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전시 시점] 힙스터 ‘왕’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장 미쉘 바스키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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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뮤지엄 제공

아이가 그린 것 같기도 하고, 낙서 같기도 한 그림. 간결하지만 특유의 색과 표현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작품. 장 미쉘 바스키아의 전시가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지난 10월 8일부터 열리고 있습니다. ‘장 미쉘 바스키아ㆍ거리, 영웅, 예술’전은 바스키아가 생전에 남긴 15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일대기를 느낄 수 있게 구성되었습니다.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000여 점에 달하는 드로잉, 회화, 조각작품을 남긴 바스키아의 드라마틱한 삶을 느껴볼 기회입니다. 총 작품가액만 1조 원에 달한다는 이번 전시를 작가, 작품, 기획자, 총 3개의 시선에서 바라보려 합니다.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STEP 1 : 바스키아가 누구야?

‘검은 피카소’, ‘최고 낙찰가 기록 보유 작가’ 등 다양한 수식어로 불리는 장 미쉘 바스키아. 1960년 미국 브루클린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티공화국 출신,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이었죠. 7살 때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해서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는데 이때 어머니가 선물한 책이 '그레이의 해부학'이었습니다. 지루한 병실 생활에 지친 바스키아가 침대 위에서 뒤적이던 해부학책은 그의 평생 작품 창작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1977년 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뉴욕의 거리 곳곳에 ‘SAMO©’라는 스프레이 문자 낙서를 하기 시작합니다.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란 뜻의 문자에 저작권 표시 ©를 덧붙인 것이었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익명의 거리 작가로 남고자 했던 알 디아즈와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컸던 바스키아는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바스키아는 영화제작자이자 음악가, 큐레이터였던 디에고 코르테즈라는 예술적 동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스키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작품을 여러 점 사 주었을뿐 아니라 대규모 기획전에도 참여하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2년 뉴욕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열린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부상합니다. ‘래리 가고시안’ 같은 유명 갤러리의 초대로 LA 개인전도 열게 됐고, 유럽 최고 권위의 박람회인 ‘카셀 도큐멘타 7’에도 출품을 하며 명성을 쌓아갑니다. 길거리에 스프레이 낙서를 하고 엽서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아티스트에서 단숨에 현대미술계의 중심 작가로 변모한 것이죠. 그런 바스키아가 친해지고 싶고, 존경하는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앤디 워홀이었습니다.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그에게 마침내 앤디 워홀과 만날 기회가 찾아옵니다. 스위스의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소개 덕분이었습니다. 앤디 워홀과 예술적 교감을 이어나가던 바스키아는 1983년 협업 전시를 선보이기도 합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의 사망으로 큰 충격을 받은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같은 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 때였습니다. 아카데믹한 백인 위주의 미술계를 뒤집어놓은 길거리 출신의 흑인 미술가 바스키아의 존재는 영원한 파격으로서 기억될 것입니다.

STEP 2 : 바스키아전에서 꼭 봐야 할 작품 5선
 
Acrylic, oil stick, spray paint, silver spray paint,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8.3×226.1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① New York, New York, 1981

맨해튼 거리에서 그래피티 화가로 활동하던 바스키아가 본격적으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전환기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래피티의 쓰고 지우는 작업 방식이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 걸 볼 수 있는데요. 검정과 흰색의 강렬한 대비로 묘사해낸 도시 풍경, 여기에 바스키아의 트레이드 마크인 왕관 표시와 무서운 표정을 한 얼굴, 각종 레터링이 합쳐져 그가 나고 자란 뉴욕의 풍경이 완성되었습니다.
 
Acrylic, oil stick, and paper collage on canvas, 121.9×120.3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② Old Cars, 1981

7살 때 당한 자동차 사고의 경험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나 봅니다. 자동차는 도시의 중요한 상징물이기도 하지만, 바스키아의 개인사에서도 중요한 소재였습니다. 성난 표정의 사람, 비명을 닮은 ‘AAAAA(아아아아)’ 문구는 사고 당시의 트라우마적인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만화를 좋아했던 바스키아는 만화를 연상시키는 4분할 된 화면을 등장시켰습니다.
 
Acrylic, oil stick, crayon, paper collage, and feathers on joined wood panels, 245.1×229.2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③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 1982

바스키아가 첫 LA 여행에서 그린 그림이자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미국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입니다. 나무 패널을 여러 개 이어 붙어 자신의 드로잉 복제본을 오려 붙이고 아크릴과 유화 스틱으로 여러 층을 쌓아 올렸습니다. 심지어 그림 속에 깃털도 붙여놓았죠. 이 작품의 하단은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상단은 그의 시그니처 왕관을 등장시킴으로써 보다 구상적인 이미지로 대비를 만들어냈습니다.
 
