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채찍질하는 사이” 함께 진화하는 연출가와 배우, ‘영웅본색’ 왕용범&유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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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와 배우, 나이는 다섯 살 차, 그러나 직책 혹은 나이와 관계없이 서로를 진심 어린 존중의 빛으로 대하는 왕용범과 유준상은 자신들의 관계를 “서로 채찍잘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함께여서 더욱 큰 힘을 낼 수 있고, 함께여서 창작뮤지컬 초연이라는 지난한 작업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이다.

2009년 뮤지컬 ‘삼총사’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잭더리퍼’, ‘프랑켄슈타인’, ‘벤허’를 거쳐 얼마 전 개막한 ‘영웅본색’에서 또다시 손을 맞잡았다. 세계적 흥행을 거둔 동명의 영화를 무대화한 이번 뮤지컬은 영화 1, 2편 시리즈를 압축한 밀도 높은 서사와 LED패널 1천여장을 활용한 화려한 무대로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이다.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역사를 함께 써나가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난 20일 만나 이야기를 청했다.
 
Q 이번 ‘영웅본색’은 영상에 굉장히 힘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유준상:
후회 안 할 만큼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작품이다. 매 장면에서 새로운 영상이 나온다. 나도 라스베가스 등 여러 곳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는데, 이렇게 LED가 매 씬마다 연결되는 공연은 처음 봤다.

왕용범: 처음 작품의 컨셉을 잡을 때 홍콩을 ‘빛의 도시’로 그리자고 얘기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 영상을 적극적으로 쓰게 됐다. 보통 뮤지컬 장면이 적게는 20개, 많게는 40개로 이뤄지는데, 우리 작품에는 총 107개 장면이 나온다. 영화 못지 않게 풍성한 작품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서 공연을 보신 분들이 “영화 같다”, “아이맥스에서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다.

보통 무대 영상을 쓸 때 평면적으로 보일 때가 많은데, 영상이 실사 같지 않으면 배우와 붙을 때 이질감이 생긴다. 그래서 영상이 입체적인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말 홍콩의 어느 곳에 배우가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장면을 구성했다.

이렇게 큰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시장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창작뮤지컬이 한국에서만 공연되면 제작비를 최대한 아끼는 쪽으로 만들어지는데, 이 작품은 전세계 ‘영웅본색’의 마니아들이 보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 실제로 얼마 후 라스베가스 공연 관계자들이 공연을 보러 오기로 했고, 중국 투자자들도 공연을 볼 예정이다.
 
▲ 뮤지컬 ‘영웅본색’

유준상: 무대 위 이야기가 영화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어떤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정말 숨죽여 무대를 보신다. (객석이) 너무 조용해서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건지 흔들린 적도 있는데, 커튼콜 때 반응이 너무 좋아서 안심했다. 내가 지금까지 19회 공연을 했는데, 그 회차를 전부 다 보러 오신 분도 있을 정도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고 하시더라. 나도 하면 할수록 재미있다. 배우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정말 최선을 다해 무대에 임하고 있다.

Q ‘영웅본색’을 뮤지컬로 만드는 작업은 언제부터 구상한 것인가.
왕용범:
젊었을 때부터 꿈꿨던 것이다. 그걸 하나씩 이뤄나가고 있으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연출가인 것 같다. 처음 ‘프랑켄슈타인’을 뮤지컬로 만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그게 잘 되겠어?’라고 했는데 성공했고, 일본에도 수출되어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얼마 전엔 (일본에서) ‘다시 보고 싶은 뮤지컬’ 1위에 꼽혔다고 하더라. ‘벤허’도 처음엔 ‘이걸 어떻게 뮤지컬로 해?’라고들 했는데 잘 됐다. ‘영웅본색’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인물들의 절절한 속마음을 음악으로 만나니 좋다고 한다.

유준상: 뮤지컬 ‘잭더리퍼’를 할 때 잭이 회전무대 위에서 휘파람 부는 장면이 있었다. 그 때 연출님이 그 장면에 대해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오마주한 것이라며 언젠가 ‘영웅본색’을 뮤지컬로 만들 거라고 했다. 그게 10년 전의 일인데 이번에 실제로 해낸 거다. ‘삼총사’를 할 때는 ‘프랑켄슈타인’을 할 거라고 얘기했고, ‘프랑켄슈타인’을 할 때는 ‘벤허’를 할 거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다 지켰다. 그만큼 머리 속에 많은 것이 기록돼 있고, 그걸 실제로 구현해내는 분이다. 연출님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행복할 따름이다.
 
