹은 꼬치전은 273칼로리, 식혜는 200칼로리다! 지난 3일 동안 먹은 음식을 복기해보니 7~8천 칼로리는 족히 넘는다.ㅠㅠ 급격히 하락하는 자신감을 부여잡으며 거울 속 나에게 불러본다. 참 예뻐요~내 맘 가져간 사람”
 
그러나 2kg라는 살덩어리는 엄연한 현실. 외롭고 꿀꿀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보다 확실한 처방이 필요하다. 뭐가 있을까…1초 고민하고 바로 공연 예매창을 연다. 네가 힘들 때~곁에 있을게 / 삶이 지칠 때~힘이 되어줄게 / 인생 꼬일 때~항상 네 곁에 함께” <킹키부츠> 무대를 보며 씐나는 노래를 듣다 보면 기분이 확실히 업!되겠지?^^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공연 덕후다.
 
글 / 구성 : 박인아, 김대열 (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kmdae@inter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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