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긍정, 다시 한 번 뛰어보자˝ <탈출> 고선웅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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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웅 연출은 2016년을 가장 바쁘게 지낸 사람 중 한 명일 것이다. 뮤지컬, 연극을 비롯해 오페라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것도 모자라, 숨을 돌리기 무섭게 극단 마방진의 연출로 돌아왔다. 마방진의 2016년의 마지막 작품,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다.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은 생존을 위해 사선을 넘었지만, 남한의 현실에 부딪혀 또 다른 생존과 싸워야 하는 북한이탈주민의 이야기를 그린다. 목숨을 건 남으로의 탈출은 과연 이들에게 정말 새로운 삶을 안겨주었을까. 공연 개막을 사흘 남짓 앞둔 지난 화요일, 100분간의 런쓰루 연습 직후 고선웅 연출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이번 작품은 2014년 경기도립극단 정기공연으로 올랐었다. 이번에 극단 마방진의 2016년 마지막 작품으로 새롭게 올리게 된 이유가 있는지?
근래 난민 문제가 이슈인데 자신이 살던 나라를 떠나온다는 건 참 뼈아픈 문제다. 이 이야기를 추운 겨울에 한 번 다루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극단을 운영하다 보면 연말을 잘 보내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다음 해까지 잘 보낼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추운 겨울을 기운 넘치게 보내면 내년을 새롭게 맞이할 수 있는 근력이 생기지 않을까. <탈출_날숨의 시간>은 굉장히 육체적이고,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 점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Q. 2014년 공연 제목은 ‘날숨의 시간’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탈출’이라는 단어가 덧붙은 이유가 있나?
‘날숨의 시간’은 차분하고, 문학적인 분위기가 강하지만, ‘탈출’은 단어 자체에 역동성이 담겨 있다. 관객들도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정말 ‘탈출’을 한 거야?’ 하는 의문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작가와 상의해서 넣게 되었다.
 
Q. 14년 공연과 이번 공연의 차이점이 있다면?
우선 배우 수에서 차이가 난다. 14년도 공연보다 8명이 늘어나 24명의 배우가 나오다 보니 공연이 좀 더 풍성해졌다. 그리고 도립극단은 관록 있는 선배님들이 많아 그 앙상블이 좋다. 반면에 마방진에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 젊은 패기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각자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Q. 연출가의 특성이자 극단 마방진 특유의 어투에서 생겨나는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연극은 그래야 하는 것 같다. 도립극단은 도립극단에 어울리는 앙상블을 찾아내고, 마방진은 마방진 식의 색깔을 찾는 거다. 나 스스로는 이걸 ‘마방진식 몽타주’라고 표현하는데, 마방진식 몽타주를 역동적으로 짜내면 관객들이 (극에) 금방 익숙해질 수 있다.
 
Q. ‘마방진식 몽타주’라고 했는데, 확실히 마방진은 색깔이 확고하다. 처음 볼 때는 더 연극적이라 거리감이 생기지만, 익숙해지는 순간 훅 빠져드는 힘이 있다. 이번 작품 역시 무거운 내용이지만 웃음을 함께 담아 슬픔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맞다. 이화(異化)가 없이 동화(同化)만 가지고 관객들을 가늠할 수는 없다. 정말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룰 때 ‘사람들이 이렇게 슬픈데 (세상이) 이러면 되느냐’라고만 하면 관객들이 공연을 어떻게 보겠나. 연극은 긴장과 완화가 계속되면서 만들어지는 드라마적인 덩어리가 심장을 치는 거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화가 잘 안 되더라. 워낙 (슬퍼서).
 
Q. 최근에는 북한이탈주민을 다루거나, 이들을 주요 출연진으로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있다. 인터넷 방송을 통해 활동하는 북한 출신 BJ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가십거리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알리기도 하는 등 양날의 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니까 특정 주제가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유혹적인 실마리가 있다고 하면 침소봉대해서 오락도 만들 수 있지만, 나 스스로는 예능 프로그램에 크게 관심이 없다. 내가 탈북자에 대해 가장 와 닿는 점은 오천에서 만 킬로미터 정도를 넘어오는 탈북과정이다. 공안들도 무섭지만, 걸리면 바로 북송이다. 그러면 수용소로 넘어가는 거고.

북한이탈주민들의 사활을 건 탈출을 물리적으로 보게 되면 정말로 이들이 사선을 넘어서 왔다는 걸 알게 될 거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탈북했다고 하면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도망 왔겠지’, ‘브로커가 다 해준다며’ 이 정도로만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이 정말 힘들게 넘어온다는 건 잘 모른다.

