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연 “‘잃어버린 얼굴 1895’ 는 영혼의 밑바닥까지 다 끌어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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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다’라는 수식어가 잘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차지연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2017년 뮤지컬 '광화문연가'에서 월하로 성별을 뛰어넘은 인물을 소화하더니, '더 데빌'에서도 여배우 최초로 X(엑스)역을 맡아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이끌어냈다. 2020년 콘서트 형식으로 오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는 한지상, 윤형렬, 박강현과 함께 유다 역을 맡았고, ‘그라운디드’에서는 모노극으로 온전히 오롯이 무대를 채웠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가창력을 지닌 차지연이 2013년 초연에 이어 명성황후 역을 맡아 서울예술단의 ‘잃어버린 얼굴 1895’로 돌아온다. 역사와 세간의 입방아 속에 묻혀버린 명성황후의 맨 얼굴을 찾는 이 작품에서 차지연은 역사의 격동기 한 여인의 지독한 삶을 가슴 절절히 파헤친다. 지난 23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던 차지연은 ‘한 번 해봤던 거니까 괜찮겠지, 할만하겠지’ 하면 배우 생활은 끝인 거라고 단호히 말했다. ‘다시 연기의 재미를 느낀다’는 그녀의 이번 무대가 더욱 궁금해진다.

Q 방송과 콘서트, 연극, 이번 서울예술단 작업까지 1년여 만에 복귀 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다시 ‘으쌰으쌰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원래도 무대에 대한 감사함이 큰 힘으로 작용해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인데, 이제는 무대와 관객에 대한 감사함이 더 커졌어요.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단 한 회라도 관객들을 뵐 수 있다면 정말로 가슴 벅찬 일인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해서 이런 세상이 왔을까 여러 고민이 들어요.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니까요. 지구 전체가 아프잖아요. 이런 흐름이 빨리 없어질 것 같지 않거든요. 그래서 유튜브라는 걸 해야 하나 고민도 해보고요(웃음). 그런데 생각보다 제가 취미가 없더라고요. 뷰티나 패션에도 관심이 없고요. 어제 제 동생이 조카를 보고 싶어해서 영상 통화를 하는데 제가 집에서 감자전을 부치고 있었어요. 그걸 보더니 “언니 유튜브에서 하는 것처럼 해봐 봐” 그러는데 진짜 못 하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비긴 어게인 코리아’ 방송을 보면서 위로 받고 있어요.

Q  2013년 초연 당시 ‘잃어버린 얼굴 1895’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처음 이 작품의 대본을 봤을 때 ‘안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컸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어리기도 했고 장성희 선생님이 쓰신 대본을 보자마자 시멘트 덩어리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서 숨을 제대로 못 쉬겠더라고요. 초연 만들어가면서 너무 감사하게도 작가님이랑 연출님이랑 제가 가진 색깔에 맞게 각색을 해주셨어요.

명성황후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고, 굉장히 많은 문제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잖아요. '왕비다 국모다 이런 수식어는 버려두고 한 여자의 삶을 살아보자’에 초점을 맞추고 연기했어요. 초연 때 그녀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낀 건 그녀가 강단이 있던 인물인 건 확실하다는 거에요. 제가 참고한 책에 보면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9살인데 장례 절차 동안 울지 않고 지켜봤다고 해요. 그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남다른 강단과 총명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악의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Q 이번에 세 번째 공연으로 돌아오면서 새로 보이는 것들이 있나요?
이 작품은 초연 때 제 한계치를 벗어나 영혼의 저 밑바닥까지 다 끌어낸 작품이에요. 작품 자체는 달라진 게 없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저 자신인 것 같아요. 초연 때는 아가씨였고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좋은 작품에 민폐 되지 않게 파이팅 넘치게 했다면 지금은 훨씬 담백해졌어요. 강하게 어필해야 되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지만 뭐랄까 과함이 덜어졌어요.

