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연 “‘잃어버린 얼굴 1895’ 는 영혼의 밑바닥까지 다 끌어낸 작품”
- 2020.06.25
- 강진이 기자
- 9913views
특유의 카리스마와 가창력을 지닌 차지연이 2013년 초연에 이어 명성황후 역을 맡아 서울예술단의 ‘잃어버린 얼굴 1895’로 돌아온다. 역사와 세간의 입방아 속에 묻혀버린 명성황후의 맨 얼굴을 찾는 이 작품에서 차지연은 역사의 격동기 한 여인의 지독한 삶을 가슴 절절히 파헤친다. 지난 23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던 차지연은 ‘한 번 해봤던 거니까 괜찮겠지, 할만하겠지’ 하면 배우 생활은 끝인 거라고 단호히 말했다. ‘다시 연기의 재미를 느낀다’는 그녀의 이번 무대가 더욱 궁금해진다.
Q 방송과 콘서트, 연극, 이번 서울예술단 작업까지 1년여 만에 복귀 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다시 ‘으쌰으쌰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돌아왔어요. 원래도 무대에 대한 감사함이 큰 힘으로 작용해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인데, 이제는 무대와 관객에 대한 감사함이 더 커졌어요.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단 한 회라도 관객들을 뵐 수 있다면 정말로 가슴 벅찬 일인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해서 이런 세상이 왔을까 여러 고민이 들어요.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니까요. 지구 전체가 아프잖아요. 이런 흐름이 빨리 없어질 것 같지 않거든요. 그래서 유튜브라는 걸 해야 하나 고민도 해보고요(웃음). 그런데 생각보다 제가 취미가 없더라고요. 뷰티나 패션에도 관심이 없고요. 어제 제 동생이 조카를 보고 싶어해서 영상 통화를 하는데 제가 집에서 감자전을 부치고 있었어요. 그걸 보더니 “언니 유튜브에서 하는 것처럼 해봐 봐” 그러는데 진짜 못 하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비긴 어게인 코리아’ 방송을 보면서 위로 받고 있어요.
Q 2013년 초연 당시 ‘잃어버린 얼굴 1895’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처음 이 작품의 대본을 봤을 때 ‘안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컸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삶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어리기도 했고 장성희 선생님이 쓰신 대본을 보자마자 시멘트 덩어리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아서 숨을 제대로 못 쉬겠더라고요. 초연 만들어가면서 너무 감사하게도 작가님이랑 연출님이랑 제가 가진 색깔에 맞게 각색을 해주셨어요.
명성황후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고, 굉장히 많은 문제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잖아요. '왕비다 국모다 이런 수식어는 버려두고 한 여자의 삶을 살아보자’에 초점을 맞추고 연기했어요. 초연 때 그녀에 대해 공부하면서 느낀 건 그녀가 강단이 있던 인물인 건 확실하다는 거에요. 제가 참고한 책에 보면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9살인데 장례 절차 동안 울지 않고 지켜봤다고 해요. 그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남다른 강단과 총명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악의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 작품은 초연 때 제 한계치를 벗어나 영혼의 저 밑바닥까지 다 끌어낸 작품이에요. 작품 자체는 달라진 게 없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저 자신인 것 같아요. 초연 때는 아가씨였고 열정으로 똘똘 뭉쳐서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아요. 좋은 작품에 민폐 되지 않게 파이팅 넘치게 했다면 지금은 훨씬 담백해졌어요. 강하게 어필해야 되는 장면에서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지만 뭐랄까 과함이 덜어졌어요.
