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음악으로 전달하고 싶어" 김성수 음악감독(aka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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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공연장,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누구보다 먼저 관객과 인사를 나누고 극의 시작을 알리는 존재가 있다. 바로 오케스트라 피트의 지휘자다. 열정적인 지휘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음악감독의 뒷모습은 그 존재만으로도 박동하는 무대의 에너지를 더욱 실감나게 객석에 전하곤 한다. 김성수 음악감독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또 작곡가이자 편곡자로서 극중 서사를 세련된 선율과 압도적인 사운드로 감싸 건네는 솜씨로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장인이다.

지난 3일 진행된 김성수 음악감독과의 인터뷰는 애초 이달 24~26일 진행될 예정이었던 그의 콘서트 ’23Live’ 홍보를 기화로 마련된 자리였다. 아쉽게도 공연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되었지만, 이날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음악감독뿐 아니라 작곡가 ‘23’으로서, 또 음악이라는 도구를 넘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동시대인에게 말을 건넬 창작자로서 그가 향후 펼칠 무대를 더 기대하게 했다.

“지휘자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사람...
‘겟세마네’ 부르는 마이클리에 눈물 나 지휘 멈추기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베르나르다 알바’, ‘페스트’, ‘썸씽로튼’, ‘광화문연가’, ‘꾿빠이, 이상’ 등의 음악감독이자 때로는 작/편곡가로 활동해온 김성수와 음악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록에서 시작해 비밥, 재즈, 프로그레시브로 영역을 넓혀 음악의 세계를 파고들었고, 고등학교 때는 기타 명문인 미국 MI GIT의 입학 허가도 받았다고. 부모님의 반대로 국내 대학(영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결국 음악의 길로 들어서 이적, 김동률, 이소라, 패닉, 검정치마, 메이트 등의 프로듀서로 일했다.  

뮤지컬은 ‘포비든 플래닛’(2002)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에 참여해왔다. 그를 말할 때 많은 관객들이 먼저 떠올리는 것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선 그의 격정적인 지휘 모습일 것이다. “지휘자는 단순히 박자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고 에너지를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라 격하게 (지휘를) 하게 된다”며 쑥스러운 듯 웃은 그는 “음악감독으로서 내가 할 일은 조연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작곡가가 만든 것을 잘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음악감독의 역할이에요. 예술가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실무자죠. 그 역할에 너무 과몰입하면 음악감독이 작곡가에게 어떤 요구를 하거나 권위를 휘두르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은 라이선스 위주로 뮤지컬 시장이 형성돼 있어서 그러기 좋은 환경이 형성돼 있어요. (작곡가가) 현장에 없으니까. 근데 그 선을 최대한 지키려고 해요. 작곡자를 서포트하고, 배우들을 돕고, 오케스트라를 잘 이끌고, 내 목소리를 낼 때는 내더라도 너무 오버하지 않으려고 하죠.”

많은 화제작에 참여해온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공연할 때 ‘겟세마네’를 부르는 마이클리를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나서 (다음 동작을) 못 들어가고 멈춘 순간이 있어요. 마이클리가 제 아들처럼 느껴지더라고요(웃음). 나중에 마이클리에게 제 지휘봉을 선물했죠. 또 한 번은 같은 공연에서 마지막 곡이 끝나고 잠시 후 박수가 나오더니 그 박수가 물결처럼 퍼져서 3분간 지속된 적이 있어요. 원래는 박수 없이 끝나는 곡인데, 그날 공연을 본 분들은 다 기억하실 거에요. 배우들 모두 커튼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저도 잊을 수 없는 공연이 됐죠.”
 
▲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2015)

뮤지컬 ‘페스트’부터 ‘미인’까지,
신중현, 서태지, 이문세가 감탄한 편곡

사실 그가 순수하게 음악감독의 역할만 한 작품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뿐이다. 대개는 편곡/작곡자로서의 역할을 병행해왔다. 그가 전체 넘버의 3분의 1 이상을 작곡한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이 작품의 작곡가인 故 에릭 울프슨의 딸이 한국 공연을 보고 “당신이 만든 음악이 아버지가 만든 음악과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는 찬사를 남겼다고.

서태지의 음악을 엮어 만든 뮤지컬 ‘페스트’를 비롯해 故 이영훈 작곡가의 곡을 엮은 ‘광화문연가’, 신중현의 음악을 엮은 ‘미인’ 등도 그가 편곡을 맡아 풍성한 사운드로 관객들에게 ‘귀호강’을 선사한 작품들이다.

“편곡자로서는 두 가지 입장에서 작품에 접근해요. 첫 번째로 작곡자의 음악을 빛내야 하고, 두 번째로는 음악이 드라마와 잘 붙게 만들어야 하죠. 처음에는 그들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심으로 음악을 분석하고 만들어요. 그리고 나서 마지막 어느 시점에서는 그 전설적인 작곡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접고 편곡자 이상의 반(半) 창작자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음악이 드라마에 붙고 작품이 나오거든요.”
 
