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성적학대인가 사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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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후반부 반전이 있습니다.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15년전 12살인 우나와 마흔살인 레이는 한 모텔방에서 섹스를 하고 레이는 미성년자 성적학대 혐의로 6년을 감방에서 보낸다. 피터라는 새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레이 앞에 어느 날 스물일곱살이 된 우나가 그를 찾아온다.

6년형을 살고 나온 레이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고 이제서야 겨우 직장도 구하고 만나는 여자도 있다며 우나를 경계한다. 우나는 자신 역시 열 두살 때 살던 그 동네 그 집에서 이사도 안가고 지금껏 살아왔고 (얘네 엄마도 참 잔인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끔찍한 시선 속에서 힘들었다. 아무 것도 시작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항변한다. 두 사람은 레이의 사무실 라커룸에서 15년전 그날 ‘그 일’에 대한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블랙버드’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왜. 그를. 찾아갔을까.  
 
우리가 얼핏 해볼 수 있는 추측들은 초반부에 무참히 밟힌다. 레이를 처음 만난 우나는 복수심에 불타는 듯 보이고 냉소적이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아닌 예상치 못한 다른 모습이다.
 
현재 피터로 살고 있는 레이는 함께 살고 있는 여자에게 우나와의 일을 고백했다고 말한다. 정확히 “내가 마흔 살 때 불법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미성년자랑 섹스했다고. 너무나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고” 우나는 말한다. “그것도 말했어? 너무나 어리석은 실수를 석 달에 걸쳐 저질렀다는 것도? 심지어 둘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도?”

어느 샌가 작품은 두번째 질문은 던진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건가. 진실은 무엇인가  
 
소아성애자인지 변태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레이는 범죄자이고 우나는 피해자이다. 하지만 그렇기만 했다면 우리는 그저 팔짱을 끼고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올바른 도덕적 가치관을 유지한 채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연극 한편을 무난하게 봤을 것이다.

작가인 데이비드 해로우어가 인터뷰에서 “소아성애적 관점은 이 희곡의 흥미로운 부분이 아니며 사실 가장 재미없는 부분”이라고 말한 것처럼 중요하지가 않다.  <블랙버드>가 10여년이 넘는 동안 전세계 곳곳에서 무대에 올려지며 평단과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작품에서 정의하지 않은, 오롯이 관객이 해석해야 하는 인간의 어떤 이상한 행동과 애매한 회색지대에 있다.
 
둘의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15년이 흘렀다. 15년은 두 사람에게 모두 병적인 시간이다. 극은 후반으로 갈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새로운 진실의 뿌리가 드러난다. 그날의 그 일은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기억을 통해 진술되고 하나씩 하나씩 퍼즐처럼 맞춰진다. 하지만 퍼즐의 그림은 맞춰질수록 모호해지는 에셔의 그림만 같다. 두 사람을 쫓아가며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던 관객은 후반부에 뒷통수를 맞는 듯한 쇼킹한 순간을 맞는다.
 
사랑했던 연인이 결국 이별을 하면 수백번 수천번 과거로 시계를 돌려 어떤 시간 어디서 잘못 됐는지, 그때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했더라면, 수많은 가정을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헤어진 연인처럼 (적어도) 우나는 그날의 기억을 곱씹었다. 레이의 말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다. 하지만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해주지 않는다. 
 
연극 <블랙버드>는 연극을 많이 본 관객들에게 이전과 사뭇 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스토리 텔링이 아니라 두 인물의 휘몰아치는 대화 속에 파도처럼 휩쓸려 들어가 이들의 감정을 현미경처럼 미세하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선악으로, 또는 정답으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소아성애나 성적학대와 같은 금기시된 소재로 인해 불편하긴 하지만 이 연극을 도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이들에겐 15년이 흘렀고 지금 당장은 모텔방에서 뒹군다 한들 엄청난 나이차에 눈살 찌푸리게 할 수 는 있을지언정 부적절하거나 불법적인 관계는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과거의 그 사건으로 마음은 고통스럽다. 더 큰 고통은 이들의 관계가 두 사람의 욕망에 기인하고 더 나아가 사랑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던진다는 사실이며 그 과정에서 설득 당하고 있는 자신이다.
 
2008년 추상미, 최정우 주연으로 초연된 뒤 8년만에 무대에 오르는 블랙버드는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공연된다. 작가가 작품을 수정해서 대사들을 포함해 마지막 장면 등이 예전 버전과 달라졌다.
 
 
 
2016년 상반기 브로드웨이 연극에선 미셀 윌리엄스와 제프 다니엘이 우나와 레이를 연기했다

<후일담>
블랙버드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필자 외에 공연을 본 다른 세명의 에디터의 해석이 모두 달랐다.
기사 안에 묘사한 “뒷통수를 맞는 듯한 쇼킹한 순간”의 장면은 사실 내 경우엔 등골이 송연한 정도의 공포에 가까웠다.

글: 김선경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uncanny@interpark.com)
사진 제공 : 수현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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