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BT 아우르는 세상 모든 ‘노라’들의 이야기, 연극 ‘와이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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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내 와이프에요.”

연극 ‘와이프(WIFE)’에는 서너 번에 걸쳐 이 대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와이프’가 지칭하는 대상은 상황마다 다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단어(이성애자 남성이 여성 배우자를 지칭하는)이기도 하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레즈비언 여성이 사랑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기도, 게이 남성이 남성 파트너를 가리키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공통점은, 이 모든 ‘와이프’들은 억압적인 결혼 제도에서, 사회의 차별에서, 보이지 않는 위계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한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연극은 1959년부터 2042년까지, 네 시대를 오가며 펼쳐지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투쟁하는 세상 모든 ‘노라’들의 모습을 비춘다.
 
연극 ‘와이프’ 공연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해 서울시극단이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처음 선보여 제56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출상, 유인촌 신인연기상을 수상했고, 지난 달 말 펼쳐진 앙코르 공연은 티켓 오픈 3분만에 전석 매진됐다. 관객들의 뜨거운 지지에 힘입어 앙코르 공연 직후 대학로에서 세 번째 무대에 오르게 됐다. 연출은 ‘그을린 사랑’으로 최근 연극계 주요 상을 휩쓸었던 신유청 연출가가 맡았다.
 
영국 극작가 사무엘 아담슨(Samuel Adamson)이 쓴 이 극은 1959년 영국의 한 극장에서 펼쳐진 연극 ‘인형의 집’ 공연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연극의 마지막 장에서 노라는 마침내 자유를 찾아 집을 떠나지만, 노라를 연기한 배우 수잔나가 대기실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찾아온 손님은 부부강간으로 원치 않은 아이를 임신한 여성 데이지다.

사실 수잔나와 데이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당시 남성들 간의 사랑은 범죄로 규정됐고, 여성들 간의 사랑은 그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았다. ‘인형의 집’ 초연 후 80여 년이 흘렀지만, 여성을 향한 억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여성 성소수자는 아예 사회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렇게 1959년에도 여전히 삶의 결정권을 쥐지 못한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 극은 이어 다른 시대로 확장되며 또 다른 얼굴을 한 ‘노라’들을 조명한다. 1988년에는 데이지의 아들 아이바가 게이라는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차별을 당하고, 2019년에는 아이바의 연인이었던 에릭의 딸 클레어가 중년이 된 아이바를 찾아온다. 또 2042년에는 클레어의 딸 데이지가 연극 ‘인형의 집’을 공연하는 배우 수잔나를 찾아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각 시대 속 풍경은 여성 인권과 성소수자에 대한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각 시대마다 남아 있는 차별과 억압의 기제는 무엇인지를 짚는다.
 
긴 세월에 걸쳐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만큼, 이 작품이 그려내는 인간상도 입체적이다. 레즈비언을 인정하지 않는 1959년에 뼈아프게 울며 괴로워했던 데이지는 나이가 들어 이민자를 배척하는 극우 정당 지지자가 되어 있고, 젊은 시절 사회의 차별에 온 몸으로 맞서 싸웠던 아이바 역시 어느새 ‘분노하지 않는 꼰대’가 되어 있다. 모순적인 변화지만, 많은 이들이 밟는 수순이기도 하다. 극은 그렇게 투쟁에 시큰둥해진 아이바가 ‘새롭게 싸울 전장’을 발견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을 건넨다.
 

이 작품이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도 흥미롭다. ‘인형의 집’이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로 극중극으로 공연되고, 2019년에는 코로나19 사태를 반영한 듯 마스크를 쓴 스텝들이 ‘젠더 프리’로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이건 연극일 뿐이야. 아무 것도 못 바꿔”라고 자조하는 배우들의 대사나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을 보며 연극의 종말을 점치는 2042년 연극인의 모습은 실제 그 배우 자신의 목소리로서, 또 함께 공연을 준비한 창작자들의 생생한 고민이 담긴 목소리로서 다가온다.
 

이주영, 오용, 김현, 손지윤, 백석광, 우범진, 정환, 송광일 등 배우들은 1인 다 역을 맡아 여러 시대와 인물을 오가며 호연을 펼친다. 안정된 호흡으로 극을 완성해내는 이들의 모습은 “연극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극중 대사와 달리 분명 어떤 울림과 메시지를 객석에 전하고 있다. 공연은 8월 23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볼 수 있다.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세종문화회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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