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 같은 신인과 여우같은 대선배, 조재현&옥자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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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대학로 <블랙버드> 연습현장. 연습실에 들어서는 대선배 조재현에게 옥자연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선후배간의 광경이었다. 하지만 연습이 시작되자 둘의 관계는 순식간에 전복됐다. 12살 소녀였던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남자를 15년만에 찾아온 여자. 이 한 맺힌 캐릭터 ‘우나’를 맡은 옥자연은 ‘레이’ 조재현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30년 가까운 연기 경력의 차이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인터뷰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터뷰가 처음이라 말을 잘 못한다며 말끝을 흐리던 옥자연은 막상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자 솔직하고, 적확한 표현으로 작품과 상대배우에 대한 코멘트를 내놓았다. 이 배우에게서 ‘날 것의 에너지’를 발견했다는 조재현의 평가에 수긍이 갔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두 배우는 대선배와 신인보다는 호흡 좋은 콤비로 보였다.

 
“인물 자체에 초점 둔 연극. 관객마다 해석 다를 것”
“사랑? 욕정? 어찌됐든 또라이죠.”

 
Q. 작품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네요. 성적 학대를 당했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온다는 설정에서 왠지 날카로운 사회적 메시지가 예상되는데요?
조재현(이하 조) : 어떤 메시지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연극은 아니에요. 큰 메시지를 던지기 보다는, 인물 자체에 포커스를 두는 극이죠. 피해자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감옥에 다녀온 가해자는 어떤 삶을 이어가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보다 보면 ‘우나는 15년만에 레이를 왜 찾아갔을까.’, ‘레이는 어떤 삶을 원하는 걸까?’처럼 인물의 삶 자체에 관객들의 관심이 향할 것 같아요. 결말에 대한 해석도 사람마다 다 다르고요. .
 
Q. 초연이 무대에 올랐던 8년 전보다 우리 사회가 개방적으로 변한 부분도 많지만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대해서는 더 엄격해졌죠. 무대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소재는 아니었나요?
조 :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킬만한 소재죠. 실제 사건의 가해자는 사실 아직도 감옥에 살고 있어요. 사건이 일어났던 영국에서 4년 감옥살이 하고, 모국인 미국에 돌아가서도 10년을 더 살고 있죠. 극 중에서 레이가 자신도 죄값을 치르느라 힘들게 살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사회적으로 따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으며 자란 우나보다는 덜 힘들었다고 봐요. 그래서 작가(데이비드 헤로우어)도 나중에 결말을 수정한 거겠죠. 2005년 영국 초연때는 레이와 우나 둘 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뉘앙스로 끝났는데, 바뀐 결말은 우나의 심리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거든요.
 
Q. 레이가 자신은 아동성애자와는 다른 범주에 있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렇다고 12살 소녀를 40대 아저씨가 100퍼센트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레이의 마음은 사랑과 욕정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해석하시나요?
조 :  반반 아니었을까 싶은데. 대본에 근거해서 보면 레이는 사교적이지 못하고 내성적이고 여자친구 사귀는 데에 흥미를 별로 못 느끼고, 생활수준은 중간 정도 되는 남자로 나와요. 사회성이 좀 부족한 사람인데, 해맑은 아이와 놀면서 대화도 되고 마음도 편했던 거지. 그러다가 도를 지나쳐 버린 거고.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나와요. 근데 뭐 이러나저러나 또라이지 뭐.(웃음)
 
 
“사업도 사명도 아니에요. 좋은 연극 올리는 즐거움 때문이죠.”
“내가 어려서 뛰어놀던 자리에서, 관객들도 놀 수 있었으면”

 
Q. 최근에는 영화 감독으로도 데뷔하셨고 연극도 꾸준히 올리시는데 이러한 활동들에서 사업가적인 마인드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문화계 발전에 힘을 보태겠다는 사명감(?)으로 보는 건 과한 해석일까요?
조 : 사업도 사명도 아니에요. 사업을 하려면 돈을 더 벌어야지. 돈도 잘 못버는데 사업이라고 하면 내가 좀 모자란 사람이지(웃음). 그렇다고 사명감도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즐거움 때문에 하는 거죠. 30년동안 좋은 연극을 만들었을 때의 즐거움과 그 연극을 보면서 좋아하는 관객들을 볼 때의 만족감 때문에 계속 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에는 연극계가 지금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작품이 무대에 올랐어요. 근데 지금은 힘든 건 마찬가지면서 작품이 다양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난 덜 힘들면서 다양한 연극을 해보고 싶어요. 공연장 운영도 해야 하니까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연극은 안되고.(웃음) 그래도 수현재에서 대관해주는 것도 그렇고 공연들이 나쁘지 않아서 어느 정도 수현재에 대한 신뢰가 쌓인 것 같아요. 뭐 아무튼 사명감은 아닌데. 공연계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그러려면 장관을 해야지.(웃음)
 
제가 고집하는 부분이 있긴 해요. 어떤 연극을 하느냐는 관객들이랑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 같아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자꾸 새롭고 다양한 연극으로 시야를 넓히는 거죠. 수현재씨어터를 이곳에 세운 이유도 비슷한 이유예요. 이 자리가 원래 서울대 문리대 운동장이었는데 어렸을 적에 많이 뛰어놀던 곳이거든. 내가 놀던 것처럼 관객들도 여기서 재밌게 놀게 만들고 싶었어요.
 