한 나라의 국모긴 하지만 ‘왜 그녀는 조선에 대하여, 또 조선의 미래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과 맞닥뜨리면서 지독하게 아둥바둥하며 살았을까’ 고민을 해봤어요. 사실 초·재연까지는 잘 몰랐어요. ‘아 이거겠네’라고 생각한 것은 한 나라의 국모로서 그녀가 목매는 조선의 미래는 곧 내 아이의 미래인 것이잖아요. 미래의 왕이 될 내 아이가 다스릴 곳이고요. 그래서 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좋은 것들의 발판을 다져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녀의 자료를 찾아보면 옛 것과 새로운 것의 균형에 힘썼다고 나오거든요. 그런 생각을 베이스로 깔았더니 모든 장면이 술술 풀리고 담백해졌어요. 그래서 세 번째 공연이지만 새로 알아가는 것이 정말 많아요. 예전보다 연기하는 재미가 있어요.
Q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변화된 이유는 5년이란 시간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잖아요. 새로운 생명이 저랑 같이 있으니까 그것이 주는 다른 차원의 변화와 영향이 엄청 큰 것 같아요. 사실 아이한테 엄청 잘해주지는 못해요. 아이 낳고 얼마 안 돼서 ‘마타하리’를 시작했고요. 공연 끝나고 들어가면 아기 재우고, 일 나갈 때는 나가기 전에 이유식도 만들어 놓고 나왔어요. 그렇게 해야 일하는 엄마로서 죄책감이 좀 덜어졌거든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이런 신기한 과정들을 겪고 작품을 만나니 무대에 섰을 때 다른 차원의 것들이 느껴지더라고요.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작품을 만날 때 편안해요. 예전에는 조바심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짓눌렸다면 ‘이제는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가보자’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2막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여기는 어디인가’라는 곡이에요. 이지나 연출님은 배우에게 전적으로 맡겨두고 열어두시는 것들이 있어요. 초연 때 장성희 작가님이 만들어주신 탄탄한 텍스트가 있지만 연출님은 “너라면 대사 외에 여기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 인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라고 많이 물어봐 주셨어요. 그리고 그런 걸 작가님과 상의해서 반영해 주셨고요. 배우마다 호불호가 있겠지만 저는 그런 작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이 곡은 제 의견이 많이 반영됐어요. 곡의 분위기도 너무 세련됐고요. 간결한데 힘이 있고 멋있어요. 개인적으로 멋있는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멋있는 작품이란 배우를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배우가 무대에 있을 때 배우가 할 것이 많은 작품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단 한 장면도 긴장을 풀 수가 없어요. 집중과 감정을 놓치면 배우가 보이지 않는 작품이거든요. 배우를 도와주는 장치가 없거든요. 그래서 생각할 공간이 많고 배우가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요. 배우에게 집중하게 만들어주는 작품이에요. 그런 부분이 배우로서 저를 치열하게 만들어줘요. 계속해서 채찍질하게 해주고요. 전 그런 과정이 재미있어요. ‘잃어버린 얼굴 1895’는 ‘십 년 넘게 배우 생활 했고, 이 작품은 해봤던 거니까 괜찮겠지, 할만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주는 작품이에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배우 생명은 끝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예민하게 깨어있으려고 노력해요.
Q 한 인물을 만들어가실 때 극한으로 몰고 가시는 편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인물에 가깝게 다가서고자 연구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절 코너로 몰아가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이지나 연출님은 제가 스스로를 혹사하는 걸 아니까 “제발 그만하라고 이번에도 또 병을 못 고친다”라고 “언제쯤 그 병을 고칠래. 왜 네 스스로 믿지를 못하니”라고 말씀하세요.
저는 겁이 많아요.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못이 막혀 있어요. 그래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요. 연기적으로 기술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거든요. 매회 작품마다 제 영혼들을 다 무대에 떼어놓고 나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고 나면 제 기운이 빠져요. 그게 힘들어서 기운을 좀 아끼고자 하면 관객들도 감동을 못 받고 저도 찝찝하고 이상해요. 오래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어떤 역할을 해도 믿음 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극한으로 몰고 가도 무대에서 공연을 하다 보면 에너지가 채워져요. 제가 관객들에게 받는 게 훨씬 커요. 제가 작품의 공기 안에 있을 때 그 기운을 먹거든요. 기운을 잔뜩 먹고 먹은 만큼 토해내고, 무대는 참 묘한 곳이에요. 한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괴롭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있어요.