팸플릿에도 썼지만, 이 사람들은 자신을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짐승 취급을 받았다는 거다.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한에 왔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주면, 그리고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 남한이 가진 자본의 이데올로기 내지는 욕망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역설적으로 이들이 실질적으로 ‘탈출’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 시대의 탈북민을 화두로 한 연극으로는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Q. 100여 분 정도의 공연에서 탈출 과정을 40분 가까이 보여주는 것 역시 그 험난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한 건가. 긴 과정을 지켜봤기 때문에 남한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맞다. 이 작품의 콘셉트도 그렇고, 탈북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탈북 장면을 짧게 5분, 10분 보여줘서는 뒤에 이어지는 남한 생활이 의미가 없다. 그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자유와 꿈을 찾아온 곳에서 꿈도 행복도 얻어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민족으로서의 공감대를 찾았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처음에는 새터민에 대한 다소의 경계심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 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Q. 처음 런쓰루에 들어가기 전 배우들에게 ‘억지로 힘든 척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힘든 정도로만 표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연습을 보니 정말 ‘억지로’ 힘든 척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쉬지 않고 움직이더라. 체력 소모가 많을 것 같은데
배우들에게 ‘이 작품은 체력 싸움이니 준비를 잘해라’ 하고 언질을 줬다. 게다가 주인공인 미영, 미선 두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는 게 정말 힘든 장면이다. 직전까지 엄청나게 뛰었기 때문에 노래를 부를 때 숨이 차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배우들이 (알아서) 체력을 잘 길러가고 있다. 다들 하체가 튼튼해졌다. (웃음)
 
Q. 연습을 지켜봤는데, 가까이에서 쉴새 없이 흐르는 땀방울을 보니 탈출 과정의 살벌함이 더 와 닿더라.
그래서 KB하늘극장을 쓰게 된 거다. 관객들이 원형 무대가 아닌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이 작품을 만나면 (거리감이 생겨) 바로 팔짱 끼고 보게 된다. 구리 아트홀에서도 공연할 예정인데 큰 공연장이라 가까이서 보는 것과 느낌이 달라서 걱정이다.
 
Q. 보통 무대장치나 전환을 최소화하고 간결하게 쓰는 편이다. 특정 장소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 여러 장면을 유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가
연극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아날로그적이지만, 반대로 매우 디지털적인 면도 있다. (눈앞에 있는) 종이컵을 두고 ‘째깍째깍’하면 시한폭탄이 되고, ‘뻥! 아, 깜짝이야’ 하면 그 폭탄이 터지는 거다. 그런데 ‘이건 컵일 뿐이니 정말 시한폭탄을 만들자’ 해서 전선을 연결하고 시계를 매달아서는 연극적인 맛이 없다. 물론 그런 작품이 갖는 힘도 있지만, 마방진의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영세한 극단에서는 과도하게 소품에 기력을 낭비하기보다 연극이라는 장치, 연극적인 약속에 의해서만 움직이면 된다. 연극은 완벽한 놀이다. 놀이는 서로 약속만 하면 되니까 구체적인 무엇이 필요 없다.
 
Q. 작품을 통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사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음악이 중요한 요소가 되더라. 음악을 고를 때에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건가.
본능적으로 고른다. ‘이 음악이 어울리겠는데?’하고 넣는 거다. 이 작품에서 나오는 영화 <사랑과 영혼> OST (Unchained Melody)는 그야말로 상투적인 노래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생경하고 낯선 노래일 수 있고, 미국이라는 메타포가 담겨 있어 극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Q. 연극, 뮤지컬, 최근 오페라까지 장르가 다양한 만큼 주제도 광범위하게 다뤄왔다. 차기작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지.
‘이거 재미있겠다’ 하면 하는 거다. 내 심장이 움직이면 가는 거다. 작품마다 고유의 색이 있고, 그 색을 극대화하는 것이 재미있다. <맥베드>면 <맥베드>, <홍도>면 <홍도>, 그리고 이 작품도 <탈출-날숨의 시간>만의 색이 있다.
 
