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 전부를 쏟아요”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강영석, 백석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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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고 엉뚱한 사람, 섬세하고 진지한 사람. 지난 2일 진행된 강영석, 백석광 배우와의 인터뷰는 서로 전혀 다른 결을 가진 두 사람의 세계를 잠시 엿본 자리였다. 허물없이 툭툭 던져진 강영석의 말들은 자주 유쾌한 웃음을 안겼고, 세심한 사고와 생생한 비유가 곁들여진 백석광의 이야기는 은은한 여운을 남겼다. 공통된 것은, 이들에게서 무대를 향한 진실한 애정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국내 첫 무대에 오른 연극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고군분투하다 얼떨결에 드랙퀸이 된 케이시의 이야기를 그린다. 강영석은 뜻하지 않게 드랙퀸이 되어 눈부신 디바로 성장해가는 케이시를, 백석광은 우아하고 노련한 드랙퀸이자 케이시의 멘토인 트레이시를 연기한다. 함께여서 더욱 순도 높은 무대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두 배우의 이야기.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강영석
‘알앤제이’를 연습할 때 이 작품의 대본을 받았어요. ‘알앤제이’의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빠져있을 때라 귀찮아서 안 읽었는데(웃음), PD님이 아예 대본을 종이로 인쇄해서 주시라고요. 읽다가 재미있어서 한 번에 다 봤어요.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죠.

백석광 따뜻함을 느꼈어요. 제가 넷플릭스에서 ‘포즈’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는데, 거기 오갈 데 없는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는 ‘마마’라는 존재가 나와요. 그 중 트렌스젠더들도 있고요. 그 드라마에서 느꼈던 따뜻함을 제가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했고, 주인공의 안타고니스트(적대자) 역할을 많이 했던 터라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게 좋았어요.
 
[케이시와 트레이시]
강영석
드랙쇼를 하는 케이시에게 아내가 “왜 하필 이거야?”라고 묻는 장면이 있잖아요. 솔직히 대사만 봤을 때는 왜 하필 이건지 케이시의 마음을 잘 몰랐어요. 근데 실제로 여장을 하고 쇼를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한 번도 안 입어본 옷을 입어보고, 한 번도 안 해봤던 동작을 하잖아요. 처음엔 쑥스러운데, 하다 보면 느껴지는 묘한 희열이 있어요. 사람들한테서 예쁘다는 말도 들으니까 더 예뻐지고 싶고, 춤도 더 멋있게 추고 싶고, 옷도 더 화려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 마음을 느끼고 나니까 케이시가 드랙쇼를 점점 더 사랑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무대에서도 잘 전하고 싶어졌어요. 

백석광 트레이시가 이 극에서 맡은 역할은 케이시의 조력자에요. 어떻게 하면 그 역할을 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케이시가 자신의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어요.

공연에 나오지는 않지만, 트레이시에게도 힘든 시간들이 있었을 거에요. 크게는 자라면서 가정에서 배제되고, 그 다음에는 사회에서 배제되었을 것 같아요. 타인들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당연한 과정이 그에게는 매우 힘들었겠죠. “드랙은 반짝이 장갑 속 움켜쥔 주먹 같은 거라고”라는 렉시의 대사가 그런 것들을 대신 표현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사랑도 있었을 테고, 배신도 있었을 테고, 폭력적인 순간도 있었을 테고, 슬픔과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겠죠. 하지만 이 작품은 케이시의 성장 드라마고, 트레이시가 자신의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극에서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 같아요.
 
[드랙쇼]
백석광
전 무용을 전공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주위에 드랙퀸, 드랙킹이 많았어요. 다들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자기를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분들이라 보고 있으면 동경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드랙퀸이 되어볼 수 있다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드랙쇼 장면도 잘 해보고 싶었고요.

강영석 연습할 때 다 같이 드랙쇼를 보고 왔어요. 드랙의 정서, 문화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편견이 없는 분들이어서 우리가 뭘 해도 되겠구나 싶었어요. (이)상이도 처음엔 살을 좀 빼야겠다고 하더니 드랙쇼를 본 뒤엔 그냥 있겠다고 하더라고요. 꼭 여성스러워야 한다든가, 몸이 어때야 한다든가 하는 편견이 없고 마인드가 멋진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저도 마음이 더 열렸어요.  