한 나라의 국모긴 하지만 ‘왜 그녀는 조선에 대하여, 또 조선의 미래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과 맞닥뜨리면서 지독하게 아둥바둥하며 살았을까’ 고민을 해봤어요. 사실 초·재연까지는 잘 몰랐어요. ‘아 이거겠네’라고 생각한 것은 한 나라의 국모로서 그녀가 목매는 조선의 미래는 곧 내 아이의 미래인 것이잖아요. 미래의 왕이 될 내 아이가 다스릴 곳이고요. 그래서 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좋은 것들의 발판을 다져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녀의 자료를 찾아보면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균형에 힘썼다고 나오거든요. 그런 생각을 베이스로 깔았더니 모든 장면이 술술 풀리고 담백해졌어요. 그래서 세 번째 공연이지만 새로 알아가는 것이 정말 많아요. 예전보다 연기하는 재미가 있어요.

Q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5년이란 시간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잖아요. 새로운 생명이 저랑 같이 있으니까 그것이 주는 다른 차원의 변화와 영향이 엄청 큰 것 같아요. 사실 아이한테 엄청 잘해주지는 못해요. 아이 낳고 얼마 안 돼서 ‘마타하리’를 시작했고요. 공연 끝나고 들어가면 아기 재우고, 일 나갈 때는 나가기 전에 이유식도 만들어 놓고 나왔어요. 그렇게 해야 일하는 엄마로서 죄책감이 좀 덜어졌거든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이런 신기한 과정들을 겪고 작품을 만나니 무대에 섰을 때 다른 차원의 것들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작품을 만날 때 편안해요. 예전에는 조바심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짓눌렸다면 ‘이제는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가보자’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Q ‘잃어버린 얼굴 1895’에는 유독 가슴 절절하고 먹먹한 장면이 많은데요. 연기하시는 입장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이나 넘버가 있다면요.
2막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곡이에요. 이지나 연출님은 배우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고 열어두시는 것들이 있어요. 초연 때 장성희 작가님이 만들어주신 탄탄한 텍스트가 있지만 연출님은 “너라면 대사 외에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 인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라고 많이 물어봐 주셨어요. 그리고 그런 걸 작가님과 상의해서 반영해 주셨고요. 배우마다 호불호가 있겠지만 저는 그런 작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 곡은 제 의견이 많이 반영됐어요. 곡의 분위기도 너무 세련됐고요. 간결한데 힘이 있고 멋있어요. 개인적으로 멋있는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멋있는 작품이란 배우를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배우가 무대에 있을 때 배우가 할 것이 많은 작품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단 한 장면도 긴장을 풀 수가 없어요. 집중과 감정을 놓치면 배우가 보이지 않는 작품이거든요. 배우를 도와주는 장치가 없거든요. 그래서 생각할 공간이 많고 배우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요. 배우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에요. 그런 부분이 배우로서 저를 치열하게 만들어줘요. 계속해서 채찍질하게 해주고요. 전 그런 과정이 재미있어요. ‘잃어버린 얼굴 1895’는 ‘십 년 넘게 배우 생활 했고, 이 작품은 해봤던 거니까 괜찮겠지, 할만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주는 작품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배우 생명은 끝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예민하게 깨어있으려고 노력해요.

Q 한 인물을 만들어가실 때 극한으로 몰고 가시는 편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인물에 가깝게 다가서고자 연구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절 코너로 몰아가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이지나 연출님은 제가 스스로를 혹사하는 걸 아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이번에도 또 병을 못 고친다”라고 “언제쯤 그 병을 고칠래. 왜 네 스스로 믿지를 못하니”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겁이 많아요.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못이 막혀 있어요. 그래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요. 연기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거든요. 매회 작품마다 제 영혼들을 다 무대에 떼어놓고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고 나면 제 기운이 빠져요. 그게 힘들어서 기운을 좀 아끼고자 하면 관객들도 감동을 못 받고 저도 찝찝하고 이상해요. 오래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어떤 역할을 해도 믿음 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극한으로 몰고 가도 무대에서 공연을 하다 보면 에너지가 채워져요. 제가 관객들에게 받는 게 훨씬 커요. 제가 작품의 공기 안에 있을 때 그 기운을 먹거든요. 기운을 잔뜩 먹고 먹은 만큼 토해내고, 무대는 참 묘한 곳이에요. 한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요.

