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만나러 간다” 정순원·김선호·이강우·이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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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 연말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곧 무대에는 오래 전 학창시절의 추억을 돌아보게 하는 공연이 찾아온다. <인디아 블로그><터키 블루스>를 함께 만들었던 박선희 연출과 배우 겸 작가 박동욱이 다시 손을 맞잡고 창작한 연극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이다.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밀레니엄’의 순간을 함께 보낸 네 친구들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1학년, 앞으로도 평생 함께 하자고 다짐했던 이들은 뜻하지 않게 찾아온 사건과 오해, 갈등으로 16년 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마주한다. 이 연극에서 정순원은 리더이자 분위기 메이커 지훈을, 김선호는 지훈을 부러워하는 형석을, 이강우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부잣집 아들 동우를, 휘종은 친구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애쓰는 명구를 맡았다. 네 배우는 공연을 준비하며 어떤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려 보았을까. 극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들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첫 번째 키워드, 밀레니엄
- 1000년의 연도 단위. 여기서는 주인공들이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던 1999~2000년의 순간.

정순원(이하 순원): 난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것 같아. 한창 주입식 입시 교육에 시달렸을 때였지. 
김선호(이하 선호): 나도. 난 과외에 시달렸어. 친구 세 명이서 같이 그룹 과외를 받았는데, 선생님이 하도 때려서 경찰에 신고했어. 당시 과외가 불법이었거든. 선생님이 나 때문에 못 가르치겠다고 했지(웃음).    
순원: 우리 연극에도 나오지만, 그땐 2000년 1월 1일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설렘과 불안함이 함께 있었던 것 같아. 그때 우리한텐 컴퓨터가 굉장히 중요했잖아. 근데 Y2K 바이러스 때문에 전세계 컴퓨터가 다 다운될거라는 이야기가 있어서 컴퓨터 시간을 바꿔놓기도 했지. 게임을 해야 하니까(웃음).
이휘종(이하 휘종): 난 계획을 세웠던 것 같아. 다 망해도 난 혼자 살아남을 거고, 그러면 난 영화 <난 전설이다>처럼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지, 하고(웃음).
선호: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아. 어릴 때니까. 다 다운되는 걸 한번 보고 싶다는. 재미있을 것 같고.
순원: 기쁘기도 했어. 1000의 자릿수가 바뀌는 시간에 내가 살고 있는 거니까. 엄마 아빠한테 고마웠지.
 
두 번째 키워드, 카세트 테이프
- 주인공들은 밀레니엄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 당시 떠오르는 생각과 감상을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한다.

이강우(이하 강우): 카세트 테이프 써봤지. 마이마이부터 시작해서 CD플레이어로 넘어갔어. 그 다음이 MP3.
선호: 난 그것도 있었어. MD 플레이어라고, 네모난 카세트 테이프 같은 게 있었어요. 핸드폰처럼 조그만데, 그 안에 작은 카세트 테이프가 들어가. 일본에서 나온 건데, 그걸 갖고 있으면 인기가 많았지. 다들 ‘이게 뭐야?’ 하고.
휘종: 역시 세대 차이가 있네. 난 CD 플레이어부터 시작했거든.
순원: 왜 길거리 리어카에서 인기곡 모음 카세트 테이프를 많이 팔았잖아. 그런 걸 항상 샀어. 좋아하는 가수가 생기면 그 가수의 테이프도 사고. 또 겨울에 차 앞 유리창에 서리가 끼면 그걸 긁어내기에 되게 좋아. 테이프 케이스로 싹 긁어내는 거야.  
일동: 와~맞아 맞아.
선호: 그거 알아? 카세트 테이프를 잘못 사면 그 안에 다른 가수가 부른 노래가 들어있어. 그러면 ‘아 낚였다~’ 이런 기분 들지. 안에 이상한 메들리 들어있고(웃음).
강우: 휴게소에서 잘못 사면 그래. 그리고 마이마이를 쓸 때는, CD플레이어 같은 건 집에 좀 여유가 있는 애들이 갖고 다니는 거였어. 얼리어답터였던 거야(웃음). 싸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마이마이에도 급이 있었어. 좋은 걸 갖고 다니는 애들이 있고, 아닌 애들이 있었지.
선호: 맞아. 급이 높을수록 더 얇았어. 난 금색 마이마이를 썼지.
 
(왼쪽부터) 이강우, 정순원, 김선호, 이휘종

세 번째 키워드, <슬램덩크>
- 극의 소품으로 등장하는, 학창시절 추억의 만화.