처음 여장을 했을 땐 되게 생소했어요. (브래지어) 끈도 막 내려가고, 불편하더라고요. 그런데 분장을 마치면 에너지가 진짜 달라져요. 여자들도 정말 화려하게 꾸몄을 땐 자세가 달라진다고 하잖아요. 남자들도 그런 것 같아요. 자세도 달라지고, 보는 사람도 다른 기운을 느끼게 되고.

최근에 의상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한 번 있었어요. 제 속옷 위에 서포터(보정용)를 입고 그 위에 분장팀이 주는 팬티를 입는데, 스타킹을 벗다가 팬티까지 같이 벗어버린 거에요. 근데 제가 그걸 몰랐어요. 반만 걸치고 움직이다가 어? 하고 다시 입었죠(웃음).
 
▲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공연 사진(강영석, 백석광)

[우리 팀]
백석광
이번에 처음으로 더블캐스팅으로 공연을 해봤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트레이시 역 성지루 선배님은 물론이고, 같이 하는 모든 배우들에게 많이 배웠어요. 연습 때는 배우들이 같이 작품을 만들면서 서로 가진 것들을 공유하지만, 일단 공연이 시작되면 각자 경주마처럼 달려나가요. 각자 따로 무대를 만들어 가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이 가진 색깔이 진해지더라고요. 그래서 3명의 케이시를 만날 때마다 ‘아, 이 친구는 이런 느낌으로 가는구나’하면서 새로운 걸 느끼고, 그 호흡에 맞춰서 저도 그때그때 달라지게 돼요. 

영석이가 연기하는 케이시는 굉장히 샤프하고 정교해요. 케이시의 전사 같은 것들이 선명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상이는 굉장히 스트레이트한 감각 속에서 케이시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짚어내는 것 같아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현실감각이 분명한 케이시죠. (박)은석이는 ‘조~!’하고 아내를 영어 발음으로 부를 때부터 우리가 정말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줘요. 그리고 럭비공처럼 매번 바뀌어요. 공을 매번 다른 각도로 던져주니까 그걸 받아내는 재미가 있죠. 세 사람이 각자 다르게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는 게 참 재미있어요. 제가 진짜 트레이시가 된 느낌이에요. 
 
강영석 두 분의 트레이시는 정말 많이 달라요. 지루 선배님은 뭐랄까, 애절함이 있어요. 힘들어 보인다는 게 아니라 한 같은 게 느껴져요. 석광 형은 아주 진솔하죠. 너무 쇼를 잘 하셔서 이 사람이 석광이 형인지 진짜 드랙퀸인지 싶을 때가 있어요. 그 쪽으로 가셔도 잘 하시지 않을까(일동웃음).
 
▲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공연 사진(백석광)

[서로가 보는 모습]
강영석
석광 형은 예전에 연출을 하셔서 그런지 되게 세심해요. 깊게 생각하고요. 전 그런 성격이 아니라 되게 부럽더라고요. 전 뭐든 몸으로 직접 해보면서 알아가는 스타일이라 대본에 뭘 잘 쓰지도 않아요. 아, 대본을 안 본다는 건 아니고요. 잘 써주세요(웃음). 형을 보면서 많이 배워요.

백석광 영석이는 너무 잘해요. 연습실에서도 연기를 할 때마다 늘 100%를 해요. 대충 동선만 체크하거나 힘을 조금만 들이거나 하지 않아요. 모든 순간에 전부를 쏟아요. 연기하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순도가 높아요. 같이 하는 입장에선 ‘정말 진실되구나, 정말 최선을 다하는구나’ 싶어서 힘을 받아요. 저도 자연스럽게 최대한 순도를 높여서 연기를 하게 되니까 너무 좋은 파트너죠.
 
[배우로 산다는 것]
강영석 
어떤 터닝포인트가 있다기보다 그냥 놀다 보니 배우가 됐어요(웃음). 연기학원 다니면 재미있잖아요. 공부도 안 시키고 수업 과정이 노는 거니까요. 그러다 보니 연기를 전공하게 됐고, 수업 때도 대본 갖고 놀다 보니 (배우가) 됐어요. 대학교 2학년 때 ‘아이 러브 유’라는 뮤지컬에 처음 출연했는데, 장면 하나 마치고 박수를 받으면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지금도 커튼콜 때가 제일 기분 좋아요.

