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조작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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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조작이 가능할까?
기억 조작을 다루는 다양한 작품들, 현실은 어떨까?

이 기사는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26년 독일, 저명한 심리학자 그리첸 슈워츠 박사의 대저택에서 방화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의 생존자는 입양된 4명의 아이들과 전신 화상을 입어가며 이들을 구한 보모 메리 슈미트. 하지만 네 아이는 화재의 충격으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이들의 보모이자 박사의 연구조교였던 메리 슈미트가 용의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였던 그녀는 수사 도중 도주하고, 사건은 조용히 잊혀져 가던 12년 후 어느 날, 아이들의 눈 앞에 사건의 진상이 펼쳐진다.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는 동화 <메리포핀스>를 뒤집은 심리추리스릴러 극으로, 1926년 나치 정권 아래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작품 속 네 아이는 슈워츠 박사의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매주 ‘수요일’의 기억이 없었다는 것, 그 때마다 신체 곳곳에 알 수 없는 상처가 늘어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들은 ‘기억 조작’ 실험의 대상이었다. 박사는 수요일마다 아이들을 학대하고, 그 기억을 없애는 실험을 반복하며 인간의 기억을 얼마만큼 조절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결국 작품 속에서는 아이들이 모든 기억을 되찾게 되고, 실험이 불완전했음을 보여준다.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에서 다뤄진 ‘기억 조작’은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연구될 정도로 매력적인 소재인 만큼, 다양한 장르에서 활용되어 왔다. 특히 영화에서는 단골소재로 등장하는데, 기억을 다루는 영화들 중에서도 <블랙 메리 포핀스>처럼 속에서는 선택적으로 기억을 ‘삭제’하는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자.
 
#당신과의 힘들었던 기억은 지울래, <이터널 선샤인>
 
평범한 남자와 따뜻한 여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러다 지쳐 이별을 택하고, 서로의 기억으로 힘들어하다 그 간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속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각각 ‘라쿠나’라는 회사를 통해 기억을 없앤다. 조엘은 연인과 관련된 각종 물건들(일기, 편지, 함께 들었던 음악 등 온갖 잡동사니)을 통해 기억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네 기억 따위 빛 한 방이면 삭제 완료, <맨 인 블랙>
 
영화 <맨 인 블랙>에서는 외계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뉴럴라이저’라는 기억제거장치를 사용한다. 반짝 빛나는 불빛을 잠깐 마주하고 나면 기억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 작품은 기억 조작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이 쉽고 간편한 기억제거장치 덕분에 각종 패러디와 짤방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어떨까? 기억을 지우거나, 새롭게 심는 등 조작이 가능할까?
실제 현실에서는 없는 기억을 만들어 내거나 기존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블랙 메리 포핀스> 속 1920년대 독일처럼 아직 연구단계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기억 ‘삭제’와 ‘삽입’ 중 좀 더 쉬운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삽입’이다.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 기존의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더 쉽다는 것. 물론 소설이나 영화처럼 방대한 기억을 한 번에 심는 것은 어렵지만, 흔히 ‘오기억(false memory)’, 혹은 ‘오정보 효과(misformation effect)’라고 불리는 현상은 교양 심리학 등에서도 쉽게 마주할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간단한 예로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인간 기억 전문가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들을 살펴보자. 그녀의 연구 중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쇼핑몰 미아 실험’(1993)이다. 그녀는 피실험자 24명에게 실제 있었던 어린 시절에 관한 추억 3개와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는 가짜 기억 1개를 적은 책자를 읽힌 후, 관련된 내용을 상세히 적게 했다. 실험 결과 25%의 사람들이 쇼핑몰에서 길을 잃었다는 가짜 기억을 만들어냈고 책자에 없는 상세한 부분까지 기억해냈다. 해당 실험은 타 실험자들을 통해 비슷한 사례를 쌓아왔다.
 
이외에도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유도신문을 통해 기억을 왜곡하는 방법, 화질이 선명한 인쇄 광고를 통해 실제로 제품을 써봤다는 기억을 심는 방법 등 기억을 ‘삽입’하는 데는 방대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미묘한 단어의 선택이나 분위기, 타인의 증언 등으로 가짜 기억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도네가와 스스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이 쥐의 신경세포에 광섬유를 심어 새로운 가짜 기억을 심은 사례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블랙 메리 포핀스>에 등장하는 기억 ‘삭제’는 불가능한걸까?
물론 정보를 심거나 새로운 정보로 실제 기억을 덮는 것보다는 매우 어렵지만, 최근 들어 일부 성공사례가 알려졌다.

에드워드 멜로니(Edward G.Meloni)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팀은 ‘제논가스’를 통해 실험쥐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실험에 성공했다. 연구진은 쥐가 특정 장소에 갈 때마다 쥐의 다리에 전기 충격을 가했고, 이후 그 장소에 갈 때마다 몸이 경직되는 공포 반응을 확인했다. 그러나 쥐에게 제논 가스를 맡게 하자 공포 반응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제논가스는 각종 특수 램프나 레이저, 의료 진단 등에 쓰이는 희귀한 기체 원소인데, 공포 기억을 형성하고 재현하는 특수 단백질(NMDA)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이외에도 중증 우울증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전기경련요법(ECT) 등이 있으나 특정 기억을 완전히 없애는 건 아직까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트라우마, 우울증 등의 치료를 위해 인간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기억을 모두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처럼 부정적으로 활용되는 일만은 없길 바라야겠다.


글: 조경은 기자 (매거진 플레이디비 kejo@interpark.com)
사진: 공연 사진 (쇼온컴퍼니 제공) / 영화 사진 (IMDb) / EBS 원더풀사이언스 '기억의 재구성'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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