선호: <슬램덩크>에는 남자들이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인물들이 다 들어있어. 서태웅처럼 인기 많은 남자가 되고 싶다, 강백호처럼 저돌적인 남자가 되고 싶다, 덩크슛하는 거 봐, 이게 간지지, 하고.
강우: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정대만이지. 약간 돌아온 탕자 같은 느낌의 캐릭터니까. 한동안 코트를 떠나 있다가 ‘농구가 하고 싶어요’하면서 돌아오잖아. 게다가 꼭 결정적일 때 3점슛을 날려서, 멋있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야.
휘종: 송태섭도 멋있었어. 꼬불머리에 귀걸이. 멋을 담당했지.
선호: 남자들이 어릴 때 갖고 있는 로망이나 반항심을 충족시켜 주는 사람들이 다 들어가 있었어. 캐릭터가 다양하니까. 그래서 계속 읽게 되는 거야. 이 사람도 되어보고 저 사람도 되어보면서.  
순원: 요즘 어린 친구들은 종이 만화책보다 웹툰을 많이 보니까 그런 감성을 우리만큼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우리가 어렸을 때 만화를 보면서 받았던 좋은 정서가 있는 것 같아. <슬램덩크>뿐 아니라 좋은 만화가 정말 많았어. 근데 그 만화 속 캐릭터들이 불량한 게 아니라 정의가 뭔지, 진짜 멋이라는 게 뭔지 보여주는 캐릭터들이잖아. 그래서 그걸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바르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몸에 배는 것 같아.
선호: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의 인물들을 <슬램덩크>의 캐릭터에 비유하면 한 명씩 다 있어.
순원: 지훈은 강백호. 형석이는 서태웅의 느낌이 있지.
선호: 좋다(웃음).
강우: 동우는 정대만. 돌아온 탕자니까.
휘종: 난 송태섭? 강백호랑도 비슷한 것 같고. <슬램덩크>는 볼 때마다 울어.
 
네 번째 키워드, 브랜드
- 학창시절 아꼈던 의류/신발 브랜드.

선호: 난 닉스. 닉스 반팔 티가 유행이었는데,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건 닉스 우산이었어. 정말 신박했어. 아직도 기억나. 갈색 우산인데 우산을 넣어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는 우산집이 있었어. 누가 메고 다니는 걸 보고 어떻게든 구하려고 찾았는데 결국 못 구했어.
순원: 나는 집이 동두천 쪽이었는데, 거기가 미군부대 근처잖아. 그래서 USA 패션에 영향을 많이 받았어(웃음). 배드보이부터 나이키, 리복 신발도 많이 신었고. 챔피언 추리닝이나 후드도. 보이런던도 있었고.
강우: 맞아. 청바지는 스톰.
선호: (휘종에게) 넌 하나도 모르지?
휘종: 닉스까진 알겠는데 나머진 하나도 모르겠어. 클럽 모나코는 알아.
강우: 고등학교 땐 필라, 라코스테, 헤드 신발 많이 신었지. 크로커다일도.
순원: 고등학교 땐 나이키 에어맥스가 유행이었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올검, 올흰.
선호: 맥스는 사실 발이 좀 작아야 예뻐. 난 발이 커서 억지로 작은 걸 신은 거야. 발가락을 이렇게(오그려서) 해서 신고 다녔어. 중국 사람들 전족 하는 것처럼(웃음). 엄청 아팠어.
순원: 동료 여고생이 작고 아담한 맥스를 신었을 때는 정말 인기가 많았지.
선호: 아디다스 슈퍼스타도 예뻤어. 끈이 왕끈이었어. 너무 귀여운 거야. 지금도 길에서 동창 만나면 기억나. 어, 쟤는 슈퍼스타 왕끈 파란색이다(웃음).
강우: 가방은 이스트백이랑 잔스포츠.
휘종: 그 유행이 돌고 돌아서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이스트백이랑 잔스포츠가 유행했어.
선호: 한창 사춘기니까 돈이 없어도 유행은 항상 따라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다섯 번째 키워드, 베프
-
베스트 프렌드. 지훈·형석·동우·명구의 관계.      
순원: 난 중학교 때 항상 같이 놀던 친구들이 넷 있었어. 학교 끝나면 늘 우리 집에 와서 같이 고스톱 치고 게임하고 그랬지. 한 명은 전교 1등이었고, 또 한 명은 머리가 곱슬이라 미군 같다고 별명이 ‘아미’였어. 또 한명은 별명이 ‘상구’였는데 약간 명구 같은 스타일이었고. 고등학교 진학하고부터 한참 연락 안 하다가 어른이 돼서 다시 연락하는데, 전교 1등이었던 애는 지금 애가 둘이고, ‘아미’는 육회 식당을 하고, 상구였던 애는 키가 제일 커졌어. 신기해.
선호: 나도 지금까지 연락하는 베프가 있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연락하는. 서로 명절마다 부모님한테 다 찾아가서 연락하는 친구 다섯. 뭐든 다 같이 했지.
강우: 나도 다섯 명. 그 중 세 명은 나랑 대학까지 같은 데로 갔어. 메신저 단체방이 참 좋은 것 같아. 톡 하나만 날려도 언제든 애들이 볼 수 있으니까 늘 한 공간에 있는 것 같고.  
선호: 다들 끼리끼리 논다고, 내 친구들은 다 공부를 죽어라 못 했어(웃음). 한 명은 자퇴를 하려고 해서 그 학교에 찾아간 적도 있어. 걔를 괴롭히는 애들을 다 모아서 술을 사줬지. 괴롭히지 말라고. 그래서 일 주일 동안 학교 안 나오던 애가 다시 나왔어.
휘종: 난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 연락하는 친구가 열 두 명이야. 그 중에도 특히 친한 애들이 있잖아. 무리가 나뉘어. 서로 각자의 아픔은 다 알고, 힘들다고 하면 같이 만나서 얘기하고.
 