케이시처럼 절박함 때문에 변화해야 했던 경험을 꼽는다면…생각나는 게 한 번 있어요. 뮤지컬 ‘그날들’에서 상구라는 역할을 맡았었는데, 극의 분위기를 한번씩 환기시켜주는 감초 같은 역할이에요. 웃겨야 되는 역이죠. (박)정표 형이 저랑 같은 역할을 맡았었는데, 형은 워낙 웃긴 분이잖아요. 전 그렇지 않아서 연습실에서 ‘재미없어’라는 말을 한번 들으면 온 몸에서 식은땀이 났어요. ‘나는 이런 것도 못하는구나’ 하다가 정말 이를 악물고 웃기려고 했어요. 그 과정에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 다음엔 뭐든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장유정 연출님께 고마워하고 있어요(웃음).
 
백석광 전 연출을 공부하다가 배우가 됐어요. 연출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실험들을 해봤는데, ‘말’을 찾는 것이 되게 어려웠어요. 내가 세상에 말 걸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하는데, 하고 싶은 말을 찾는 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그 사이의 시간에는 먹고 살 길이 없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이 안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찾다가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게 됐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게 나와 잘 맞는 일이었구나 싶어요. 할 말을 억지스럽게 찾지 않아도 누군가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말을 대신해서 전하는 일이 제게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오래 잘 해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예전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더 잘 할까, 더 잘 될까’를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제 인생의 페이지가 하나 넘어간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하면 내 근로환경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스텝들과 동료들, 제작사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배려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조금은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어차피 어른이 될 거라면 좋은 어른이 되야 할 텐데, 싶고요.
 
[나라는 사람, 그리고 관계]
백석광
나라는 사람은…지금 문득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같이 공연하는 사람들과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역할들을 사랑하고, 그 영향을 받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요.

우리가 하는 일은 이별이 잦은 일이잖아요. 배우는 이렇게 잦은 이별을 겪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어차피 이별할 거니까 대충 만날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사랑을 줄 수도 있고,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죠. 혹시라도 미운 감정이 생길 때는 그 감정에 치우치기보다 심리적인 간격을 좀 두려고 해요. 내 마음이 힘들면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또 달라지잖아요. 그런 것들을 잘 풀어나가야 좋은 일터에서 좋은 작품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강영석 전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받는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걸 정말 싫어했고,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사람이 혼자 여행가는 사람이었어요. 외로움을 많이 탔어요. 막내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친가 외가 다 합쳐서 온 집안에서 막내거든요. 근데 요즘은 혼자 있는 것도 좋더라고요. 여행은 혼자 못 갈 것 같은데, 집이나 카페에 혼자 있는 건 괜찮더라고요.

저에 대해선 예민한데, 대인관계에서는 둔한 편이에요. 누굴 싫어하거나 해본 적이 없어요. 공연하는 팀이랑 엄청 친하게 지내는데, 그래서 서운해 하는 사람들도 생겨요. 공연을 하나 하면 스텝들까지 40~50명의 사람들을 만나잖아요. 1년에 공연을 많이 할 때는 6개까지 하니까, 정말 많은 단톡방이 생겨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니까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챙기려면 하루 종일 핸드폰만 붙잡고 있어야 되고, 그래서 어느 순간 카카오톡이 싫어졌어요. 형도 알다시피 제가 단톡방에서 말을 잘 안 하잖아요. 같이 공연을 할 때는 다 너무 좋고 사랑하는데, 다른 공연 가면 또 그 사람들이랑 그렇게 지내야 하니까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아요. 그래서 무뎌지는 것 같아요. 너무 그러면 안 될 것 같긴 한데...마음을 다잡아야겠어요(웃음).
 

[앞으로의 날들]
강영석
새해에도 뭐든 쉬지 않고 쭉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2015년부터는 2~3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쉬고 싶어지는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쭉 하고 싶어요. 지금은 그런 기운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요.


백석광 작년 연말에 건강검진을 받았어요. 처음이라 좀 무섭기도 했는데, 이 일을 계속해서 잘 이어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받은 거에요. 마라톤처럼 이 일에도 페이스가 있는데, 페이스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연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아요.
 

또 하나의 바람이 있어요. 예전에 ‘삼월의 눈’에 관광객 역할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주인공 장오를 연기하는 신구 선생님을 보면서 나중에 저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해서 나중에 ‘삼월의 눈’에 출연하고 싶어요.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쇼노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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