Q 유준상은 영화에서 적룡이 연기했던 송자호를 맡았다. 연습과정은 어땠나.
유준상:
느와르가 함축된 대본을 어떻게 풀어낼지 많이 고민했다. 공연을 한 달 반 남겨두고 런쓰루를 돌았고, 연출님이 하루 만에 1, 2막 동선을 다 정해줬다. 배우들도 대사를 다 숙지한 상태에서 노래까지 부르며 한 씬 한 씬을 만들었다. 이번 공연은 영화 같은 작품이기 때문에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흐름이 깨진다. 그래서 1초 단위로 동선을 잡으며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썼다. 얼마 전에는 불꽃이 많이 안 나온다는 이유로 총을 다른 것으로 바꿨다. 공연 때 스텝들이 무대 아래에서 계속 화약(총알)을 만든다. 모든 것을 실제처럼 하고 있다.

왕용범: 송자호는 평상시의 유준상 배우와 많이 닮은 인물이다. 유준상 배우는 창작뮤지컬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연락하는 분이다.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배우의 에너지인데, 요즘은 무대 정신이 많이 희미해졌다. 유준상 배우는 공연을 할 때 가장 먼저 대본을 외운다. 선배가 그렇게 하니까 후배들도 빨리 외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준상 배우가 참여하는 공연은 어느 공연보다 에너지가 크고 화합이 좋다. 유준상은 스텝 한 명 한 명까지 챙겨주는 배우고, 요즘처럼 상업화되어가는 무대에서 본이 되어주고 기둥이 되어주는 배우다.

매체에서의 배우 유준상과 무대 위에서의 배우 유준상은 많이 다르다. 방송에서는 ‘국민 남편’이지만, 무대에서는 액션 배우다. 칼도 쓰고, 격투기도 하고, 이번엔 쌍권총을 들고 총격전까지 벌인다. 그만큼 박력 있고 에너지 넘치는 액션 뮤지컬 배우다.
 
Q 남자들 간의 의리와 우정이 요즘 세대에게는 공감하기 힘든 소재일 수도 있는데.
왕용범
: 그 부분도 많이 생각했다. 요즘 세대는 더치페이를 하는 세대이지 않나.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가 젊은 세대에게 신선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이든 관객들은 잊혀진 가치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젊은 세대는 ‘저런 것에 목숨을 걸 수도 있구나, 저런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날 수도 있구나’라고 새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또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배우의 연기다. 배우가 얼마나 그 상황을 진심으로 믿고 연기하는지, 얼마나 진실된 감정이 전달될지가 중요하다. 공연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 배우가 매회 눈물을 흘리며 진실된 연기를 하고, 그것이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
 
Q 퀵체인지가 아주 많다고 들었다. 에피소드는 없었는지. 
왕용범:
첫 공연에서 송자걸을 맡은 배우가 다음 장면에 나와야 되는데 옷을 갈아입어 버려서 못 나온 적이 있다.

유준상: 자걸 역은 특히 퀵체인지가 많다. 우리 공연이 워낙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고, 무대가 한순간 다른 공간이 된다. 그렇게 전환되는 시간이 처음엔 8마디였다가 다시 6마디, 4마디로 줄었고, 이제는 그냥 바로 나오게 바뀌었다. 한 씬 한 씬이 영화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연습하면서 정말 힘들고 놀라웠던 건, 단 1초를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을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총알 탄피의 양도 장면마다 다르다. 총을 쏘는 사람이 얼마나 분노했는지에 따라 불꽃의 강도가 다른 거다. 그만큼 디테일하다. 이게 창작뮤지컬이기 때문에 더 대단한 것 같다.
 
왕용범: 창작뮤지컬이 어려운 것이, 세계 시장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가 마블, 디즈니랑 싸우는 것처럼 창작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이랑 싸워야 하는데, ‘오페라의 유령’은 전세계에서 몇 십년의 노하우를 갖고 만들어진 컨텐츠가 아닌가. 그런 작품에 지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영웅본색’을 라스베가스에서도 볼 수 있는 날이, 유준상 배우가 해외에서 ‘영웅본색’의 오리지널 배우로 소개되는 날이 오면 좋겠다.

유준상: 실제로 ‘프랑켄슈타인’의 일본공연에서 그렇게 소개된 적이 있는데, 너무 뿌듯했다. 90년대 초만 해도 브로드웨이와 일본에 가서 공연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쯤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일본을 넘어설 수 있게 됐다. 특히 ‘영웅본색’은 어느 나라에 가도 각광받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 때는 몰라도 우리 다음 세대에서는 창작뮤지컬이 세계에서 BTS 못지 않게 큰 위상을 알리게 될 것 같다.
 