여섯 번째 키워드, 서른 넷
- 주인공들의 현재 나이.

강우: 난 서른 넷이면 내년인데, 뭐가 크게 다르려나? 생각해본 적이 없어. 차라리 5년, 10년 후면 허황된 꿈이라도 꾸겠는데 당장 앞이다 보니까.
순원: 근데 정말 인생은 커브를 돌면 거기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 당장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거지.
강우: 그래서 늘 기대하면서 사는 것 같아.
휘종: 난 8년 뒤야. 근데 서른 네 살이 돼도 뭐가 딱히 달라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아. 그냥 지금 이 일을 하고 있겠지. 그냥 내 주위의 사람들, 친구들이 지금과 똑같이 흘러갔으면 좋겠어.
선호: 8년 뒤라고? 앞으로 나한테 형님이라고 불러라(웃음).
강우: 내가 얘(휘종) 나이에 딱 그랬지. 서른 셋, 넷쯤 되면 난 자리도 잘 잡고, 매체 쪽에도 나오고 있을 것 같고.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선호: 근데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생각도 들어. 친구들을 보면 슬슬 결혼도 하고, 외국에 나가있는 애도 있고, 점점 서로 멀어지겠지, 현실과 타협하고 있겠지, 라는 생각. 어렸을 땐 다들 꿈도 있고 열정도 있었는데, 지금 친구들 메신저 프로필사진을 보면 하나 둘씩 지쳐가는 게 보이거든. 회사 그만두고 싶다, 힘들다는 얘기도 하고. 나는 그 중에서도 아직 제일 철이 없는 것 같아. 지금도 더 좋은 배우가 되고 싶고, 원하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꿈이 있으니까. 친구들과는 하는 일도 다르고 얘기도 잘 안 통하니까 앞으로는 조금씩 더 멀어지지 않을까.  
휘종: 나도 친구 한 명이 한 달 전에 결혼을 했는데, 왠지 나와 확 멀어지는 게 느껴지는 거야. 쟤는 이제 아빠가 되겠지, 싶고.
강우: 결혼하고 애 낳으면 더 그래. 난 중학교 베프 다섯 명 중에 네 명이 결혼했어. 심지어 다 애도 낳았어. 그러고 나니까 다들 집중하는 게 딱 하나야. 어떻게 이 애들을 잘 키워갈 것인가.  
 
일곱 번째 키워드,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
휘종: 선호 형 말대로 약간 걱정도 돼. 친구들이 아직까지는 사회 초년생인데, 앞으로 서른이 되고 서른 넷이 되면 다들 지치지 않을까, 우리 관계가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옛날에는 서로 생각이 달라도 그냥 다른 거야, 했는데 요즘은 너가 틀린 거야, 사회생활은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하거든.  
순원: 이런 얘기를 들으니까 현실과 타협하면서 잃게 되는 것들을 붙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 감수성, 순수함, 긍정이나 희망 같은 것들 말이야. 그런 것들을 이미 잃은 사람들, 되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이스 오브 밀레니엄>이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
선호: 얼마 전에 아버지랑 같이 차를 타고 봉천동에 간 적이 있어. 나는 내 친구들을 만나러, 아버지는 아버지 친구들을 만나러. 근데 아버지가 그러시는 거야. 친구들 만나면 맨날 돈만 쓰는데 왜 가냐고. 그래서 ‘아버지는 왜 친구들을 만나요?’라고 했지. 근데 아버지가 되게 멋있는 말씀을 하셨어. 추억 만나러 간다고.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우리 마음 속 한 부분은 계속 어린 거야. 그 추억을 간직하고 싶은 거지. 우리 공연도 그런 추억을 만나러 오셨으면 좋겠어.
휘종: 우리 연극은 보고 나서 연락 못하고 지냈던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이라도 보내고 싶어지는, 딱 그런 공연 같아.
강우: 좋다(웃음).
선호: 그럼 성공이지.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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