저를 지독하게 괴롭히면서 연습을 하다가 공연을 올리고 몇 번 공연을 하다 보면 여유가 생겨요. 그래서 첫 공연의 마지막 공연의 기운이 달라요. 그래서 절 아는 팬들은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걸 좋아하세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콘서트에서 유다를 한 것도 그렇고 ‘더데빌’의 X 도 그렇고, ‘광화문 연가’의 월하도 그렇고 재미있어요. 제가 자꾸 젠더 프리를 이야기할 때 선두 주자처럼 표현이 되는데 저는 그런 타이틀에는 일말의 욕심도 없어요.
‘광화문 연가’의 월하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한 것이고 캐스팅되고서 같은 역에 (정)성화 오빠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됐어요. 원래 같은 역끼리 분장실을 같이 쓰거든요. 본 공연 때야 한 명씩 나오니까 상관 없지만 테크 리허설할 때 분장실을 같이 쓰면서 성화 오빠랑 서로 편하게 뭘 못하고 “야 되게 어색하다. 넌 어디다 짐을 풀래?” 그러면서 서로 조심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콘서트에서는 심적인 부담감 때문에 엄청 힘들었어요. 유다 역을 최초로 여자 배우가 한다고 막 주변에서는 난리고, 혼자서 잠도 못 자고 매일 토하고 난리였어요. 다른 분들은 실제 공연을 해보고 콘서트를 하는 건데 저는 이 작품이 그때 처음이었거든요. 단 하루의 공연이었지만 분석을 해야하는 건 다른 작품이나 똑같거든요. 작품을 제대로 파고 분석하지 않았는데 그냥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건 그 곡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여타 행사에서 제가 참여하지 않았던 작품의 넘버를 잘 부르지 않아요.
젠더 프리 역을 해보니까 새로운 부분이 있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남성적인 파워풀함과 원래 가지고 있는 여성적인 게 섞여서 배우로서 큰 장점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연기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고요. 그런 게 재미있었어요. 그런 걸 시도할 수 있는 작품이 있으면 앞으로도 고민해서 도전해보고 싶어요. 하다 보니 그런 역할들이 제의가 많이 들어오지만 한때의 이슈에 휩쓸려가서는 반짝하고 싶지는 않아요. 앞으로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대극장이든 소극장이든 좋은 작품이 있다면 넓은 스펙트럼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진중하게 가고 싶어요.
Q 앞서 ‘요즘과 같은 시국에 무대에 설 수 없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된다고 했는데, 만약 배우가 안 됐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배우가 안 됐으면 장구와 북을 너무 좋아하니까 색동옷 입고 상모 돌리면서 장구 치고 살았을 것 같아요. 타악기를 할 때 때리는 타격감이 뭔가 가슴을 뛰게 만들거든요. 북은 자다가도 쳐요. ‘서편제’ 할 때 작품에 나오는 국가락은 제가 다 만든 거에요. 외가 집안이 다 국악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소리가 친숙했어요. 소리를 모르면 북을 칠 수 없는데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사랑가’ ‘춘향가’ ‘심청가’ 등이 도움이 많이 됐죠.
Q 이 작품을 보러 오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
요즘 언제 어디서나 마스크를 하는 모습이 참 슬퍼요. 아이들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세상이 굴러갈 수 있잖아요. 저도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함께 이 시련을 잘 이겨내야 내면 좋겠어요.
이 작품이 희망을 말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도 결국은 한 여인이 처한 위치에서 살아내는 이야기거든요. 몇 번의 무대가 허락될지 모르겠지만 서울예술단 단원들과 함께 죽을 각오로 연습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 저희 모습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같이 힘을 내실 수 있으면 하는 바람 밖에 없어요.
+ '잃어버린 얼굴 1895' 티켓예매 ☞
글: 강진이 기자(jini21@interpark.com)
사진: 서울예술단 제공
[ⓒ 플레이DB m.playdb.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