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곤히 백석에 대해 이야기 나눈 시간, <나와 나타샤와…> 배우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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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해 한 편의 공연을 만들어가는 배우들을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설레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나흰>) 배우들과의 만남은 조금 더 특별했다. 이 극의 주인공인 백석을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해온 시인 안도현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시인과 배우들의 만남은 <나나흰> 무대처럼 따스하고 잔잔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고조곤히’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미덥고 정답고’와 같은 백석의 시어가 자연스레 생각나는 자리였다. 이날의 풍경, 그리고 배우들과 안도현 작가가 함께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백석과 사랑에 빠진 작가와 배우들, 백석과의 첫 만남은?
<나나흰>의 강필석, 정인지, 안재영 배우와 안도현 작가는 이날 ‘백석’이라는 공통 화두를 두고 한 자리에 모였다. 2014년 <백석 평전>을 쓴 안도현 작가는 애초 백석이 너무 좋아 “백석을 베끼기 위해” 시를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필석, 정인지, 안재영은 현재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창작뮤지컬 <나나흰>에 출연 중이다. 이전까지 백석에 대해 잘 몰랐던 세 사람은 이번 공연을 통해 백석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이날의 이야기는 안도현 작가의 백석 소개에서부터 출발했다. 시인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시인 김소월, 소설가 황순원, 화가 이중섭의 모교이기도 한 오산고보를 졸업한 그는 이후 조선일보와 영생고보 등에서 일하다 1941년 만주로 건너갔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1996년 생을 마쳤다.
 
뮤지컬 <나나흰>은 백석의 생애 중에서도 그가 함흥에서 기생 자야를 만난 1936년 전후의 시기를 재구성해 그린다. 자야의 시점에서 출발하는 이 작품은 할머니가 된 기생 자야가 젊은 날 백석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더듬어가는 추억의 여정을 뒤쫓는다. 관객들의 호평 속에서 순조롭게 초연 중인 이 뮤지컬은 첫 만남부터 배우들의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고.
 
“대본을 읽고 고민하지 않고 바로 출연을 결정했어요. 공연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이 뮤지컬은 굉장한 서사가 들어간 작품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대본을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꼭 해야겠다, 싶었죠. 뭔가가 가슴에 훅 들어왔던 것 같아요.”(강필석)
 
“대본을 받기 전에 백석에 대해 자료 조사를 했어요. 그리고 나서 대본을 봤더니 ‘여보 나 왔소’라는 첫 대사부터 (감정이 치밀어) 안 넘어가지는 거에요. 물론 공연 속 백석이 자야가 만들어낸 환상일 수도 있지만, 여기 나오는 백석의 시 하나하나가 그녀가 기억하는 백석이라는 인물을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백석이라는 시인이 너무 알고 싶어졌고, 그의 시를 다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정말 백석의 시에 철저하게 ‘치여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정인지)
 
자야에서 출발해 백석으로 돌아오는 <나나흰>의 이야기  
<나나흰>의 주요 테마는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다. 백석을 연기하는 강필석 역시 “백석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까 보다는 둘 사이에 벌어지는 공기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하고 있다”고. 그런데 안도현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공연 속 자야와 실제 자야의 모습은 살짝 다르다. “좀 실망스러우실 텐데 자야가 이렇게(정인지 배우처럼) 예쁘지 않습니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낸 안도현 작가는 백석에 이어 실제 자야(김영한)가 어떤 여성이었는지도 이야기했다.
 
“자야는 굉장히 생활력이 강하고, 고관대작이나 재계의 인물들을 휘어잡는 여장부 스타일이었어요. 사실 평생 백석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어요. 1940년까지 만주에 있는 백석에게 옷을 보내기도 했다는데, 그 이후에는 다른 애인과 동거를 하기도 했고, 자식도 둘 있었죠. 돌아가시기 전에 전 재산을 절에 시주했는데 그 당시 천 억원 정도였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그걸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여장부였던 거죠”(안도현)
 
그러면 공연 속 자야는 어떤 여인일까.
 
“실제 자야와 공연 속 자야의 공통점은 삶의 마지막 날 백석을 떠올렸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야가 마지막 순간에 그를 떠올리며 죽었을 거란 것은 의심하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자야의 삶이 어땠는지도 중요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가시는 분들의 마음에 백석의 시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 공연이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자야의 심정을 담은 곡이 있었을 텐데, 저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백석의 시를 노래하거든요. 이야기의 화자는 자야이지만, 사실은 백석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정인지)
 
자꾸만 곱씹어보게 돼” 백석의 시를 오롯이 전달하기 위하여
다 보고 나면 마음 속에 백석이 오롯이 남는 공연. <나나흰>을 그런 공연으로 만들기 위해 배우들은 고민을 거듭하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야와 백석, 사내 사이에 흐르는 정서를 많이 고민했어요. 우리가 눈을 마주치지 않을 때도 분명 우리 사이에 어떤 기류가 흐르고 있거든요. 그런 기류를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처음 시를 펼쳤을 때 느꼈던 뭔지 모를 감정들을 관객 분들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안재영)
 