Acrylic and oil stick on canvas mounted on wood supports, 182.9×182.9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④ Untitled (Bracco di Ferro), 1983

바스키아가 자주 사용한 저작권 기호 ⓒ 가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BRACCO DI FERRO’는 ‘무쇠 팔’이란 뜻으로 시금치를 먹으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만화 캐릭터 뽀빠이의 이탈리아 식 명칭이기도 합니다. 무쇠 팔을 지닌 만화 캐릭터 뽀빠이를 해부학적으로 표현한 걸까요? 골격과 근육이 묘사된 인체의 상반신을 검정과 노란색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마치 X-RAY 화면이나 해부학책의 인체 설명과도 같은 인상을 줍니다.
 
Acrylic, oil stick, wax, and crayon on paper laid on canvas, 182.9×332.7cm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 Licensed by Artestar, NewYork

⑤ Victor 25448, 1987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이 즐비하고 한 남성이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화려한 글씨체로 ‘이상적(ideal)’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지만 다른 한쪽엔 작은 글씨로 ‘여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nothing to be gained here)’, ‘돈이 명령한다(money orders)’ 등의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백인 위주의 뉴욕 미술계에서 독보적 존재였던 바스키아. 하지만 마음속엔 얼마나 상처도 많고 좌절감도 컸을까요? 무엇보다 그가 선망하고 자주 교류하던 앤디 워홀의 사망 이후라 느낀 절망감은 아주 깊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78년과 1988년에 그려진 것으로 무력감과 패배감 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STEP 3 : 구혜진 큐레이터 “비싼 작품 그린 사람 아닌, 깊이 있는 예술가로서 바스키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 미쉘 바스키아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구혜진 롯데뮤지엄 큐레이터를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습니다.

Q 바스키아란 작가를 조명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롯데뮤지엄은 개관 이래로 국내에서 자주 접하기 어려웠던 댄 플래빈, 알렉스 카츠 등의 작가를 소개해왔습니다. 이번 바스키아전은 그 정점에 선 전시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단순하게 유명하고, 힙하고, 비싼 작품을 그리다가 약물 중독으로 사망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깊이가 있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단 한 명의 예술가 바스키아에게 초점을 맞춰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Q 회고전인 만큼 작가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면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바스키아가 갖는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바스키아 작품의 요소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그림 그리는 테크닉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온 일생을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이 의미가 깊어요.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가 그림 위에 다 나타나거든요. 바스키아가 사망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음악, 패션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건 이 시대를 초월한 감각적인 색상과 디자인이 존재하기 때문일 거예요.

Q 바스키아가 현대 아티스트들에게 준 영향도 큰 것 같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스키아가 ‘세이모(SAMO©)’ 시절 사용한 서체를 보면 무척 아름다워요. 그래서 현대 디자이너들도 여기에 영감을 받아서 창작에 이용하기도 하죠. 힙합 아티스트들은 저항 정신이 충만한 바스키아를 ‘왕(king)’이라고 호칭하고 그를 따르려 하죠. 오늘날 힙합씬에서 유행하는 ‘플렉스’, ‘로열티’, ‘리스펙트’ 등 용어들도 모두 바스키아의 작품에 함축된 말들이니까요. 시대가 바뀌고 발전했다고 해도 여전히 빈부격차는 있고, 사회 불만은 많으니 시대를 초월해서 바스키아는 영원히 젊은이들에게 소구하는 아티스트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Q 전시에서는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관계도 많이 다루었더라고요.

현대 미술가 키스 해링이 “입을 열지 않아도 붓으로 대화를 하는 것 같다”라고 말 한 적이 있어요.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의 관계가 딱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앤디 워홀은 원래 드로잉을 잘 안 했는데 바스키아와 만난 뒤로 연필을 들었다는 인터뷰 내용을 봤어요. 바스키아 역시도 앤디 워홀을 좋아했고 그에게서 참 많은 영향을 받았죠. 앤디 워홀이 사망한 뒤 바스키아는 방황의 시기를 거치게 돼요. 그때 작품을 보면 더 거친 느낌의 죽음을 상징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타나죠.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은 두 거장의 관계를 통해 바스키아 예술 세계의 한 대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Q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한 마디가 있다면요?

상품에 바스키아 작품 이미지가 쓰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상업적으로 활용 가능한 특정 작품만을 그의 대표작이라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전시는 바스키아의 인생 스토리에 초점을 맞춰서 초기부터 말기까지 방대한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로 기획되었어요. 기존에 자주 접할 수 없던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를 원화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롯데뮤지엄 제공
 
©롯데뮤지엄 제공

 
©롯데뮤지엄 제공
 

©롯데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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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혜진 기자(kiwi@interpark.com)
사진: 롯데뮤지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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