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배우 10인이 빚어내는 강렬한 무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리뷰
- 2021.01.27
- 박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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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강렬하다. 무대 양 켠의 흰 벽을 등지고 도열해 앉은 인물들이 쿵, 쿵 발을 울리며 서막을 알리고, 그 가운데로 위압적인 기운을 풍기는 여성이 걸어나오며 좌중을 압도한다. 이들은 1930년대, 스페인 남부 지방 알바 가의 여성들이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였던 가장이 죽고 그의 아내였던 베르나르다 알바와 다섯 명의 딸, 하녀 셋, 그리고 치매에 걸린 노모만 남았다.
남다른 풍채로 걸어 나온 사람은 이제 막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를 여의고 집안의 전권을 물려받은 베르나르다 알바다. 걸핏하면 바람을 피우고 하녀를 희롱하던 남편이 죽었으니 홀가분할 법도 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의 얼굴은 엄숙하기만 하다. 소란을 피우는 딸들을 매섭게 꾸짖은 그녀는 하녀들에게 집안의 모든 문을 잠그라고 명하고, 고인의 8년상을 치르는 동안 누구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가부장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억압 속에서 다섯 딸들의 욕망은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한다.
남다른 풍채로 걸어 나온 사람은 이제 막 두 번째 남편 안토니오를 여의고 집안의 전권을 물려받은 베르나르다 알바다. 걸핏하면 바람을 피우고 하녀를 희롱하던 남편이 죽었으니 홀가분할 법도 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의 얼굴은 엄숙하기만 하다. 소란을 피우는 딸들을 매섭게 꾸짖은 그녀는 하녀들에게 집안의 모든 문을 잠그라고 명하고, 고인의 8년상을 치르는 동안 누구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가부장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적 질서와 억압 속에서 다섯 딸들의 욕망은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한다.
지난 2018년 우란문화재단에서 국내 첫 무대에 올라 전원 여성 배우들이 이끄는 무대와 독특한 스타일로 화제를 모은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정동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두 번째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은 초연 당시 타이틀롤을 맡았던 정영주가 프로듀서로 나섰고, 정동극장과 브이컴퍼니가 공동제작했다. 개막일 만난 이 공연은 곧 폭발할 듯한 에너지를 검은 의상 아래로 짙게 뿜어내는 배우들의 열연과 세련된 음악, 안무로 인상을 남겼다.
스페인의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원작을 바탕으로 ‘씨왓아이워너씨’의 마이클 존 라키우사가 극작·작사·작곡한 이 작품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무더운 여름을 연상케 하는 희고 높은 무대, 그와 대비를 이루는 검은 실루엣의 인물들, 이들이 추는 플라멩코 안무와 강렬한 음악 등이 어울린 독특한 스타일로 먼저 이목을 끈다. 플라멩코는 집시의 춤이며 정열의 춤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극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정숙과 순결을 강요당하며 검은 상복으로 몸을 가린 여성들이다. 이 역설적인 조합은 그만큼 더욱 위태로운 긴장감과 관능적인 에너지를 자아낸다.
드라마 역시 강렬하다. 불행한 결혼생활 속에서 “너(남편)의 창녀”로 살며 남편의 방종을 참아내야 했던 베르나르다 알바는 지난 삶에 시위라도 하듯 더욱 가혹한 규율로 딸과 하녀들을 다스리지만, 첫째 딸 앙구스티아스의 약혼자 페페에게 다른 딸들이 남몰래 욕망을 품으면서 베르나르다 알바가 세운 질서에는 균열이 생긴다. 이윽고 그녀가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추문의 위험이 온 집안에 도사리고, 극은 빠른 리듬의 플라멩코 안무와 음악 속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극이 알바 가의 여성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폭력과 억압이 대물림되는 역사다. 가부장이 사라졌으나 가부장적 제도와 규율은 엄존하는 이 집안의 풍경은 오랜 역사 속에서 켜켜이 쌓여온 부조리한 폭력이 어떻게 인간 내면에 깊게 스며 또 다른 폭력을 낳으며, 그것이 인간 본연의 생명력과 욕구를 어떻게 훼손하는지 보여준다. 여성서사극으로 주목받았지만, 넓게 보면 인간 사회의 근원적인 폭압과 부당한 인습, 통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캐스팅으로 진행됐던 지난 초연에 이어 이번 공연에서는 정영주와 이소정이 베르나르다 알바로 분하며, 맏딸 앙구스티아스는 김려원과 최유하가, 둘째 딸 막달레나는 임진아와 황하나가, 셋째 딸 아멜리아는 김환희와 정가희가, 넷째 딸 마르띠리오는 전성민과 김국희가, 막내딸 아델라는 오소연과 김히어라가 연기한다.
상복과 대비되는 흰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를 두르고 딸들의 억눌린 욕망을 대신 드러내는 노모 마리아 호세파는 황석정과 강애심이 연기하고, 이영미와 한지연이 이 집안의 상황을 냉철히 예견하는 집사 폰시아로 분한다. 이와 함께 이진경과 이상아가 각각 원캐스트로 하녀와 그 외 인물들을 연기한다. 여성 배우 10인이 빚어내는 밀도 높은 에너지를 체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공연으로, 3월 14일까지 정동극장에서 펼쳐진다.
글: 박인아 기자(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스튜디오 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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