“제 경우는 그냥 그 순간 시가 나한테 어떤 감정을 전해주는가에 집중해요. 묘하게도 매 공연마다 어떤 단어나 문장이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와 같이 길을 걸어줘요. 그리고 시어가 너무 예뻐서 자꾸 곱씹어보게 되고, 조금 더 예쁘게 발음하고 싶어져요. 그때그때 다가오는 게 다른 것 같아요.”(정인지)  
 
“저는 최대한 담백하게 노래를 전달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처음에 노래를 부를 때 되게 힘들었어요. 보통의 뮤지컬 넘버는 인물을 어디론가 향하게 하는 드라마적인 기능을 하는데, 여기서는 시를 가사로 쓰다 보니 1절과 2절의 멜로디가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버릇처럼 여기는 이렇게 (세게) 가볼까, 하면서 불안해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최대한 담백하게 전달하려고 해요. 내가 구체적인 것을 넣는 순간 관객분들이 뭔가를 느끼는 걸 가로막을 것 같거든요.”(강필석)
 
안도현 작가와 배우들이 꼽은 ‘최애’ 시는?
그렇게 연습 기간부터 몇 달간 백석의 시를 거듭해서 곱씹고 노래해온 배우들은, 그리고 30년 간 백석을 지독히도 ‘짝사랑’해왔다고 말하는 안도현 작가는 백석의 시 중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할까. 안도현 작가는 ‘흰 바람벽이 있어’를 꼽았다.
 
“백석이 만주 생활을 할 때 쓴 시인데, 워낙 좋아해서 제 네 번째 시집 제목을 여기서 훔쳐왔어요. 이 시에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댁에 들어가실 때 ‘외롭고’와 ‘쓸쓸하고’ 사이에 왜  ‘높고’가 들어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혹시라도 남친이 없어서 외롭고 쓸쓸하실 때는 그 중간에 ‘높고’를 넣어서 생각하면 훨씬 위로가 됩니다.”(웃음)(안도현)  
 
“공연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향’이라는 시가 있어요. 시 같지 않고 꼭 일기 같아서 되게 좋아하는 시에요. 읽다 보면부모님 생각도 나고 집 생각도 나고, 집에서 먹던 밥 생각도 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더라고요.”(안재영)
 
“저희 공연에 백석의 시가 약 20편의 노래로 나오는데, 한 곡 한 곡이 다 너무 좋아서 뭘 꼽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한동안 ‘흰 바람벽이 있어’에 너무 치여서 자기 전에 듣다가 괜히 울기도 했는데, 요즘은 ‘국수’(넘버 ‘반가운 것’)가 좋아요.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같은 말들이 화려한 말들보다 오히려 마음에 세차게 다가와요.”(정인지)
 
“저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가장 좋아해요. 사실 작년에 부산에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간판을 봤는데, 되게 신기했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뭔가 그로테스크하지 않나요? 근데 지금은 이 제목이 너무 친숙하고, 노래를 할 때마다 기분이 되게 묘해요. 뭔가 해방되는 느낌도 들고,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공연을 끝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즐겁고 희망적인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이 시를 가장 좋아합니다.”(강필석)
 
이어서 관객들이 직접 작성한 질문을 토대로 작가와 배우들이 답하는 Q&A시간이 이어졌다.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관객과의 Q&A
Q. 안도현 작가님은 백석의 시를 소재로 한 뮤지컬, 연극이 공연되는 것을 보며 기분이 어떠세요? 개인적으로 백석의 삶 중 가장 극적인 시기는 언제라고 보시는 지도 궁금합니다.
안도현: 글이 리듬을 만나 가곡도 되고, 뮤지컬도 되고, 가요도 되면서 활자가 가진 힘이 열 배 정도 더 커지는 것 같아요.그래서 이런 시도가 더 자주 있으면 좋겠습니다.
 
백석은 1958년 평양에서 쫓겨나 개마고원에 있는 삼수군으로 가게 됩니다. 귀양을 간 것이나 마찬가지죠. 거기서 삼십 몇 년을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평양에서 쫓겨나가게 된 시점에 굉장히 고민이 굉장히 깊었을 거에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양을 키우며 시를 안 쓰고 살았을 때 오히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 시를 안쓰니까 전 굉장히 좋더라고요. 마감에 쫓길 일도 없고, 청탁도 안 오고(웃음).
 