저를 지독하게 괴롭히면서 연습을 하다가 공연을 올리고 몇 번 공연을 하다 보면 여유가 생겨요. 그래서 첫 공연의 마지막 공연의 기운이 달라요. 그래서 절 아는 팬들은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걸 좋아하세요.
 
Q 그동안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여러 역할에 참여하셨잖아요. 어떤 경험이었나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콘서트에서 유다를 한 것도 그렇고 ‘더데빌’의 X 도 그렇고, ‘광화문 연가’의 월하도 그렇고 재미있어요. 제가 자꾸 젠더 프리를 이야기할 때 선두 주자처럼 표현이 되는데 저는 그런 타이틀에는 일말의 욕심도 없어요.

‘광화문 연가’의 월하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한 것이고 캐스팅되고서 같은 역에 (정)성화 오빠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원래 같은 역끼리 분장실을 같이 쓰거든요. 본 공연 때야 한 명씩 나오니까 상관 없지만 테크 리허설할 때 분장실을 같이 쓰면서 성화 오빠랑 서로 편하게 뭘 못하고 “야 되게 어색하다. 넌 어디다 짐을 풀래?” 그러면서 서로 조심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콘서트에서는 심적인 부담감 때문에 엄청 힘들었어요. 유다 역을 최초로 여자 배우가 한다고 막 주변에서는 난리고, 혼자서 잠도 못 자고 매일 토하고 난리였어요. 다른 분들은 실제 공연을 해보고 콘서트를 하는 건데 저는 이 작품이 그때 처음이었거든요. 단 하루의 공연이었지만 분석을 해야하는 건 다른 작품이나 똑같거든요. 작품을 제대로 파고 분석하지 않았는데 그냥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건 그 곡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여타 행사에서 제가 참여하지 않았던 작품의 넘버를 잘 부르지 않아요.

젠더 프리 역을 해보니까 새로운 부분이 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남성적인 파워풀함과 원래 가지고 있는 여성적인 게 섞여서 배우로서 큰 장점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연기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고요.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 그런 걸 시도할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앞으로도 고민해서 도전해보고 싶어요. 하다 보니 그런 역할들이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한때의 이슈에 휩쓸려가서는 반짝하고 싶지는 않아요. 앞으로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좋은 작품이 있다면 넓은 스펙트럼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진중하게 가고 싶어요.
 

Q 앞서 ‘요즘과 같은 시국에 무대에 설 수 없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된다고 했는데, 만약 배우가 안 됐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배우가 안 됐으면 장구와 북을 너무 좋아하니까 색동옷 입고 상모 돌리면서 장구 치고 살았을 것 같아요. 타악기를 할 때 때리는 타격감이 뭔가 가슴을 뛰게 만들거든요. 북은 자다가도 쳐요. ‘서편제’ 할 때 작품에 나오는 국가락은 제가 다 만든 거에요. 외가 집안이 다 국악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소리가 친숙했어요. 소리를 모르면 북을 칠 수 없는데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사랑가’ ‘춘향가’ ‘심청가’ 등이 도움이 많이 됐죠.
 

Q 이 작품을 보러 오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
요즘 언제 어디서나 마스크를 하는 모습이 참 슬퍼요. 아이들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세상이 굴러갈 수 있잖아요. 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함께 이 시련을 잘 이겨내야 내면 좋겠어요.
 

이 작품이 희망을 말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도 결국은 한 여인이 처한 위치에서 살아내는 이야기거든요. 몇 번의 무대가 허락될지 모르겠지만 서울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연습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 저희 모습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같이 힘을 내실 수 있으면 하는 바람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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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진이 기자(jini21@interpark.com)
사진: 서울예술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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