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맞서는 유머의 힘, <고모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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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죽는다.” 3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모에게서 온 한 통의 편지. 조카 켐프는 직장도 그만두고 한달음에 고모에게 달려간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고모는 보자마자 빗을 냅다 던지고, 화난 듯 일절 말을 걸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 고모와 말을 쉬지 않는 조카의 이야기 <고모를 찾습니다>가 지난 21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는 전막 시연에 이어 구태환 연출, 그레이스 역의 정영숙, 켐프 역의 하성광이 자리한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어졌다.
 
암전, 시간의 흐름을 그리다
<고모를 찾습니다>의 러닝타임은 인터미션(15분)을 포함해 110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30번이 넘는 암전이 들어간다. 그레이스와 켐프의 첫 만남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매 암전 사이에 자리한 짧은 장면들은 어색했던 두 사람이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익숙해져 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린다.

반복되는 암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에는 지미 세르(Jimmy Sert)의 음악이 큰 역할을 했다. 구태환 연출은 “음악이 장면 전환에서 속도감을 살리고, 극의 진행에 따른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작곡가 지미 세르가) 각 신을 이어주는 다리(bridge) 역할 뿐만 아니라 각 상황에 어울리는 좋은 곡을 만들어주셨다”고 설명했다.
 
말을 잃은 노부인 고모, 봇물 터진 중년의 조카
고모 그레이스는 켐프가 찾아온 직후부터 1막이 끝나갈 무렵까지, 한마디의 말도 내뱉지 않는다. 그레이스 역을 맡은 정영숙은 눈빛과 행동으로 잃어버린 말을 대신했다. 켐프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말없이도 차분하고 따스하게 그려냈다. 정영숙은 “찾아올 이 없는 소외된 노인으로 살다 보니 말을 잃은 것 같다. 켐프의 아픈 과거와 고독을 함께 나누며 잃었던 말을 다시 찾아가는 거다”라며 그레이스의 마음을 대변했다.

반면 고모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공백은 켐프의 끊임없는 대사로 채워진다. 켐프 역의 하성광은 “처음 대본을 봤을 때는 일방적으로 켐프의 대사만 쓰여 있어 의문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켐프는 그동안 소통의 부재 속에 살았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뭉쳐있던 말들을 고모라는 유일한 탈출구를 만나 봇물 터지듯 쏟아붓는구나’ 싶었다. 고모를 만나고 난생처음 이렇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을까”라고 답했다.

“켐프의 방문 이전에는 아무도 그레이스를 인지하지 않았을 거다. 반대로 켐프 역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두 사람은 뜻하지 않는 동거를 통해 완성되는 거다”라는 구태환 연출의 말처럼, 두 사람은 서로가 있어 드디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죽음은 현실이지만, 유머를 잃지 말자
 ‘곧 죽는다’는 고모의 편지부터 작품의 말미까지, <고모를 찾습니다>에서 ‘죽음’은 가장 큰 주제이자 소재로 다뤄진다. 어쩌면 가장 두렵고도 무거운 주제이지만, 작품은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작가 모리스 패니치가 불안, 분노, 좌절을 대하는 방법이 냉소와 유머에 있기 때문이다. 모리스 패니치는 예술의전당에서 공개한 인터뷰에서 “우울함과 무너진 희망에 맞서는 무기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이며, 삶의 전쟁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패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무기는 켐프의 상처와 고통을 보여주는 과정에도 적용된다. 켐프는 즐겁게 웃다가, 급작스럽게 화를 냈다가, 또 갑자기 울기도 한다. 구태환 연출은 켐프의 행동에 대해 “유년기에는 선택할 수 없는 양육환경 속에 많은 상처를 받고, 그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고스란히 남아 인간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켐프의 경우 경계성 성격장애, 편집성 성격장애, 반사회성 성격장애 등 성격장애 유형의 모든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고, 그런 성격의 근원에는 현대인의 고립과 고독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무거운 아동학대, 그리고 그 탓에 생겨난 고독을 표현하는 데에도 이 작품은 따뜻한 유머를 놓지 않는다. 우울함에 맞서 이길 수 있도록.
 
(왼쪽부터) 구태환 연출 / 정영숙 (그레이스 역) / 하성광 (켐프 역)
 

캐나다 대표 극작가 모리스 패니치의 <고모를 찾습니다>는 11월 22일부터 12월 11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 사진 더 보기]


글: 조경은 기자 (매거진 플레이디비 kejo@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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