Q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정서나 메시지는 무엇인가. 
유준상:
송자호가 친구와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잃어가는 것들이 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많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간다. 극중 ‘넌 신의 존재를 믿어?’라는 대사가 있는데, 연출님의 작품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신의 존재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그랬고, 이렇게 현대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그런 주제를 구현하는 거다. 그래서 어떤 때는 연출님과의 작업이 굉장히 철학적으로 느껴진다. 지금도 계속 연습일지를 쓰는데, 매회 공연이 채찍질처럼 느껴지고, 매회 새롭게 다가온다. 

왕용범: 유준상 선배야말로 그런 면에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연예인은 시간이 돈인데, 다른 배우들을 잘 하게 하기 위해 연습 끝나고 남아서 같이 연습해주신다. 앙상블이 격렬한 안무를 하다 보니 늘 배고파 하는데, 그러면 선배가 카드를 준다. 그 카드로 100만원, 200만원어치 간식을 사서 쌓아두는 거다. 돈이 많아서 주시는 게 아니다. 돈 이상의 가치, 명분에 의해 움직이시는 모습 때문에 큰형님이라고 불리시는 것 같다.

‘영웅본색’의 송자호도 그런 인물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친구와 동생을 위해 대신 죄를 짓고 죄값을 인정하고 희생한다. 그런 자기 희생의 가치, 물질적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가 어떤 관객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가족관객들도 많이 오는데, 그런 데서 감동을 느끼시는 것 같다.
 
Q 공연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도 있을 텐데, 그렇게 후배들을 포용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나. 
유준상:
오직 관객을 위해서 좋은 공연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정말 크다. 공연 전에 늘 기도한다. 관객, 그리고 스텝들과 하나되는 공연을 하게 해달라고. 그게 내게는 늘 가장 큰 화두이고, 그러려면 어떻게든 화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또 내가 꼰대가 되면 후배들이 아무도 안 다가온다. 앙상블 중엔 부모가 내 또래인 친구들도 있는데(웃음), 늘 친구처럼 대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나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왕용범: 창작뮤지컬 초연은 잘될지 안될지 모르고 변수도 많기 때문에 배우들이 잘 안하려고 한다. 특히 스타 배우들일수록 다 차려진 밥상 위에 자신이 올라가 빛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한다. 유준상 선배가 그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늘 창작뮤지컬에 출연해주시는 것이 큰 희생이고 투자다. 그런 애정이 있어서 ‘영웅본색’이 있는 것이고, 이런 분들이 없다면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배의 팔순 잔치 선물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물을 가득 받아놓고 모셔서 ‘노인과 바다’를 하려고 한다. 그 때도 꼭 오셔서 공연을 봐주시면 좋겠다.
 

Q 영화 ‘영웅본색’ 3편도 뮤지컬로 만들 계획이 있는지.
왕용범:
없다. 이번 뮤지컬은 영화 1, 2편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영화와 별개로 이 자체로 한 편으로 완결된 작품이다. 어느 평론가분께서 공연을 보고 “왕용범이 오우삼이다”라는 평을 남겨 주셨는데, 뮤지컬 자체로의 독창성을 인정해 주신 것 같아 너무 감사하다. 앞으로도 영화와 별개로 뮤지컬 자체로서 이 공연이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Q 유준상 배우는 매체 활동도 바쁘게 하고 있는데, 여전히 뮤지컬을 놓지 않는 이유는.
유준상:
(뮤지컬이) 어려운 상황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놓을 수가 없다. 난 사실 뮤지컬이 뭔지도 몰랐다. 동국대 연극영화과 재학시절에도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연극 중심이라 나보고 뮤지컬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 때 2000년대 초반 했던 뮤지컬이 ‘더 플레이’ 였고,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왕용범 연출님이 나를 ‘삼총사’에 캐스팅했다. 그 때부터 창작뮤지컬 다섯 편을 함께 해온 거다.
 

드라마와 영화는 내가 연기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계속 하는 것이고, 무대에서 얻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도 계속 할 수 있는 것 같다.
 

왕용범: 서로 안지 12년 됐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워낙 에너지가 넘쳐 배우들 사이에서 ‘힘든 게 뭐야? 지친 게 뭐야?’라는 유행어를 만든 분이다.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금방 질리기도 한다(웃음). 그래서 새로운 면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번엔 이런 매력으로 접근하셔야 된다”고 말씀드리고, 선배님도 거기 맞춰 새로운 면을 보여주신다. 서로 채찍질하는 사이다.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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