Q.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는지.
기회가 되면 할 거다. 난 ‘해보는’ 게 재미있다. 하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깨지기도 하지만, 인생은 짧은데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는 연극배우들만 나오는 연극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
 
Q. ‘죽어도 긍정’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맞다, 죽어도 긍정이다. 내가 작품을 많이 하다 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있냐고 하지만, 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하는 거다. 다작하는 것에 대해서 ‘젊은 나이에 저렇게 많이 하는 거 위험한데, 기력 다 빠질 텐데’ 하는 걱정도 물론 동감한다. 하지만 내가 혼자서 기력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으니 1/n인 거다. 어떤 팀에 가도 ‘이 사람들이 있으니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니까 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내가 작업을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휴업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맥베드>를 끝내고 ‘힘드니까 <탈출-날숨의 시간> 못하겠다’고 하면 극단 친구들은 송년을 쉬어야 하는 거다. 그러니까 하는 거다. 나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거고, 단원들도 서로 그 마음을 아니까 좋은 기운이 돈다. 그러면 작업은 훨씬 수월하고 할 만해진다. 소품만 해도 ‘여기엔 크리스마스트리를 놓을까?’ 하면 밤늦게 연습이 끝나도 다음날 오면 다 준비되어 있다. 내가 없어도 자기들끼리 런쓰루 연습도 하고 다한다. 정말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할 수 있는 거다.
 
Q.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극단과 작업할 때와 타 프로젝트와 작업할 때는 호흡이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우리 극단과 작업할 때는 서로 아주 익숙해서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이 있다. 일단 마방진 배우들의 장점은 무조건 행동한다. ‘뛰어’ 하면 뛰고, ‘걸어’ 하면 걷고, ‘움직여’ 하면 움직인다. ‘지금 왜 움직여야 하지?’ 하는 의문이 없다. 그래서 굉장히 금방 작업하고 진도가 빠르다. 디렉션을 주면 정확히 하니까 복잡하지 않다. 반대로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서로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나와 많은 이야기를 안 한 상태에서 처음 만나니까 나를 재기도하고 많은 고민을 하는데, 우리 극단과 작업할 때는 그런 시간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Q.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에서 2016년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됐다. 이제 주변에서도 고선웅 연출의 영향을 받아 꿈을 키우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다. 연극계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연극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 중에는 고뇌를 하는 이들이 있다. 고뇌는 연극이 아니다. 연출이든, 배우든 어떻게 즐겁게 작업할 수 있을지만 생각하면 된다. 연습 과정 자체가 행복해야 하고,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가 행복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다. 고민하고 고뇌하고 너무 처절하다. 그러면 그 그늘이 고스란히 무대에 올라간다. 연극은 매우 즐겁고 행복한 작업이라는 전제로,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왜 그럴까’ 반드시 따져 묻고, 즐겁게 바꿔야 한다. 이게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길만 가버리면 관객들이 감동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극은 극단 작업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같이 밥 먹고, 술 마시고, 비슷한 품질의 똥을 싸야 관계가 좋아지는 거다. 앙상블은 단기간에 만들기가 어렵다. 프로젝트 성으로 만나면 서로 친해지는 데 많은 기력을 소모해야하지만, 같이 생활을 하고 한솥밥을 먹게 되면 아무래도 서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작업 외적으로 기력을 소모할 일이 없다.
 
Q.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신다면.
최근 시국도 좋지 않은데, 연극계는 그런 일이 한 번 터지면 정말 치명적이다. 송년에 이 공연을 통해 여러 사람이 뛰고 땀 흘리는 모습을 보며 힘을 고르고, 다시 한번 뛰어야겠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게 연극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바람이다.
 
사선 넘어 찾아온 이 곳, 난 사람일 수 있을까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

연습 시작 전, 배우들은 각자 무대에 자리를 잡는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바짝 조여진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땡그랑” 동전 한 닢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춘다. 이제 시작이다. 목숨을 건 탈출이 눈 앞에 펼쳐진다. 연습이 시작되고 40여분, 배우들은 쉴 새 없이 달리고, 기고, 뛰어넘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다. 땀방울이 쏟아지고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라도 어느 순간 호흡을 삼켜야 한다.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다.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은 북에서 남으로, ‘짐승’에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건너오는 이들에게는 제각각 꿈이 있다. 언니 미영은 무용수를, 동생 미선은 뮤지컬 배우를, 철진과 성림은 만둣집을 꿈꾼다.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은 송화도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국경을 헤쳐 남한 땅을 밟는다.

드디어 이곳에서 큰 꿈을 품고 도착한 희망의 땅, 하지만 현실은 차가운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강도질 하다 내려왔어? 간부 아내 강간질 하다 내려왔어?”, “너네 정착하면서 돈 받는 거 우리 같은 사람들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화나도 참아야 돼!” 끝없는 고통의 굴레 속, 과연 그들은 정말로 ‘탈출’에 성공하고 ‘사람’으로 살게 된 걸까.

북한이탈주민의 생존을 그린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은 오는 12월 9일부터 25일까지 국립극장 KB하늘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 조경은 기자 (매거진 플레이디비 kejo@interpark.com)
사진: 배경훈 Mr.Hodol@Mr-Hod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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