▲ 뮤지컬 ‘페스트’(2016) 

전설적인 작곡가들에 대한 존경을 잠시 내려놓고 창작자로서 새로운 결을 더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작업이었지만, 그의 과감하고 세련된 편곡은 언제나 관객과 원작자 모두를 만족시켰다. 가수 이문세는 ‘광화문연가’를 보고 “훔쳐 갖고 싶은 편곡이 있다”는 말을 전했고, 뮤지컬 ‘페스트’의 음악에 매우 만족한 서태지는 김성수 감독에게 “우리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고.

“‘미인’ 할 때 신중현 선생님과 두 번 같이 공연을 봤는데, 공연이 끝난 후 선생님이 제 손을 꼭 잡으시더니 ‘내가 평생 음악을 들으면서 감동을 받긴 지금이 처음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눈물이 글썽글썽 하시는 모습에 저도 좀 충격이었어요. 제가 만약 그 분들을 무한히 존경하는 마음만 갖고 작업에 임했다면 그런 말을 못 들었을 것 같아요.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내놓았을 때 그 분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거니까요.”
 
작곡가 ‘23’으로서의 음악 세계도 구축 중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 ‘꾿빠이, 이상’ 등

그는 ‘23’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곡가로서도 오롯이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23은 소설가 윌리엄 버로스로부터 출발한, 세상의 많은 비극적 사건은 숫자 23과 관련이 있다는 법칙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 예명을 문신으로도 새겼다.

“2015년 즈음 인생이 나락으로 빠져들어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어요. ‘내가 살면서 그렇게 잘못한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일들이 자꾸 생기지’ 하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죠. 그 때 23을 예명으로 지었어요. 불길함을 말하는 숫자지만, 역설적으로 인생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모두 내 책임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았죠.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해요. 누가 뭘 잘못했는지를 따지거나 또는 자신을 학대하죠. 근데 세상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요즘 젊은 친구들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네가 잘못해서 그런 인생을 사는 거야’라는 얘기를 듣지만, 솔직히 제가 조금이나마 더 나이를 먹고 보니 많은 것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계속 깨닫게 돼요. 그러니 문제가 일어나면 외부로 책임을 돌리지도 말고 자신을 너무 몰아 붙이지도 말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자는 거에요.”
 
작곡가 23으로서 그는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 ‘꾿빠이, 이상’, ‘베니스의 상인’ 등의 음악을 만들었고, 지난 9월 열린 시각예술과 음악을 결합한 전시 ‘팬데믹전’의 음악을 만들었다.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 서사를 깨고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음악은 그 도구일 뿐, 다른 매체를 쓸 수도 있다고.

“‘꾿빠이, 이상’을 할 때는 단순한 목표에서 출발했어요. 관객이 (공연장에) 들어왔을 때 무서워서 나가게 하고 싶다는 거였죠. 우리가 자꾸 텍스트로만 이야기를 하려고 해서 사람의 감각이 퇴화하고 있는 것 같아요. 평소 자각하지 못하는 감정, ‘내가 왜 무섭다가 눈물이 나지? 왜 말로 설명이 안 되지?’하는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그래서 당시 공연에 출연했던 배우들로부터 “이유는 모르는데 음악을 듣고 눈물이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  뮤지컬 ‘꾿빠이, 이상’(2017)

“공연이 인문학 역할 했으면…
코로나 시대 공연 영상화, 신중해야”  

그는 고전을 새롭게 해석해 쓰는 데도 관심이 많다. 작사까지 맡았던 뮤지컬 ‘베니스의 상인’때는 애초 샤일록 역에 여성 배우를 추천하기도 했다. 특히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많아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를 연극으로 만들었고, 뮤지컬 ‘오델로’를 구상해 곡도 거의 만들었다는 그는 공연이 인문학의 역할을 하는 날을 그려본다.

“엄숙주의로 가자는 건 아니에요. 공연은 재미있기도 하고 가볍기도 해야죠.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철학이나 인문학을 우리가 지금 공연을 즐기듯이 즐겼어요. 지금도 관객들은 공연을 보고 머리를 써서 퍼즐을 풀기도 하고, 어떤 화두를 가져가기도 하잖아요. 고전을 재해석하든 새 작품을 쓰든, 지금 현대 사회에서 통용될 만한 가치를 새롭게 제시한다면 공연도 인문학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인문학의 끝은 결국 철학, 윤리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2016년 뮤지컬 ‘록키’의 급작스런 취소 당시 사비로 음악팀 인건비를 먼저 정산하며 남다른 책임감을 보인 바 있다. 그는 최근 코로나19로 급진전된 공연 영상화 사업에 대해서도 공연계 종사자로서 우려를 표했다.


“준비를 하긴 해야 하지만, 단순히 영상화만 하면 너무 빨리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이 될 수 있어요. 음악시장에 MP3가 처음 생겼을 때 좀 더 똑똑하게 대처했다면 지금과 같은 (음원)시장이 빨리 구축됐을 텐데, 섣불리 CD 시장을 포기하는 바람에 음악시장이 거의 끝장났잖아요. 공연도 막연히 ‘이 쪽이 미래니까 빨리 붙잡자’하고 넘어오면 기존 파이만 없어질 수도 있어요.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성과도 영영 멀어질 수 있고요. 저도 어찌 보면 영상화에 최적화된 사람일 수 있지만, 굉장히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춘), 플레이디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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