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금가가 꿈이었던 6살 소녀 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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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이상민 음악칼럼니스트의 글로 제금가(提琴家)란 바이올리니스트를 뜻합니다. 

6살 소녀에게는 ‘제금가’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6살 소녀 정경화가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은 1954년, 전쟁이 끝나고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올라와 이제 막 서울에 살기 시작할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지만 덩치 큰 피아노가 썩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새로 시작한 바이올린의 날카롭고 날렵한 소리가 훨씬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게다가 새로 만난 바이올린 선생님과의 레슨이 재미있어서 점점 더 바이올린의 매력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비로소 자신에게 딱 맞는 악기를 찾은 그녀는 레슨을 시작한 지 채 3개월도 안돼, 처음으로 출전한 콩쿠르에서 1, 2등 없는 3등에 오르며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지금의 정경화에게서 '신동'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려운 세대들도 있겠지만, 그녀는 겨우 두 번 레슨 받은 후, 학교에서 배운 노래들을 모두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었을 만큼 뛰어난 바이올린 신동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 자체가 신기한 구경거리이기도 한 때였지만 그보다 사람들은 어린 그녀의 뛰어난 바이올린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느냐는 인터뷰 질문에 그녀는 "제금가(提琴家)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제금가'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지칭하는 옛 우리말입니다.
 
명동의 유명한 냉면집 셋째 딸이었던 정경화는 어머니가 일하시는 식당의 뒷방 연습실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일곱 명의 자식 모두에게 음악 교육을 시킨 열혈 어머니 덕분에 이 유명한 '뒷방 연습실'에는 당시 20명이 넘는 레슨 선생님들이 드나들었다는데, 여기에서 세계를 주름잡은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피아니스트, 지휘자가 등장했으니 이 뒷방 연습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음악의 산실'이 아니었을까요?
 
레벤트리트 콩쿠르의 공동 우승자 정경화
 
12살이 된 정경화는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4살 위의 언니 정명화와 함께 당시에는 이역만리 먼 나라였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당시 최고의 음악학교였던 미국의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탁월한 바이올린 교수법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이반 갈라미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여성 연주자를 잘 인정하지 않고 정교한 테크닉과 냉철한 해석을 중시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엄한 선생님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정경화였지만 줄리어드 음악원 시절 최고의 연주자들과 경쟁하며 깊은 시련과 절망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끝없이 치열한 연습과 막중한 스트레스로 인해 항상 팔이 저리는 고통에 시달리며 깊은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67년 19살의 그녀는 당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레벤트리트 콩쿠르’에 출전하기로 결심합니다. 심사기준이 엄격해서 기준에 못 미치면 입상자를 내지 않기로 유명하고, 실기곡들이 까다로워 웬만해선 도전하기 조차 힘들다는 콩쿠르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유태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은 그가 눈 여겨 두었던 이스라엘 연주자 '핀커스 주커만'을 뉴욕으로 데려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며 이 콩쿠르에 대비하고 있었죠. 정경화의 스승인 '갈라미언' 조차 이번에는 이미 주인공이 정해진 듯하니 다음 기회에 출전해 보라고 조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것이 단점인 시대였고, 낯선 동양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해야만 했던 정경화는 굳은 결심을 하고 콩쿠르에 출전했으며 마침내 결선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만나게 됩니다. 대단히 이례적으로 심사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재 연주까지 요청해가며 경합을 시켰지만, 둘은 결국 '공동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정경화였습니다. ‘아이작 스턴’에게는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었겠지만 혜성같이 나타난 정경화의 놀라운 실력에 콩쿠르측에서는 도저히 최고상을 공동 수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콩쿠르의 우승 후 그녀의 위상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코리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당시 클래식계를 쥐락펴락하던 유태인 음악가들의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여전히 낯선 동양의 젊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일 뿐이었습니다.
 
유럽 한복판 무대에 선 최초의 아시안 바이올리니스트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바이올리니스트는 미국의 유명한 TV물인 ‘에드 설리반쇼’에 출연하여 놀라운 신동으로 소개 된 ‘이차크 펄만’이었는데 그 역시 64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의 우승자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가 한번은 영국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콘서트를 취소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그것은 만삭인 아내를 놔두고 혼자 연주 여행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이 공연의 빈자리를 메울 바이올리니스트로 정경화가 전격 추천되었습니다. 정경화에게는 처음 찾아온 대단히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고 인기의 ‘펄만’을 대신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사실은 그 누가 대타로 서더라도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최고의 기대치를 가지고 몰려든 수준 높은 관객들 앞에서 최고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를 대신해서 연주자로 나선다는 건 아직 신인인 ‘정경화’에게 엄청난 중압감이었을 겁니다.
시작부터 평탄치는 않았습니다. 최고 독주자를 협연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협조적이지 않았습니다. ‘펄만’ 정도면 몰라도 이름도 발음하기 힘든 낯선 동양 여성과 협연을 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일 정도로 당시는 권위적인 시대였습니다. 공연의 리허설이 시작되었을 때, 오케스트라는 그날 밤 연주하기로 되어있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대신 느닷없이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무명의 독주자를 깔본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그녀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마음대로 연주곡을 바꿔버렸던 겁니다.