Q 연극 <백석우화>도 공연 중인데, 이렇게 백석이 지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안도현: 저도 잘 모르겠네요(웃음). 저도 재작년에 <백석 평전>을 내고 나서 20쇄 정도를 찍었어요. 제가 쓴 다른 책은 잘 안 나가는데(웃음). 아마 90년대 중반 이후 작고한 시인들의 시집 판매량을 통계 낼 수 있다면 해마다 백석이 1위였을 거에요. 그만큼 ‘백석 신드롬’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묘한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책을 내긴 했지만, 아직 백석의 삶을 총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없어서 사람들의 궁금증도 있는 것 같고요.
 
Q (강필석 배우에게)극 중 자야에게 ‘나 대신 택한 걸 봐’라고 묻는 대사가 있는데, 이 때 어떤 감정이신가요.
강필석: 사실 그 대사는 자야가 자야에게 하는 말 같아요. 이 이야기가 자야의 기억 속을 여행해가는 과정이잖아요. 그 과정에서 자야가 자신에게 ‘너 왜 (백석에게) 안 갔니’하고 묻는 것 같아요. 사실 백석이 묻는 거라면 되게 이기적인 말이잖아요. 자기는 할 거 다 하면서 자야가 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거니까. 그래서 자야가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감정을 담지 않은 채 최대한 담백하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Q (정인지 배우에게) 자야와 실제 닮으신 부분이 있나요?
정인지: 사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신여성으로서 극 중 자야는 ‘1도’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어요(일동 웃음). 이렇게 자기 앞가림 제대로 못하고 멋 부리는 걸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서 흰 밥에 가재미를 준비한다고?(일동 웃음) 공연을 하면서 저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지점은 백석을 통영으로 보내면서 넥타이를 매어 줄 때였어요. 그가 어디에 가는지 알지만, 5m정도 되는 긴 줄을 강아지에게 묶어 놓고 살짝만 당기면 다시 불러올 수 있을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요(일동 웃음).
 
Q 자야를 표현하며 힘들었던 점은요.
정인지: 백석을 연기하는 세 분의 스타일이 서로 너무 다 다르다는 것이 힘들어요. 이 공연에서는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잘 표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 백석에게서 느낌이 확 오는 순간이 공연마다 매번 다르거든요.
 
Q (안재영 배우에게) 공연하면서 백석이 가장 얄미운 장면이나 자야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장면을 꼽는다면.
강필석: 질문이 조금 잘못된 것 같은데 맞나요?(일동 웃음)
안재영: (웃음)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자야가 내내 안타깝죠. 백석을 통영으로 보내며 넥타이를 매어줄 때도 그렇고. 근데 그렇다고 해서 백석이 그렇게 얄밉지는 않아요. 자야를 사랑하는 모습이 진심 같아서 미워할 수가 없거든요.  
 
Q 극 중 맡은 다양한 역할 중에서 특히 몰입이 잘 되거나 애착 가는 인물이 있나요.
안재영: 집배원을 가장 몰입해서 연기합니다(일동 웃음). 농담이고요, 극 중 사내가 여러 인물로 등장하지만 한 번도 의상을 갈아입지 않거든요. 그건 모든 장면에서 그냥 ‘사내’로서 등장한다는 뜻 같아요. <김종욱 찾기>의 멀티맨처럼 역할이 휙휙 바뀌는 데 포커스가 있는 게 아니라, 백석과 자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켜보며 그들과 공존하는 것에 좀 더 포커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캐릭터를 더 옅게 표현하는 데 신경을 썼어요.
 
관객과의 문답, 그리고 포토타임을 끝으로 <나나흰> 배우들과 안도현 작가와의 만남은 마무리됐다. 여느 때보다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자리였지만, 참가자들은 지루함을 느낄 틈 없이 백석과 <나나흰> 공연을 둘러싼 알찬 이야기들에 푹 빠져든 모습이었다. 안도현 작가와 배우들 역시 이날의 만남에 대해 각별한 소감을 전했다.
 
“사실 안도현 시인님과의 자리가 영광스러우면서도 되게 부담스럽게도 했어요. 근데 오길 잘한 잘 한 것 같아요.. 계 탄 느낌입니다(웃음). 이 공간도 처음 와봤는데 너무 좋네요.”(강필석)
 
“오늘 이 자리를 통해서 백석을 더 좋아하게 됐고, 앞으로도 자꾸만 그가 더 좋아질 것 같아요. 그냥 관객과의 대화가 아니라 정말로 작품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너무 뜻 깊은 자리였습니다.”(정인지)
 
“이 공간이 참 재미있죠? 책꽂이도 특이하고. 일부만 얻어서 가져가고 싶네요(일동 웃음). 소근소근 이야기하듯 대화 나눈 것도 좋고요. 배우들, 또 여러분과 함께 백석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이야기한 것 같아 참 좋습니다.”(안도현)
 
“마치 시집 한 권 읽은 것처럼 즐거웠던 시간이에요. 작가님이 직접 이런 저런 말씀을 해주시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고요. 저도 시를 한 편 써볼까, 라는 생각도 들어요.”(웃음)(안재영)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남경호(북DB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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