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삶·죽음 집요하게 묻는다, <벙커 트릴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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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장 공간을 활용한 참신한 시도로 초·재연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했던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어 또 다른 소극장 3부작이 무대에 올랐다. <카포네 트릴로지>와 <사이레니아>로 국내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제스로 컴튼의 대표작 <벙커 트릴로지>다. <벙커 트릴로지> 제작진은 지난 13일 프레스콜을 열고 작품의 주요 장면을 언론에 소개했다.
 
이 연극은 ‘모르가나’ ‘맥베스’ ‘아가멤논’ 등 세 가지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고대 비극과 전설을 재해석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전장의 참호 속으로 가져온 작품이다. 이날 배우들은 각 에피소드의 주요 장면을 약 한 시간 가량 선보였다.
 
“저도 입대하겠습니다!”
모험처럼 떠난 전쟁에서 무너져가는 세 청년의 이야기 ‘모르가나’

배우들이 가장 먼저 선보인 에피소드는 ‘모르가나’로, 전설 속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세 청년이 전쟁의 참담한 실상을 목격하고 무너져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전장에 참여해 무훈을 세울 생각에 부풀어 있던 청년들은 폭격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점점 지쳐간다. 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이 무인지대에서 만났다는 ‘모르가나’라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세 사람의 사이에도 서서히 균열이 생겨난다.
 
“위에 있는 사람은 몰라요. 여기 와본 적이 없으니까”
군인들을 사로잡는 환영과 죄의식…극중극 형식의 ‘맥베스’

이어진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재해석한 에피소드다. 전쟁이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참호 속에 갇힌 맥베스는 귀를 찢는 포격 소리와 독가스로 혼미해져 환청을 듣는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 왕이 마녀들의 유혹과 환영으로 몰락을 자초했다면,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전쟁의 광기와 공포, 죄의식으로 하나 둘 무너져간다. 제스로 컴튼의 원작에서 맥베스의 대사를 인용했던 것과 달리 지이선 작가가 각색한 국내 버전에서는 극중극으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전장 속 맥베스의 이야기가 교차로 펼쳐진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고통은 전쟁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전쟁의 무의미함 고발하는 ‘아가멤논’

배우들이 이날 마지막으로 시연한 에피소드는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남긴 동명의 비극을 모티브로 한 ‘아가멤논’이다.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한 영국 여성 크리스틴과 독일군 저격수 알베르트의 삶은 전쟁으로 전장터 안팎에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누군가는 전쟁이 “모든 기술과 산업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키는 거대한 도구”라고 주장하지만, 실상 전쟁은 전장의 군인들 뿐 아니라 일상에 남은 민간인들의 삶도 철저하게 망가뜨린다는 것을 이 극은 보여준다.
 
(왼쪽부터) 김태형 연출, 지이선 작가

영국 연극계의 유망주로 알려진 제스로 컴튼&제이미 윌크스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이번 공연에는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 등 한국 제작진의 고민과 새로운 시도가 많이 담겨 있다. 앞서 내한했던 제스로 컴튼은 “한국 공연은 드라마와 캐릭터를 더욱 보강해 또 다른 작품으로 완성됐다”고 말한 바 있다. “각색한 부분보다 각색하지 않은 부분을 꼽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고 말한 지이선 작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에 허투루 쓸 수 없어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가진 세계대전의 이미지는 대부분 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것들이다. 1차 세계 대전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그리고 당시 영국이 그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국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게 고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모르가나'의 경우 새로운 이야기가 생기기도 했고, '아가멤논'과 '맥베스'의 경우 그냥 다시 썼다(웃음).”(지이선)
 
‘맥베스’ 에피소드의 마지막 대사나 ‘아가멤논’ 에피소드에서 크리스틴이 여성 참정권 운동을 했다는 설정 등도 각색 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것이라고. 무수히 많은 인명이 희생된 전쟁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애도의 뜻이 반영된 결과다.
 
“’맥베스’의 마지막 장면 대사가 원래 이렇게 길지 않았다. 연습하며 뭔가 아쉽고 안타까웠다. 1차 세계대전 때 민간인을 포함해 2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 죽음에 대해 좀 더 소중히 얘기하고 싶었고,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것이 남은 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 작가님께 대사를 추가해달라고 요청했다.”(김태형)
 
“아직도 전쟁을 현실 논리에 입각해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 역시 분단국가이기에 그런 생각이 팽배해 있다. 그런 상황에 비춰봤을 때 다소 설명적일지라도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좀 더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지이선)
 
배우들 입 모아 “힘들지만 행복해”
이처럼 묵직한 고민이 실린 작품이라 배우들이 느끼는 부담감도 커 보였다. 김태형 연출, 지이선 작가에 이어 출연 소감을 밝힌 배우들은 모두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카포네 트릴로지> 초·재연에 이어 이번 공연에도 출연하는 이석준은 “‘트릴로지’란 말이 붙으면 일단 힘들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세 작품을 동시에 하는 것 같다. 내가 작품에 몰입하는 속도가 비교적 빠른 편인데도 불구하고 힘들다”면서도 “하지만 분명 매력이 있다. 극장으로 오는 순간 순간이 행복하다”고 전했다. 다른 배우들 역시 같은 소감을 전했다.
 
“<킬미나우>를 할 때 심적으로 힘들었는데 이 작품에는 그걸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 힘들지만 행복하다.”(오종혁)
 
“공연장에 올 때마다 ‘어차피 오늘도 힘들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집중을 해도 힘들고 안 해도 힘들다면 우리 팀을 위해 집중하는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임한다. 힘들지만 행복하게 하고 있다.”(신성민)
 
임철수는 연습 과정에 대해 “연습이 끝나면 사생활이 없어지더라”고 토로한 후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다들 내가 (무대에) 덜 나와서 덜 힘들거라고 하지만, 나도 힘들다. 고충을 알아주시면 좋겠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냈다.
 
전쟁과 삶, 죽음을 둘러싼 밀도 높은 이야기를 담아낸 <벙커 트릴로지>는 내년 2월 19일까지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글: 박인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iapark@interpark.com)
사진: 기준서(www.studioch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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