30초 가량의 오케스트라 서주가 있어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과는 달리 ‘멘델스존 협주곡’은 곡의 시작과 함께 곧바로 바이올린 파트가 시작되기 때문에 이 곡을 미리 알고 연습하지 않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 시작한 멘델스존 협주곡을 악보도 없이 곧바로 따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오케스트라의 이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무명의 그녀를 시험하기 위한 그들만의 테스트였을 겁니다. 정경화가 그 날 연주할 곡뿐만이 아니라 다른 곡까지도 완벽하게 준비되어있는 연주자라는 것을 확인한 오케스트라는 그제서야 마음을 열고 그녀를 위해 진심을 담아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봉을 잡았던 그날의 연주회는 이후 ‘전설’이 되었을 정도로 최고의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모든 관객과 비평가, 언론들은 그녀가 ‘펄만’의 대타였다는 것도 이미 잊은 채 최고의 찬사를 쏟아냈습니다. ‘동양에서 온 마녀’라는 무시무시한 닉네임도 그 때 얻어진 별명입니다. 당시만 해도 검은 머리칼의 동양인이, 그것도 젊은 여성이, 클래식의 본고장인 런던에서 이런 성공을 거뒀던 적은, 그녀 외에 이전에는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훌륭한 ‘제금가’가 되겠다던 6살 소녀의 꿈이 불과 16년 만에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앙드레 프레빈, 루돌프 켐페, 게오르그 솔티, 샤를르 뒤트와, 키릴 콘드라신, 리카르도 무티, 클라우스 텐슈테트, 사이먼 래틀 경 등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과 함께 연주했으며, 라두 루푸, 크리스티안 침머만, 피터 프랭클, 스티븐 코바세비치, 케빈 케너 같은 톱클래스 피아니스트들과 호흡을 맞추며 연주회를 가졌고 음반을 녹음해왔습니다.
 
그녀는 한국이나 아시아가 아닌 역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동하며 굴지의 클래식 음반사인 ‘데카’와 ‘EMI’를 통해 무려 30여종의 음반들을 발매했습니다. 그녀의 음반들은 내놓을 때마다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라모폰상’ 등 권위 있는 클래식상들을 수상했고, 까다로운 클래식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이끌어내는 등 이제까지 활동한 그 어떤 여성 연주자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68세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시대를 대표하는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EMI와 바흐 녹음을 앞두고 있던 정경화는 2005년 갑작스런 왼손 검지 손가락의 부상으로 뜻하지 않게 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6살 이래 가장 길었던 공백기였습니다. 그녀는 연주를 할 수 없었던 이 시기에 그녀의 모교인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처음으로 교편을 잡아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을 수 있을 지 불확실하던 이 5년여의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잊고 있던 꿈이 있음을 기억해냅니다. 
 
그 꿈은 그녀가 평생을 간직했던, 늘 그녀의 심장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음악, 바로 ‘바흐’를 녹음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연주가 무르익어 작곡가의 고귀한 음악 혼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평생을 미뤄온 염원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평생의 숙제였습니다. 그 곡은 다름아닌 바흐가 일체의 다른 악기의 도움 없이 오로지 바이올린 선율 하나로만 켜켜이 쌓아 올린 위대한 금자탑, <6곡의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였습니다.
 
‘바이올린의 구약성서’로도 불리는 이 곡은 바이올린의 모든 가능성과 악기로서의 극한을 보여주는 어려운 테크닉 외에도 바흐의 음악혼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명곡입니다. 전곡 연주를 위해서는 다른 악기의 도움 없이 오롯이 바이올린만으로 무려 3시간 넘게 연주해야 하는 대곡이기도 합니다.
어린 ‘소녀로서’ 제금가의 꿈을 꿨던 정경화는, 이제 다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꿈은 음반과 연주회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러 갑니다.
그녀의 연주 인생에서 이 전곡을 하루 만에 연주하는 경우는 이제껏 없었지만 이 연주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열릴 예정이며 나아가 중국, 아시아, 유럽까지 이어질 계획입니다.
 
일흔을 바라보는 정경화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새롭게 꾸는 꿈을 이제 우리가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입니다. 물론 그녀의 기량이나 테크닉이 젊은 시절에 비한다면 최고는 아닐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틀린 음을 연주하지 않고 완벽한 테크닉을 선보인다고 해서 바흐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면으로부터 음악이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 비로소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을 줄 아는 나이가 된 연주자가 들려주는 바흐의 음악이야말로, 그 어떤 연주보다도 깊은 울림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녀가 ‘제금가의 꿈’을 훌륭히 이루어냈듯 그녀의 새로운 꿈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반드시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이끌어내는 것만이 성공적인 연주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압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직도 음악을 깊이 사랑하고, 음악 앞에서 여전히 겸손할 줄 알며, 지금도 음악 안에서 새롭게 꿈꿀 수 있는 연주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여전히 ‘아름다운 제금가(提琴家)’로 우리 곁에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글 : 음악칼럼니스트 이상민
사진제공 :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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