“우나는 공격형 캐릭터. 수비형인 레이보다 돋보여.”
“우나는 대학로 여배우들이 탐낼 역할”


Q. 극 분위기가 무겁고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몰입되던데요. 대사도 맛깔나고요.
옥 :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인 대사들이지만 그걸 툭툭 끊어서 주고 받아요. 레이와 우나가 서로 말을 끊기도 하고 짧게 주고받으면서 리듬감이 생기죠. 근데 대사가 짧아지면서 좀 더 함축적이게 된 거지. 짧은 말 안에 감정이 다 담기게 되니까.
 
Q. 주제의 무게감이야 어떻든간에 싸움구경이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라서 그런 거겠죠? 
조 : 맞아요. 오늘 평소 연습보다 더 리얼하게 싸운 것 같아.(웃음) 원래 욕 대사도 감정이 잘 안 실려서 빼곤 했는데 오늘은 잘 나오던데.
 
Q. 굳이 비교하자면 레이보다 우나가 더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작품 내에서 표현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잖아요.
조 : 그렇죠? 우나가 훨씬 돋보이지 않아요? 2인극에는 수비형 인물이 있고 공격형 인물이 있어요. 우나가 공격형이고 레이는 수비형이야. 난 <에쿠우스>의 알런처럼 공격형 캐릭터를 주로 해왔는데, 이번엔 수비형 캐릭터를 맡아서 그런지 내가 상대배우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걸 처음 느껴봤어요. 난 상대 페이스에 영향을 별로 안 받는 편이었는데. (웃음)
옥 : 제 남자친구는 대본 보고서 이건 레이를 위한 극 같다고 하던데요?(웃음) 우나가 연기하기 힘든 캐릭터인 건 맞지만 재현 선배가 같이 연기하기 너무 좋은 파트너라서 많이 도움받았어요.

첫 연습 때 깜짝 놀랐던 게 에너지는 주고 받아지는데 마음이 안 오가는 거예요. ‘아, 연예인이라서 그런가? 난 대체 어떻게 연기해야 하지’하고 걱정했는데 한 순간에 확 변하신 지점이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동물적으로, 제가 내뿜는 에너지만큼만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는데, 언제였더라… 딱 하루만에 마음이 확 전해지는 연기로 바꾸셨더라고요. 그래서 왈칵 눈물도 나고 같이 연기하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이 얘기를 연출님께 했더니 첫 연습 때 에너지가 전해진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전 시간 여유가 좀 더 있어서 준비를 많이 한 상태였고, 선배님은 아무 준비를 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저를 그냥 따라서 에너지를 주고 받았다는 게 대단한거라고요.
 
Q. 처음 대본 받고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옥 : 우나는 분명히 내가 잘 할 수 있는 역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대부분의 대학로 여배우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에요.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자라면서 느꼈을 법한 심리들이 우나에게 많이 담겨 있거든요. 우나가 워낙 특수한 환경에 처해 있긴 하지만, 누구나 사랑을 하다가 갑자기 버려지기도 하고 힘든 시기를 겪기도 하니까요. 연습하면서 되게 아프기도 했어요. 뭔가 두들겨 맞은 느낌으로 힘든 시기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기도 지나간 것 같고요.
 
“옥자연은 날 것의 에너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배우”
“인물 분석을 서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Q. 자연씨는 어떻게 캐스팅 된 건가요?
조 : 저희(수현재씨어터) 이사님이 적합한 배우를 찾다가 우연히 프로필을 보고 미팅했는데 느낌이 너무 잘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외모도 리딩도 딱 우나에 맞았다고 하던데. 미학과 출신에 싱어송라이터라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옥 : 아, 싱어송라이터라는 건 잘못 전달된건데. 앨범도 낸 적 없고, 혼자 작곡하고 노래하는 거라 활동 무대가 저희 집 옥상이거든요.(웃음)

조 : 유기농 배추 같은 친구에요. 연극 경력이 많은 건 아닌데 신선한 연기를 보여주니까. 제가 좋아하는 연기스타일이 '날 것' 같은 연기에요. 왜 케이팝스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보면 아마추어인데도 뭔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친구들이 있잖아. 이 연극도 그런게 필요하거든요. 대사나 몸놀림을 화려하게 보여주기 보다는 진짜 자신만의 무언가를 끌어내 보여주는 연기. 그걸 자연이가 어느 순간부터 하고 있더라고. 가끔 연습하다가 진짜 화내는 눈빛들이 스치기도 해요.(웃음) 그래서인지 같이 연습하면 피곤하다가도 힘이 나서 90분을 쭈욱 이어가게 돼요. 미끄럼틀 탄 것처럼. 아마 관객들도 그런 느낌이 들 겁니다. 배우와 관객들이 일치감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Q. 2인극이니까 서로 작품 얘기도 많이 나누시겠네요.
옥 : 아뇨. 저희는 인물 분석을 서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우나는 이런 인물이고, 레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안해요. 그냥 연습시작하면 씬 속에서 만나거든요. 극 속에서 서로한테 맞춰가는 거죠. 그런 방식이 이 작품에는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고요. 사실 선배들이 후배 배우 앉혀놓고 이 인물은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잖아요. 근데 재현 선배님은 그렇지 않으셔서 대선배인데도 편하게 연습할 수 있는 거 같아요.
 
Q. 자연 씨는 유기농 배추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선배에게도 별명 하나 붙여주세요.
옥 :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분이세요.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는 이 연극처럼요. 음… 재현 선배는 살갑지는 않지만 신뢰할 수 있는 분이에요. 누가 선배를 여우 같은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맞는 말 같아요. 대본 하나도 안 외웠다고 하고선 막상 연습 들어가면 술술 다 하시더라고요. 시험날 아침에 공부 하나도 안했다고 거짓말하는 전교 1등 학생 같달까요.(웃음)
 
글: 김대열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kmdae@interpark.com)
사진 : 김윤희(www.alstudi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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